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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저자사항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 = (The)capitalists in modern Korea : from Min Yeong-hwi to Ahn Hee-je, from Busan to Pyongyang : 민영휘에서 안희제까지, 부산에서 평양까지 / 지은이: 오미일 인기도
발행사항
서울 : 푸른역사, 2014
청구기호
332.092251 -14-1
자료실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부산관] 서고(열람신청 후 2층 주제자료실)
형태사항
443 p. : 삽화, 가계도, 초상 ; 23 cm
총서사항
푸른역사 학술총서 ; 15
표준번호/부호
ISBN: 9791156120100
제어번호
MONO1201407260
주기사항
참고문헌(p. 416-427)과 찾아보기(p. 435-443) 수록

목차보기더보기


책을 내며

서설 _ 근대 자본가층의 계보와 초기 한국 자본주의의 특징
1. 근대 한국 자본가층의 계보
근대 초기 관료·귀족의 경제 활동 양상과 경제적 분화|근대 초기 상인층의 기업가로의 전환 양상과 그 특징|근대 초기 수공업자들의 공장 설립
2. 초기 한국 자본주의의 전개 양상과 그 특징

1부 근대 자본가층의 계보와 유형

1장 관료에서 기업가로 전환한 민영휘 일가
1. 민영휘의 수탈적 토지 집적과 자본 형성
2. 민대식ㆍ민규식의 기업 설립과 투자
3. 영보·계성의 자본 축적과 동척 대출
영보합명회사의 자본 축적과 동척 대출|계성주식회사의 자본 축적과 동척 대출
4. 민영휘 일가 자본 축적의 특징

2장 경성직뉴주식회사 사장에서 지주 경영으로 복귀한 윤치소
1. 해평 윤씨 가문과 윤치소
2. 한말~1910년대 기업 투자와 경영
3. 1920~1940년대 농업 경영과 자본 축적
농사 개량과 농업 경영|토지 집적과 자본 축적|자금 조달과 차입 구조
4. 사회 활동과 정치적 행보
5. 자본 축적 방식의 양상과 그 전환

3장 관부물자 조달과 수세 청부로 자본 축적한 백남신ㆍ백인기 부자
1. 백남신의 자본 축적과 정치사회 활동
외획 활동과 토지 집적|농장 설립과 미곡상 경영|권력 추구와 사회 활동
2. 백인기의 자본 운용과 정치사회 활동
기업 활동과 토지 집적|권력 지향과 친일
3. 백남신ㆍ백인기의 자본 축적 경로

4장 호남은행장, 그러나 간척과 증미계획에 몰두한 현준호
1. 현준호의 가계와 현기봉의 경제 활동
2. 학파농장 설립과 간척사업
학파농장 설립과 합명회사로의 개편|간척사업
3. 합명회사학파농장의 자산 구성과 영업 현황
4. 학파농장의 자본 축적 시스템
5. 현준호의 자본 축적 방식

5장 금은세공업자에서 화신백화점 창업주로 성공한 신태화
1. 신태화와 박흥식
2. 소공업체의 자영과 공장으로 확대 성장
직공에서 입신, 소공업체 자영(1895~ )|공장으로 확대, 신행상회 창립(1908~ )|신행상회의 경쟁업체들과 업계 제패|신행상회의 성장 추이와 분립
3. 화신상회 설립과 백화점으로의 전환
종로 진출과 화신상회 창립|화신상회 양도와 태성상회 설립
4. 신태화의 경영관과 경제적 조직 활동
5. 자본 축적의 수준과 그 의미

6장 민족자본가의 전형, 안희제
1. 가계와 수학, 계몽운동
2. 1910년대 중반~1920년대 기업 활동과 백산상회
3. 교육·사회운동과 경제운동
4. 기업 활동 방식과 특징

2부 조선인 공업의 발상지, 평양의 자본가들

7장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와 그 경영진
1. 기업사에서 점하는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의 의미
2. 설립 과정과 주주, 경영진
설립 배경과 과정|주주의 분포와 구성|경영진의 구성과 변화
3. 입지 조건과 생산설비, 기술
입지 조건: 원료·연료의 조달 및 운송|작업장과 생산설비|노동력과 기술
4. 자산 구성과 영업 성적
5. 경영 실패의 요인

