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을 읽다, 쓰다 : 한 사내의 절절한 반성의 기록 『징비록』 필사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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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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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136932
951.5211 -16-5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0002136933
951.5211 -16-5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출판사 책소개
고전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손으로 느끼는 전혀 새로운 고전 읽기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과정, 결과를 세심히 다루면서, 전쟁의 비극에 휘말린 조선의 상황과 일본의 조선 침략 실패의 원인을 냉철히 분석한 책이다. “『시경』에 ‘지나간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이 없도록 경계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 구절은 내가 『징비록』을 쓴 이유를 알려준다.” 이 두 문장에 지난 잘못을 반성하며 널리 읽히기를 바랐던 유성룡의 뜻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 책은 『징비록』의 내용 가운데 임진왜란의 중심 줄기를 따라가며, 그 속에서 벌어진 의미 있는 여러 싸움과 그 싸움 속의 장수와 백성, 선조의 움직임, 그리고 유성룡의 복잡한 마음과 냉정한 평가가 잘 드러나는 부분을 뽑아 실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눈물로 써내려간 한 사내의 절절한 반성의 기록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유성룡의 마음을 읽고, 쓰고, 느끼다! 전쟁의 참상을 되짚어보며 눈물로 써내려간 한 사내의 진솔한 반성의 기록. 부끄러운 치욕까지 들춰내며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쓰는 것은 ‘마음’과 관련이 있다. 읽고 쓰면 마음이 움직이고 생각이 피어난다. 이 책은 『징비록』 원문과 해설과 필사의 기능을 합친 최초의 책이다. 직접 읽고 써보면서 당시 유성룡의 절절한 심정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했다. 단지 머리와 가슴으로만 느끼는 고전 읽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손이 느끼는 새로운 고전 읽기가 될 것이다.
『징비록』을 읽으며 지난날을 반성하여 미래를 대비하고자 했던 유성룡의 마음을 헤아리고, 『징비록』을 따라 쓰며 지난날의 내 삶을 반성하고 후회 없는 내일을 준비한다. 오늘의 치열한 반성이 내일의 성공을 불러온다. 내게 닥친 고뇌와 슬픔을 떨치고 일어나 현실을 분명히 점검하는 용기가 필요한 이때, 지난 잘못을 분석하고 반성한 『징비록』을 원문과 함께 직접 읽고 쓰는 일은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자 한 철저한 자기반성의 결과물인 이 책은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 지금 우리들에게 살아 숨 쉬는 멘토가 되어줄 것이다.
책속에서
[P.14~15] 야스히로가 술을 마시다 후추 열매를 술상 위에 뿌렸다. 기생과 악사들이 후추를 주우려고 서로 엉켜서 술자리가 난장판이 되었다. 숙소로 돌아온 야스히로가 한숨을 쉬며 통역관에게 말했다. “당신 나라는 망할 거요. 이미 위아래 기강이 흐트러졌는데 어떻게 망하지 않기를 기대하겠소?”
▶ 일본 사신의 망언 창의 자루가 참으로 짧다는 둥, 편안하게 세월을 보내면서 왜 머리가 희냐는 둥 일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의 무례함은 끝이 없었다. 야스히로는 쉰 살이 넘은 나이에 흰 머리털과 긴 수염을 늘어뜨린 데다 몸집이 매우 거대했다. 그는 서울에 도착해 참석한 예조판서의 잔치에서도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후추를 뿌려 잔칫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고는 아예 대놓고 나라의 망함을 운운하였다. 이런 망언의 결과는 아니겠지만, 야스히로는 제명을 다하지 못한다. 조정의 답장을 가지고 돌아간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사신의 임무 수행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수로가 험해서 사신을 보내지 못한다는 답장에 도요토미가 크게 분노했기 때문이다.
[P. 104~105] 하루는 명나라 장군들이 군량미가 떨어졌다는 구실로 제독에게 철군을 주장하였다. 제독이 화를 내며 나와 호조판서 이성중, 경기좌감사 이정형을 불러 뜰아래에 꿇어앉혔다. 그리고 큰소리를 내며 우리를 군법으로 다스리고자 했다. 나는 끊임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나라꼴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리는 것도 알지 못했다.
▶ 한 나라 최고 재상의 눈물 이여송은 열심히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든 뒤로 물러날 궁리만 했다. 심지어 날씨 탓을 하기도 했다. 비가 많이 와서 땅이 질어 대군이 머무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이여송 휘하 장수들이 군량이 바닥났다는 이유를 대며 퇴군을 주장하자, 이여송이 조선의 재상들을 불러들여 꿇어앉히고 문책하기 시작했다. 유성룡은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도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한 나라의 최고 재상이라는 지위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유성룡의 눈물을 본 이여송은 조금은 미안했는지, “고작 하루 이틀 양식이 떨어졌다고 퇴군을 주장하느냐?”며 소리를 질렀다. “적을 모두 무찌르기 전에는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까지 덧붙여가며 말이다.
[P. 122~123] 적이 우리 국경을 침범한 이래 오직 수군에게만 패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를 분하게 여겨 무슨 수를 써서든 조선 수군을 잡으라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다그쳤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김응서에게 접근해 이순신이 모함에 빠지도록 술수를 부리고, 원균을 바다로 유인한 뒤 우리 수군의 약점을 알아내 습격했다. 우리 군대가 모두 그의 교묘한 계략에 놀아났으니 너무나 슬프지 않은가.
▶ 조선의 수군을 무찔러라 날이 저물기 시작할 무렵, 원균의 함대는 절영도에 이르렀다. 한산도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하루 종일 배를 저어온 군사들은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 나타나자 원균은 지체 없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이리저리 피하기만 할 뿐 맞서 싸우지 않았다. 이렇게 바다 위를 표류하던 조선 수군은 일본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만다. 1597년 7월 15일, 칠천량해전이었다. 섬나라 일본이 한낱 조선의 수군에게 밀린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는 도요토미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정면 승부로는 승산이 없자 일본은 간교한 계략으로 이순신을 모함에 빠뜨리고, 원균의 함대마저 무너뜨린다. 이것은 원균만의 패배가 아니었다. 유성룡은 조정 전체의 패배였음을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