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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강학 시대

향리와 승가
1. 세속의 삶
2. 출가와 구도
3. 내전의 스승
승려 본기
1. 금강산의 절차탁마
2. 설유 처명의 법을 잇다
3. 개강과 삼장강설
불교 유신운동
1. 일본불교의 침투와 신 사조
2. 임제종 운동
3. 불교계의 각성과 개혁을 위한 언론활동
4. 『해동불보』 발행

제2편 교학 시대

불학佛學 강사講師
1. 46세-월명암과 도솔암 여행
2. 조선 제일의 불학강사佛學講師
3. 금봉을 애도하다
석전의 항일운동
1. 3·1운동·한성임시정부·대동단 활동
2. 일본 임제종과의 부속운동 저지
3.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書에 불교계 대표로 서명

제3편 기행 시대Ⅰ- 한라에서 백두까지

금강산·영주산瀛洲山· 풍악산
1. 춘원·가람을 데리고 금강산 여행
2. 제주도瀛洲 기행 283
3. 풍악기행楓嶽紀行과 시초詩抄

제4편 기행 시대Ⅱ- 한라에서 백두까지

남유南遊와 시사詩社 활동
1. 한겨울의 남쪽 여행[雪際南遊]
2. 심춘순례尋春巡禮
3. 석전 박한영의 시회詩會활동

제5편 기행 시대Ⅲ-한라에서 백두까지

묘향산·경주·백두산 국토순례
1. 56세에 묘향산, 경주 여행
2. 백두산 탐사

제6편 교정 시대

강백과 교정
1. 개운사 불교전문강원 강주
2. 조선불교선교양종 교정
3. 중국 강남지역 답사
4. 우리 스님, 석전 박한영 스님
5. 불교계 항일 비밀결사 조직, 만당卍黨과 박한영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시절
1. 『정주사산비명』 완성
2. 두 번째 제주도 여행
3.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원지방품행圓智方品行
1. 지智에 둥글고 행行에 모나자
2. 화양동·속리산·내장산 답사
3. 조선불교계의 제1인자

제7편 만년의 삶
승지강산勝地江山 총평
1. 석전의 금강관金剛觀
2. 승지강산勝地江山에 대한 석전의 논평
3. 산강 변영만과 단재 신채호
시대의 거울
1. 연년세세 사람은 늙어가고
2. 시대의 거울
3. 최남선의 『석전시초』 간행
노년의 물외도인
1. 석전의 시문학과 시론
2. 대원암강원 폐쇄, 그리고 전강
3. 물외도인物外道人의 일화
큰 빛은 홀연히 지고
1. 광복 직후 초대 교정에 추대
2. 큰 빛은 홀연히 지고
3. 박한영 중심의 구암사 강맥 계보
4. 석전 박한영 스님과 동국대학교

후기 우곡 혜봉
부록 1 석전 박한영 대종사 연보
부록 2 입적 후의 선양사업
부록 3 화엄종주 영호당 대종사 부도비명 병서
부록 4 영호당 정호 대종사의 법맥과 전등
부록 5 간찰 목록
부록 6 전법게 목록
부록 7 비문, 상량문, 진영찬, 사적기, 서문, 금석문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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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 박한영 : 영호 정호대종사 일생록 1870-1948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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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알라딘제공
유불선을 넘나드는 화엄종주로, 근대교육의 선구자로, 독립운동가로 후대에 사표가 되어 주신 영호당(映湖堂) 정호대종사(鼎鎬大宗師) 행장을 정리한 최초의 일생록이다.
석전의 학문은 불교의 교와 선에 정통하고 유서 등 내·외서를 두루 통달했으며, 심지어 고사·비설·벽서·이문에 이르기까지 세속 선비가 따르지 못할 만큼 뛰어났고, 한문장(漢文章)과 한시에도 출중하였다.
또한 계행이 엄정하고 재물에 청렴하여 성색이 초월함이 옛날 청량국사와 같았으므로 그의 인격을 말하면 계정혜 삼학을 통달하여 모든 민중을 구원한 불속에 핀 연꽃이다 할 정도로 사상과 학문에서 뛰어난 경지를 이룬 석전 박한영 스님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한 책이다.