8장 공업도시 평양의 발달 배경과 조합 조직
1. 평양, 조선의 북큐슈
2. 시가 형성과 입지 조건
시가 형성과 확대|공업지로서의 입지 조건
3. 공업의 발달과 조선인 공업의 양상
4. 조선인 공업자들의 조합 조직
저금조합 조직과 자본 조달|생산조합 조직 시도와 경쟁력 강화
5. 공업도시를 만든 주체적 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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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판사 책소개 (알라딘 제공)

    근대 한국 자본가의 계보와 유형을 탐색하다

    초기 한국 자본주의를 구명하다

    자본주의는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에 정착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게끔 활발하게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을 벌인 인물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초기 한국 자본주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한국 자본주의 발달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질문들이다. 그러나 초기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을 둘러싼 논란만 부각될 뿐, 정작 탐구해야 할 위의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지는 듯하다.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민영휘에서 안희제까지, 부산에서 평양까지》는 공장과 기업을 설립하고 운영한 근대 자본가들의 경제적 실천과 사회정치적 행동을 분석함으로써 초기 한국 자본주의를 구명하려 한다. 그동안 《한국근대자본가연구》(2002) 등의 저작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 오미일은 근대의 다양한 자본가 군상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배경, 자본 축적 토대와 경로 등 몇 가지 기준에 의해 분류하여 각 유형의 대표적인 자본가들을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근대 자본가들, 어떻게 자본을 축적했고 어떤 자본주의적 사회경제 활동을 했는가
    초기 자본가들의 사회적 배경은 어떠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대개 무반 출신이나 문벌양반가의 후손이 관료로 진출하지 못하고 쇠퇴하면서 호구지책을 위해 변신한 관부조달영업자, 실무 하급관료와 시전상인, 객주 등이 근대적 기업가로 성장하는 사례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지주적 배경을 토대로 한 일부 관료 출신이 상업적 농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여 기업가로 변신하거나, 상인층이 개항과 정변.정쟁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자본 축적의 기회를 포착하여 기업가로 성장하는 경우가 한국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로였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 경로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한 자본가들이 있다. 저자는 그러한 자본가들 가운데 일제 시기 최대 부호로 꼽혔던 민영휘.민대식.민규식 일가,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의 아버지인 윤치소, 전북 지역 최대 지주였던 백남신.백인기 부자, 목포.광주의 대표적인 대지주이자 기업가였던 현기봉.현준호 부자, 화신백화점 창업주 신태화, 부산의 민족자본가 안희제, 그리고 평양의 이승훈.이덕환 등에 주목한다. 이들은 신분과 사회적 배경, 또한 자본가로서의 성장배경이 달랐기 때문에 자본주의 생산방식이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생각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저자는 당시 언론기사나 광고뿐만 아니라, 특히 일본국립공문서관 소장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출자료를 발굴하여 해당 자본가들의 보유 증권 내역이나 자산 현황, 그들이 설립한 기업의 사업계획서, 자산신용조사서, 대출현황, 손익계산서 등을 토대로 그들의 다양한 자본 축적 방식과 궤적을 추적한다. 그들은 어떻게 자본을 축적했으며, 어떠한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을 했을까?

