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의 시 100여 편과 함께 물 흐르듯이 펼쳐지는 결코 묻힐 수 없고 묻혀서는 안 될 김남주의 마음 아린 생애
김남주 시인은 감옥에 있을 때는 주로 저항시를 쓰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서정시를 많이 쓴 보기 드문 시인이고 투사였다. ‘투사시인’이었다. 전봉준의 혼(魂)을 닮고, 브레히트의 백(魄)을 닮고자 한 시인이었다. 그가 닮고자 했던 그들의 운명이 어찌되었는지 따위는 계산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쓴 시는 밖으로 흘러나와 봄이 와도 움츠리고 있는 자들의 채찍이 되었고, 겁 많은 자들에게는 용기를 주었다. 시위대의 노랫말이 되기도 하고, 대학가의 ‘불온유인물’이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가 없었으면 우리 민족은 혼백이 없는 백성이 되었을 것이고, 군사독재 시대에 김남주 선생 등의 저항자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의기가 없는 국민으로 낙인되었을 것이다.
시인 김남주는 왜 그리도 빨리 갔을까. 윤동주 시인, 조영래 변호사, 노무현 대통령, 김근태 의장은 왜? 독재자와 그 아류들, 빛바래지는 시인이나 작가들도 그리 장수하는데, 당신들은 다시 오지 못하는 길을 왜 그리도 빨리 가버렸는가. 시인 김남주는 신화와도 같고 전설과도 닮은 사연을 남기고 떠났다. 부인 박광숙 여사와 아들 토일 군 얘기다. 시인의 표현대로 손목 한 번 잡아보지 않았던 조직의 동지가 15년 장기수로 선고받은 남자의 연인이 되어 옥바라지를 자원하고, 출 옥한 후에는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이 땅의 노동자들 도 금, 토, 일요일에도 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이름을 토일(土日)이라 지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한 점 혈육을 아내에게 맡긴 채 감옥에서 나온 지 5년 만에 저 승으로 가버린 가슴 아픈 이야기. 김남주 선생과 박광숙 여사가 남긴 이야기는 21세기로 이어진 20세기 한국판 순애보라 하겠다.
지금 한국사회는 대명천지에 수십 년 전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악령들이 돌아와 활개를 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가 염원하던 평화롭고 아름다운 날들은 아득한 과거가 되었다. 목숨 걸고 싸우며 일궈놓았던 것들이 하나하나 망가지고 허물어지는 것을 보며 시인이 살았던 70-80 년대가 차라리 낭만적이었다는 생각조차 들 정도다.
젊은이들은 일자리가 없어 거리를 헤맨다. 직장인은 언제 쫓겨날지 몰 라 최소한의 권리조차 주장하지 못하는 파리 목숨이다. 단 몇 퍼센트의 부자들이 부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세상이 되었다. 배가 가라앉아도,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몰살을 당해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나라다. 불안을 마케팅하며 정권을 독점하고, 부와 명예, 모든 기득권을 싹 쓸어 가려는 자들이 벌이는 음모로 세상은 아수라장이다.
이제 다시,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죽기 살기로 버둥거려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할 기력도 없이 망연자실 넋을 놓을 뿐이다.
몽둥이로 다스려지는 세상이 다시 돌아온 탓인가 보다. 서북청년단이 재건되었다고 하면서, 게거품을 물며 사람들에게 색깔을 입히느라 정신없는 종편 방송을 들으며 시들을 읽노라니 80년대의 으스스한 공포가 실감나게 다가온다.
80년대에 쓰인 시들을 다시 찬찬히 돌아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시인’으로서 가장 행복했던 때도 ‘그때’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꼬박 9년을 감옥에서 보낸 80년대였지만 말이다. 비록 육신은 갇혀있었지만 시 정신을 한껏 태울 수 있었던 시기가 그때였다. 어떻게, 무엇을 쓸까, 하는 것을 고민할 겨를 없이 시는 꾸역꾸역 겨워져 나왔다. 술술 토해진 핏덩이 같은 낱말들은 그대로 시가 되었다. 몸통을 가득 채웠던 것들이 모두 토해져 나왔을 때, 그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의 머리엔 재 같은 하얀 백발이 얹혀 있었다.