출판사 서평

석전 박한영 스님은 전북 출생으로 조계종 초대 교정이며, 청담.청우.운허.운기 스님의 스승으로, 한국 근현대문학의 주역인 한용운.최남선.정인보.이병기.신석정.서정주.조지훈.김달진을 길러낸 시대의 선각자이며 문학가이다.
석전 박한영 스님은 한성임시정부 전북 대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書) 불교 대표로 서명한 독립운동가, 백양사 광성의숙부터, 명진학교와 동국대 전신 혜화전문까지 반평생을 후학 양성에 힘쓴 교육자이기도하다.
속명인 박한영(朴漢永)으로 더 잘 알려지고 추사 김정희가 지은 석전(石顚)이라는 별호로 활동하신 스님은, 설파, 백파, 설유스님의 법을 계승하여 구암사, 해인사, 법주사, 백양사, 화엄사, 범어사 등에서 경전을 설파하였다.
금봉, 성월, 진응, 한용운 스님 등과 함께 한국불교의 전통을 이은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하여 친일파 불교인 원종(圓宗)을 무력화 시키셨으며, 불교 잡지 《해동불보》를 창간하여 불교유신을 선포한 큰스님이다.
또한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후학을 기르시며, 불교 교정으로도 취임하시어 조선 불교의 정통성을 지켜 냈으며 『석전시초』, 『정주사산비명』 등 10여 권의 책과 많은 논문을 남겼다.
운기성원, 청담순호, 청우경운, 석문남곡, 운허용하 등 뛰어난 불제자를 기르셨다.
또한 스님은 『석림초』 자서에서 밝히신 대로 성품이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여 석장을 끌고 명소를 여행하며 수많은 자료를 남겼으며 문사들과 교유한 우리 시대의 등불이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는 석전스님의 탄생지부터 출발하여 입적에 이르기까지 스님의 행장을 찾아내고, 일제강점기시대 문서를 찾기 위해 박물관으로, 연구소로 고서점으로 뛰어다니며 관련 자료를 찾아 일본에까지 건너가 당대의 불교 자료를 발굴한 동국사 종걸스님의 10년 간의 노력과 열정의 산물이다.
『영호 정호대종사 일생록』에서는 근대불교의 토대를 이루고, 조선불교의 정통성을 지킨 불교적 관점뿐만 아니라, 문학을 통한 근대 교육과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스님의 활동을 새롭게 조명하였다.
이 책에는 관련사진 500컷과 스님의 연보와 입적 후의 선양사업 등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또한 부도비명 병서를 번역하였고 영호당 대종사의 법맥과 전등을 게재하였다.
이 책이 바른 수행과 올곧은 정신으로 급변하는 물질문명 속에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하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한 이정표를 제시하리라 믿는다.

주요 내용
1. 석전대종사(완주군 삼례읍 하리 출생, 1870~1948)의 출생에서 입적까지 80년 생애를 7장으로 구분 시기별로 다룬 최초 행장집
2. 자료 수집 10년 집필 기간 3년의 결실
3. 생가터와 호적자료, 체포 기사를 포함한 독립운동 자료 등 발굴
4. 석전시초와 석전문초 미수록 작품 소개
5. 미발표 간찰, 여행기, 서화류, 금석문 등 발굴
6. 최초의 인보(印譜) 및 석전 연표 정리
7. 미발표 전법게 및 스님의 소장인이 찍힌 도서 소개
8. 은사 스님이신 금산대영(錦山大營)스님의 법명이 적힌 은종파첩(恩宗派) 및 대원암 강원 강주 시절 사진 등 새로운 자료 발굴
9. 유품 소개
10. 관련 흑백 사진 500여 컷 수록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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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의 항일운동
1. 3·1운동·한성임시정부·대동단 활동
석전은 불교계의 개혁과 유신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그는 민족대표 33인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였다. 그가 중앙학림의 불학강사로 서울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한용운이 시간적으로 긴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석전을 민족대표로 영입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납득되지 않으며, 이에 대해서는 또 다른 해명이 필요하다.