    초기 한국 자본주의 주도세력의 유형

    저자는 신분과 사회적 배경, 자본 축적 경로 등을 기준으로 초기 한국 자본주의 주도세력을 몇 가지 유형으로 세분하여 범주화한다.
    첫째, 관료 출신으로 기업 설립에 참가한 유형이다. 고위관료 출신은 대개 조선 말기 권력을 빙자한 수탈에 의해 자산을 집적하고, 관직 진출이 불가능해지는 1907년 이후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기업 활동에 나서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들은 대지주였으며 따라서 부동산 저당을 통한 자본 조달 또한 비교적 용이했고, 신분이나 직위를 이용하여 탁지부.농상공부.경무청.통감부 등에 청탁하여 각종 인.허가를 쉽게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정부가 추진하는 각종 근대화사업, 즉 금융기관이나 관영기업 설립 등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기도 쉬웠다.
    둘째, 상업 활동과 무역업을 통해 축적한 자본으로 기업에 투자한 상인층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한제국 정부의 관용물품 용달업이나 수세청부업, 관영사업을 통해 성장한 어용상인과 시전상인, 전국 혹은 지역 연안 상업 유통망을 이용한 객주.선상, 그리고 기타 소상인 출신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개별적인 자본 축적 규모에는 상당한 편차가 있었다. 원래 상인 출신은 아니지만 궁방이나 내장원의 차인差人으로서 관부官府의 물자 조달 및 수세 청부 과정에서 외획外劃.무역을 통해 성장한 이들도 상업 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어용상인층 범주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갑오개혁 이후 군부 관제 변화로 인해 하급무관 출신으로 퇴직하여, 정부용달업을 통해 축적한 부를 기초로 근대적 금융기관과 기업 설립에 참여했던 부류도 여기에 속한다.
    셋째, 직포.금은세공.도자기.한지韓紙 제조 등 재래업종에 종사한 수공업자, 혹은 공업전습소 및 공업학교 출신의 기술자로서 소규모 제조업체를 경영하며 근대 기업가로 성장한 유형이다. 이들은 근대 기업가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 요인을 내재하고 있었으나, 원시적 자본 축적에서 뒤떨어져 근대 초기 기업 설립에서 독자적인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했다.

    근대 한국 자본가의 성공과 실패, 연속과 좌절의 이면을 들여다보다

    민영휘 일가, 관료에서 기업가로 변신하다

    저자는 초기 한국의 자본가들을 세 유형으로 나눈 뒤 대표적인 자본가들의 사례를 분석한다. 먼저 민영휘閔泳徽, 민대식閔大植, 민규식閔奎植 등 민영휘 일가. 민영휘 일가는 관료에서 기업가로 변신한 대표적인 예다. 민영휘는 ‘반도 유일의 부호’라 불릴 정도로 일제 초에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재산은 평안도관찰사, 선혜청당상 등 봉건 권력을 기반으로 민인들의 재산을 수탈함으로써 획득된 것이었다.
    민영휘의 자산을 상속받아 운용한 이는 민영휘의 2남 민대식과 3남 민규식이었다. 신문물에 밝았던 민대식은 한말부터 직접 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하거나 여러 기업에 투자했다. 1920년 이후에는 한일은행장으로 활동하면서 재계의 거물로 부상했다. 민규식은 영국과 미국에서 유학한 후 귀국하여 한일은행 상담역, 상무이사를 거치면서 경영 실무를 익혔다. 민대식과 민규식은 제조업에 투자하여 부국직물, 조선견직과 같은 기업체를 경영하기도 했으나, 자본축적의 주요 토대는 토지소유와 농업경영, 건물임대 등 부동산 투자에 있었고, 부수적으로 주식 투자를 겸했다. 체계적인 자산관리를 위해 1933년과 1935년에 각기 설립한 가족회사인 영보합명회사와 계성주식회사는 10년이 못되어 3∼4배 성장하였다. 전시기戰時期에 들어서 영보합명은 거액의 대출자금을 군수산업에 투입했으나, 계성(주)은 일제의 증미운동增米運動에 보조를 맞추어 토지개량과 농업 경영을 고수했다. 특히 민규식은 국민총력조선연맹, 흥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 등 조선총독부가 임전체제 유지와 조선인의 전쟁 동원을 위해 조직한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했다. 일제 지배에 대한 이러한 적극적인 협력은 경제적 특혜의 수혜로 이어졌다.