세상이 몽둥이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행복하다
세상이 법으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그래도 행복하다
세상이 법 없이도 다스려질 때 시인은 필요 없다
법이 없으면 시도 없다
이 역설, <시인>이라는 시에서 그는 육신이 결박된 순간에 시를 쓸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잿더미에서 피는 꽃
9연에 달하는 <잿더미>라는 시는 한국저항문학사에 꼿꼿한 고딕체로 남을 시다. 시인 김남주 문학의 신호탄과 같은 작품이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폐허가 된 뒤에도 여전히 살아남는 희망과 의지를 노래한, 그래서 마침내 꽃을 피우는 뜨거운 사랑의 온도가 담겨 있다. ‘김남주’라는 이름 석 자가 깊게 새긴 역사에 대한 정직한 갈망을 우리는 어느새 잊어가고 있고 이루어지는 것은 별로 인데 마치 대단한 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시 <잿더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꽃은 어디에 있는가 피는 어디에 있는가 꽃 속에 피가 잠자는가 핏 속에 꽃이 잠자는가
이 말은 무슨 말일까? 우리가 피워내야 하는 꽃은 그냥 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피가 우리의 영혼과 이 역사에 흐를 때 이루어지는 거대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잠들지 말라는 것이다.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아니면 우리가 열망하는 꽃은 피워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시의 다른 대목은 또 이렇게 되어 있다.
그대는 황혼의 언덕을 내려오다 폐허를 가로질러 또 하나의 새벽을 기다려보았는가 그때 동천에서 태양이 타오르자 서천으로 사라지는 달을 보았는가
모든 희망이 황혼처럼 물러가고 지나는 길목은 폐허인데, 그곳에 과연 새로운 새벽이 오기나 하겠는가 하고 문득 방황할 때 비로소 목격하게 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고 시인은 장엄하게 묻고 있다.
스쳐 지나가는 듯한 세월 속에서 아무도 깊이 눈여겨보지 못하는 때에도 일어나는 변화를 시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일깨우고 있다.
그대는 겨울을 겨울답게 살아보았는가 그대는 봄다운 봄을 맞이하여보았는가 겨울은 어떻게 피를 흘리고 동토(凍土)를 녹이던가 봄은 어떻게 폐허에서 꽃을 피우던가 겨울과 봄의 중턱에서 봄은 무엇을 위해 이마를 맞대고 눈 속에서 속삭이던가 보리는 밟아줘야 더 팔팔하게 솟아나던가
그는 고된 역사 속에서도 봄을 준비하는 뜨겁고도 질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는가 그대는 봄을 잉태한 겨울 밤의 진통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그래서 결국 꽃은 피고 그 꽃 속에는 생명의 피가 흐르는 그런 세월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세월의 얼굴을 이렇게 그린다.
꽃 속에 피가 흐른다
잿더미 속에서도 봄은 그리 온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꽃이 피다”라고 말한다. 하늘에서 땅에서 떨어지는 것은 비, 땅에 흐르는 것은 물, 이 말의 본래 고어는 미, 그리고 우리 몸속에 흐르는 것은 피. 그런데 이 피는 사람이 아닌 경우 유일하게 꽃에 쓰인다. 꽃 속에 피가 흐른다는 것이다. 그건 누군가의 아픔이, 목숨이 땅에 떨어져 피가 되어 스미자 꽃이 되었다는 전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고, 붉은 꽃의 진한 색깔이 마치 사람의 몸속에 흐르는 피처럼 여겨져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것에는 생명의 피가 흐르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우리 조상님들에게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건 고된 세월과 혹독한 겨울을 살아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깨우침이다. 겨울의 그 끈질긴 진통 속에서 봄은 태어난다. 역사는 냉혹한 추위를 견디면서 새로운 새벽의 불쏘시개를 준비한다. 개인의 인생도 다르지 않다. 잿더미의 폐허를 가로질러 새벽을 맞이하기 위해 달려가는 자는 그렇게 해서 출현하게 되어 있다.
아름다운 것을 빼앗기면 그것을 찾아 올 줄 알아야 한다. 꽃은 우리의 피이기 때문이다. 잠자는 자기의 꽃이 빼앗긴 줄도 모르고 틈이 사라진 들판에서 봄 타령도 잊고 만다. 《김남주 평전》은 우리에게 피워야 할 꽃이 무엇이며 넘어진 곳을 딛고 일어서야 할 자리가 과연 어디인지 되묻고 있다.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 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뎅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김남주 시인이 마지막으로 쓴 <추석 무렵>이라는 시이다. 그는 이렇게 살고 싶어 했다. 아들의 손목을 잡고 들판을 걷고 싶은 꿈... 그는 꿈결인 듯 고향 길을 걸었다. 그 길이 아들 손목을 잡고 걸어본 처음이자 마지막 길이었다. 이 그림은 아들의 가슴에 새겨진 처음이자 마지막 풍경화다. 네 살짜리 아들과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는 입이 째지도록 웃고 있는 초승달이 있는 풍경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은 꿈같은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