50세, 지천명知天命-최초의 임시정부, ‘한성임시정부’ 전라북도 대표로 서명
석전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로 합류하지 않았으나 곧이어 결성된 한성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했다. 그리고 석전에게 가르침을 받은 중앙학림의 학생들이 대거 3·1운동의 전위대로 활동했다. 만해는 「독립선언서」의 불교 측 배포를 담당하여 3·1운동 바로 전날인 2월 28일 보성사普成社(현재 조계사 자리) 사장 이종일李鍾一로부터 10,000매(일설에는 3,000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수하였다. 이날 밤 10시경 만해는 서울 계동桂洞(현 서울 종로구) 유심사惟心社에 대기하고 있던 중앙학림 학생 김법린金法麟(범어사)·김상헌金祥憲(범어사)·백성욱白性郁(봉국사)·정병헌鄭秉憲(화엄사)·오택언吳澤彦(통도사)·신상완申尙玩(범어사)·김규현金奎鉉·김봉신金奉信·김대용金大鎔(동화사)·박학규朴鶴珪(應松 朴英熙, 대흥사) 등과 중앙학교(중앙고등학교의 전신)의 학생 박민오朴玟悟 등 11명에게 독립선언서를 건네주며 3월 1일 서울 시내 일원과 각 지방에 배포하라고 지시하였다.
김법린 등은 만해의 간곡한 당부를 듣고 유심사를 나오면서 조국독립운동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들은 인사동 조선선종 중앙포교당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독립선언서의 서울 시내 배포와 불교계 승려와 신도들의 동원, 그리고 각기 지방의 독립만세운동을 분담하여 추진하기로 하였다.
김법린과 김상헌은 동래 범어사, 오택헌은 양산 통도사, 김봉신은 합천 해인사, 김대용은 대구 동화사, 정병헌은 화엄사, 박학규(박영희)는 대흥사를 각자 책임지고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분담하였다. 이들은 기미년 3월 1일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하여 만세 시위를 하고 독립선언서를 시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이들은 다른 루트를 통해 전국의 주요 사찰과 지방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통도사에서는 3월 13일, 범어사에서는 3월 18~19일, 동화사에서는 3월 30일, 해인사에서는 3월 31일, 봉선사에서는 3월 29일, 신륵사에서는 4월 3일, 밀양 표충사에서는 4월 4일, 안변 석왕사에서는 3월 9일에서 11일까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75
앞에서 보았던 「동국인명록」에는 1919년도 중앙학림의 졸업생 27명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76 이 가운데 3·1운동에 참여한 학생은 김대용·김법린·김봉신·박학규·백성욱·오택언·정병헌 등 7명인데 신상완·김상헌·김규헌은 3·1운동 참여로 중앙학림을 졸업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거국적으로 3·1운동이 진행되는 와중에 30본산 주지들은 3월 3일, 고종의 국장식國葬式:因山에 참여하였고, 3월 11일에는 각황사에서 고종의 49재를 봉행하였다.

50세에 중앙학림 전임학장으로 임명
3·1운동으로 조선 천지가 가마솥처럼 끓어오르고 중앙학림의 학생 승려들이 다수 3·1운동에 참여하자 30본산 주지연합회에서는 3월 7일 상치원常置員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석전 박한영을 중앙학림의 전임 학장으로 선출하고 일체의 사무를 석전이 모두 담당케 하였다.
석전은 비록 3·1운동에 민족대표로 합류하지 못하였지만 곧이어 구성된 한성임시정부와 대동단大同團(조선민족대동단)에 참여해 항일운동 대열에 참가한다.
3·1운동 후 많은 애국지사 중 일부 인사들은 독립운동의 장기화·체계화를 위해 임시정부의 수립을 계획하였다. 당시에는 국내외에 8개 정도의 임시정부조직이 공포되거나 구상되고 있었다. 노령(소련령 블라디보스톡) 대한국민의회(1919.3.), 한성임시정부(1919.4.), 상해임시정부(1919.4.)가 수립되었다.
박한영이 참여한 한성임시정부에 대해 살펴보자.
한성임시정부는 1919년 3월 중순경부터 몇몇 지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되다가 그해 4월 2일 오후 4시 인천 만국공원萬國公園에서 13도대표자회의를 비밀리에 열고 정부수립 문제 등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때 이규갑(감리교), 장붕(장로교), 박용희(장로교), 김규儒林, 홍면희(변호사) 등 각 종교계를 대표하는 인사들도 참석했는데, 박한영이 전라북도를 대표해 참여했다.
4월 16일에는 13도 대표자들이 서울에서 비밀회의를 갖고 국민대표 25명과 임시정부 각원을 확정지었고, 4월 23일에는 ‘국민대회’ 이름으로 임시정부 기구와 명단이 발표되고, 한성임시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한성임시정부 측에서 4월 23일 배포한 「국민대회취지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 오호라 일본이 우리 민족의 생명력에 인한 이 문명적 행동에 대하여 야만적인 무력으로 잔학殘虐을 사행肆行(방자하게 행함)하는 것이 압박으로 해서 고진枯盡(쇠잔해서 없어짐)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2천만 민족의 성충열혈誠忠熱血은 이런 부정리적不正理的 압박으로 해서 고진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일본이 종시 개오改悟함이 없다면 우리 겨레는 부득이 최후의 행동으로 나가서 최후의 1인까지 완전한 조선독립을 기성期成할 뿐이다. 정의와 인도로 용진하는 우리 겨레 앞에 무슨 적이 있으리오. 다만 최대의 성의와 최선의 노력으로 국가적 독립과 민족적 자유를 세계에 주장하노라.

이 「국민대회취지서」의 말미에는 13도 대표 25인의 명단이 첨부되어 있는데, 전라북도와 강원도를 대표하여 박한영과 이종욱의 인감이 날인되어 있다. 박한영과 이종욱은 불교 승려이면서 전북과 강원도를 대표하고 있었다.

독립선언서 낭독하고 만세를 외치다 체포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재미교포 신문인 「신한민보」는 1919년 8월 14일자 4면에 석전의 체포 소식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