    윤치소, 경성직뉴주식회사 사장에서 지주 경영으로 복귀하다
    윤치소尹致昭는 한말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여러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 해평 윤씨 도재공파 일가 가운데 가장 이재에 밝아 금융, 기업 투자, 농업 경영 부문에서 활동이 두드러졌던 이다. 윤치소의 자본 축적 과정은 대략 1909~1920년의 기업 투자와 경영, 1920년대 이후의 농업 경영과 토지 집적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아산에서 직접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던 윤치소는 1908년 무렵 서울로 완전히 이전했다. 곧이어 경성혁신점을 설립.경영하는 한편, 해직 군인들이 전당포 영업을 위해 설립한 조합을 자본금 50만 원의 광업주식회사로 재편했다. 또한 직물업자들의 조합을 자본금 10만 원의 경성직뉴주식회사로 재조직하여 사장에 취임했다. 소규모 조합을 당시의 가장 대표적인 기업으로 재조직하여 오랫동안 경영한 것에서 탁월한 사업 수완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조선인 기업이 폐업했던 1919~1920년 공황기에 사업 성과가 부진하자 윤치소도 기업 투자와 경영에서 손을 떼고, 이후 토지 집적과 농업 경영에 주력했다.
    윤치소는 1920년대 이후 자본 축적의 주요 수단을 토지 집적과 농업 경영으로 전환하고, 생산성 증가를 위해 소작인 지도를 통한 농사 개량에 주력했다. 윤치소 역시, 토지 경작에서 나오는 수익과 주식 증권에서 받는 수익을 비교해보면 토지 수익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던 민규식과 동일한 경제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백남신.백인기 부자, 관부물자 조달과 수세 청부로 자본을 축적하다
    백남신白南信은 1911년경 《시사신보》가 조사 발표한 50만 원 이상 조선인 자산가 32명 가운데 한 사람일 정도로 재력가였다. 지방 아전 출신임에도 자신의 힘으로 대부호가 된 까닭에 당시 언론에서 ‘대위인’이라 칭할 정도였다. 그가 당대의 세도가들과 어깨를 겨룰 정도의 부를 축적한 것은 전주진위대 향관, 궁내부 주사, 내장원 검세관의 직책으로 외획을 이용한 상업 활동을 전개한 결과였다. 백남신은 1897년 이후 관부물자 조달과 내장원의 외획을 담당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는데, 이를 주로 토지 매입과 사채업에 투자했다. 1904년 11월 외획이 폐지되고 1905년 12월 독쇄관에서 해임되자, 이후 백남신은 농장 형태의 농업 경영에 주력했다.
    백인기白寅基는 부친 백남신이 서울-전주를 오가며 외획 활동을 하던 때에 서울로 올라와, 17·18세 되던 무렵 객주 영업을 시작하면서 서울 상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백인기는 한일은행뿐만 아니라 여러 기업의 대주주, 중역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1905〜1909년과 1920년대에 기업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는데, 기업 설립을 주도하여 경영자로서 분투하기보다 대표적인 일본인 기업 또는 조선인 대자본가 및 귀족들의 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점에서 백인기는 지주적 기반에 기초하면서도 점차 자본 전환을 시도하여 기업을 설립하고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한 자본가라기보다 토지 매수와 농장 확장에 골몰한 지주에 가까웠다.
    백씨 부자의 자본 축적의 근간은 일반적으로 기업 이윤보다 미간지 불하에 의한 초과 이윤과 지대 수익에 있었던 것이 특징이다. 이는 산미증식을 목표로 미간지 개척, 토지 및 농사 개량에 중점을 두었던 일제 산업정책에 적극 부응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준호, 호남은행장이었음에도 간척과 증미계획에 몰두하다
    호남 지방의 대표적 자본가인 현준호玄俊鎬는 호남은행장, 그리고 전남도시제사.동아고무공업.영암운수창고.경성방직.조선생명보험의 중역으로 활동한 기업가로만 알려져왔다. 그러나 그의 물적 토대의 근간을 이룬, 그의 자본 축적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1920년에 설립되어 1942년 해산되기까지 은행장으로 있었던 호남은행과 함께 그의 기업 활동의 원천이었던 학파농장이었다.
    학파농장은 현준호의 아버지인 현기봉이 사망한 1924년 설립되어 1934년 합명회사로 법인화되었다. 학파농장은 현준호의 주요 자산인 토지와 유가증권의 관리, 그리고 토지간척과 개량을 주요 영업 내용으로 했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은 1920년대 중반부터 대단위 농지를 조성하기 위해 매도와 매입을 통해 경지 정리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대단위 농지 조성이 요원하자 1932년부터 간척사업을 전개했다.
    현준호는 여러 지방 중소기업의 주식을 보유하고 이사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여기에 자신의 많은 자본을 투자하여 직접 경영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가 토지에서 동원된 자본을 기업에 투자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직접 경영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지방 중소기업 경영을 통한 이윤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준호가 ‘조선공업화’가 한창이던 시기에 산미증식사업의 부활을 계속 당국에 건의하고 간척사업을 통한 농지 확대와 농업 경영을 자본 축적의 길로 삼았던 것은 식민지 말기 지역 자본가의 존재 양상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

    신태화, 금은세공업자에서 화신백화점 창업주로 성공하다
    신태화申泰和는 한말~1920년대 격변의 경제상황 속에서 금은세공업계의 ‘패왕’이라 불린 신행상회를 남대문통에 설립.경영하고, 이후 백화점의 대명사로 불린 화신상회를 창립한 인물이다. 직공으로 출발하여 자본을 모아 소공 업체를 경영하다가 마침내 공장을 설립.경영한 신태화는 자본 축적의 새로운 양상과 경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신태화는 1908년 11월 자신의 자본금과 투자주의 자금을 합하여 신행상회를 설립했다. 신태화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쟁 호황 경기를 타고 1915년 중반 이후 신행상회 지점을 설치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과 사업 확장에 나섰다. 신행상회의 공격적 경영을 주도한 이는 신태화와 투자주 김연학의 아들 김석규였다. 그러나 김석규의 경영 개입은 종래 경영권을 전적으로 주도해왔던 신태화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신태화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창립하고 일구어온 사업체에 투자주 김연학도 아닌 그의 아들 김석규가 개입하는 것이 탐탁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신태화는 1918년 3월경 10년간의 동업을 해제하고 김석규와 결별했다.
    신태화는 1918년 3월 김석규에게 신행상회 남대문통 본점을 넘기고 종로지점으로 분립했다. 4월 중순에는 화신상회 등록 상표와 광고 포맷을 정하고 《매일신보》와 잡지에 연속광고를 게재했다. 1919년 1월경에는 2개의 쇼윈도를 갖춘 서양식 2층 건물도 신축했다. 그러나 신태화는 1934년 2월 상호를 ‘주식회사화신’으로 변경하면서 허울뿐인 회장 자리에서 퇴진하고 화신상회를 박흥식에게 양도했다. 사업 확장 자금을 은행이 아닌 사채로 조달한 점, 공황으로 인한 매출 부진 시기에 종업원들이 급료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한 점, 신태화 자신이 경제 주기 및 동향에 대해 잘못 판단한 점 등이 겹쳐 결국 화신상회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안희제, 민족자본가의 전형
    안희제安熙濟는 무역상점 백산상회를 설립.경영하여 임시정부에 운동자금을 조달한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1910년대 중후반부터 1920년대 초까지 주일상회주식회사의 주주이자 경남인쇄주식회사의 창립을 주도하고 조선주조주식회사의 설립과 경영에 앞장섰던 부산 지역의 대표적 자본가였다. 또한 1929년 중외일보를 인수하여 언론계에 8면지 발간의 새로운 장을 연 경영인이기도 했다.
    경남 의령의 중소지주 출신인 안희제는 양정의숙 경제과를 졸업하여 경제 동향에 밝았다. 그는 1차 세계대전 호황기 무렵 고향의 전답을 처분하여 부산에 개인상점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1917년에는 경남 지역 지주 11명을 규합하여 자본금 14만 원의 합자회사로 전환했다가 일본 무역상에 대항하기 위해 1919년 5월 경남 지역 지주자본을 동원하여 자본금 1백만 원의 주식회사로 재편했다.
    이후에도 안희제는 민족경제권 건설을 위해 여러 기업들을 설립·경영했다. 그러나 해당 기업들은 영업 부진으로 인해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에 이르러 대부분 해산되었다. 기업 활동의 실패는 안희제가 경제운동의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20년대 중후반 협동조합운동사에 참가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고 만주사변의 발발로 국내 민족주의운동의 입지가 위축되자 1933년 만주로의 이주를 단행했다. 그러면서 그의 민족경제권 건설을 위한 부단한 열정은 사그라지고 말았다.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 전래의 수공업적 요업에서 벗어난 민족기업
    저자는 인물을 통한 한국 자본주의 발달사 고찰에서 더 나아가 평양이라는 지역과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라는 기업에도 눈을 돌린다. 일제 시기 평양은 ‘조선의 오사카’ 혹은 ‘조선의 북큐슈’라고 불릴 정도로 공업이 발달했다. 특히 조선인 공업이 가장 발달했던 대표적 지역이 평양이었다. 비교적 소규모의 자본과 생산 시설로 가능하며 고도의 기술을 요하지 않는 고무 공업, 양말 공업(메리야스 공업), 정미 공업이 대표적인 조선인 공업 분야였다.
    저자는 이 같은 평양에 대한 고찰과 함께 평양 지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업으로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를 꼽고 분석을 시도한다. 서북 지방 소액주주 200여 명의 모금에 의해 1908년 설립된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는 190여 명의 주주에 의해 1919년 설립된 경성방직주식회사보다 10년 앞서 설립된 기업이다. 특히 식산흥업운동 차원에서 일용식기의 대량생산체제를 시도한 설립 목적이나 운영 방식, 공장 시설 규모 면에서 주목할 만한 ‘민족기업’이다. 이 회사의 설립과 경영을 주도한 이승훈李昇薰(사장)과 이덕환李德煥.윤성운尹聖運 등은 원래 객주업과 잡화 무역상을 통해 성장한, 평양 지역 상업계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105인 사건으로 회사 경영진이 체포되면서 경영 공백 상태가 되었고, 이는 영업 부진으로 이어져 회사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여기에 생산설비, 운송과 입지 조건 등에서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결국 폐업되고 말았다.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는 비록 일제의 정치적 탄압과 경영 미숙으로 인해 결국 폐업되고 말았으나 사회.경제사적인 면에서, 좁게는 기업사적인 면에서 결코 적지 않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는 전래의 수공업적 요업을 벗어나, 최초로 “대규모의 개량 요업”을 시도한 회사였다. 한말∼1910년대 기간에 일본인.조선인 소유를 불문하고 도자기공장 가운데 6만 원 자본금 규모로 대량 생산을 시도하여 10년 동안 존속했던 공장은 없었는데, 그 예외가 바로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였다.

    근대 한국 자본가 계보를 통해 초기 한국 자본주의의 특징을 살피다

    개항 후 초기 한국 자본주의는 관료 출신 혹은 어용상인층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권력을 배경으로 한 수탈이나 구문 수취 등에 의해 자본을 축적하거나 혹은 정부 관아를 상대로 한 조달업과 수세청부, 정부의 각종 근대화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자본 축적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권력과의 결탁에 의한 자본 축적은 이후 일제의 산업.금융 정책에 동승하는 방식으로 연장됨으로써 강한 예속성을 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민족경제권 건설을 위해 노력한 안희제와 민족기업을 설립.운영했던 이승훈의 경제 활동은 한국 자본주의의 또 다른 경로를 보여준다. 그들이 국내 수요를 감안하여 대량생산체제를 지향했고, 또한 일본인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소자본의 열세를 소액 주주 모집과 주식회사 형태를 통해 극복하려 했다. 비록 기술과 자본 부족 등으로 사업체를 오래 경영하지는 못했지만 이 같은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때문에 그들의 경제 활동은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연원을 묻는 지점에서 협동조합운동이나 독립운동과 같은 그 사회정치적 활동과 함께 무거운 의미로 기억해야 할 유산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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