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자료 카테고리

전체 1
도서자료 1
학위논문 0
연속간행물·학술기사 0
멀티미디어 0
동영상 0
국회자료 0
특화자료 0

도서 앰블럼

전체 (1)
일반도서 (1)
E-BOOK (0)
고서 (0)
세미나자료 (0)
웹자료 (0)
전체 (0)
학위논문 (0)
전체 (0)
국내기사 (0)
국외기사 (0)
학술지·잡지 (0)
신문 (0)
전자저널 (0)
전체 (0)
오디오자료 (0)
전자매체 (0)
마이크로폼자료 (0)
지도/기타자료 (0)
전체 (0)
동영상자료 (0)
전체 (0)
외국법률번역DB (0)
국회회의록 (0)
국회의안정보 (0)
전체 (0)
표·그림DB (0)
지식공유 (0)

도서 앰블럼

전체 1
국내공공정책정보
국외공공정책정보
국회자료
전체 ()
정부기관 ()
지방자치단체 ()
공공기관 ()
싱크탱크 ()
국제기구 ()
전체 ()
정부기관 ()
의회기관 ()
싱크탱크 ()
국제기구 ()
전체 ()
국회의원정책자료 ()
입법기관자료 ()

검색결과

검색결과 (전체 1건)

검색결과제한

열기
자료명/저자사항
지리산 달궁 비트 : 빨치산대장 최정범 일대기 / 최정범 구술 ; 강동원 엮음 인기도
발행사항
파주 : 한울 : 한울엠플러스, 2016
청구기호
320.092 -16-17
자료실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형태사항
258 p. : 삽화, 초상 ; 23 cm
표준번호/부호
ISBN: 9788946061712
제어번호
MONO1201634281
주기사항
비트는 '비밀아지트'의 줄인말임
"최정범 연보" 수록

목차보기더보기


구술자의 글: 만인이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
엮은이의 글: 왜 지금 최정범인가

1. 일제 강점기, 난 이렇게 살았다
소작인의 아들, 세상을 간평하다 / 열네 살, 징용, 평안도 / 징용영장, 이번에는 홋카이도로

2. 어지러운 해방정국
내가 꿈꿨던 세상 / 포고령 위반, 소년원에 수감되다 / 좌익인 줄 모르고 속아서 시집왔다?

3. 6ㆍ25 전쟁, 그 격랑 속으로
나는 인공기를 들었다 / 인민재판에 선 사람들을 구명하다 / 9ㆍ28 후퇴, 결국 빨치산의 길로

4. 우리의 아지트 지리산 달궁
회문산에서 지리산으로 /보급투쟁, 정령치를 넘고 넘어 / 아무도 우리에게 빨치산이 되라고 말하지 않았다

5. 남조선 해방의 꿈은 멀어져 가고
수력발전용 제너레이터를 확보하라 / 산내 해방투쟁 / 토벌군의 추격을 피해 운장산으로 / 돌고 돌아 다시 지리산으로

6. 필사의 도주
가족 상봉, 그러나 다시 산으로 / 치명적인 부상을 입다 / 피체(被逮): 안녕, 지리산!

7. 좌절, 그러나 세상 속으로 당당히
나는 전쟁포로였다 / 4년 만에 신행길에 오른 아내 / 세상과 타협하다

부록: 최정범 연보

이용현황보기

이용현황 테이블로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0002184121 320.092 -16-17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0002184122 320.092 -16-17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 출판사 책소개 (알라딘 제공)

    나는 세상과 타협한 빨치산입니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은 기록


    된소리와 거센소리로 이루어진 투박하고 거친 단어 ‘빨치산’. 한국 현대사에서 이 단어는 왠지 그 발음처럼 부자연스럽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일상의 언어에 편입하는 것조차 약간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책 제목의 ‘비트’는 비밀아지트의 줄임말이다. 당시 빨치산 대원들이 흔히 썼던 은어다. 이 달궁 비트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수기의 주인공 최정범은 한때 ‘빨치산대장’으로 불리며 국가를 상대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혁명은 몇 년 뒤 허무하게 중단되었다. 군경에 붙잡힌 그가 택한 길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격렬하게 싸웠던 세상과 타협해 자신을 지우며 그 세상의 일부가 되는 일. 이제 그들은 산이 아닌 세상에 스며들어 갔다.
    수기는 전북도당 남원군당 유격대가 몰락하기 전 2년 남짓의 짧은 투쟁기를 그리고 있다. 그들은 왜 산에 들어갔고 어떻게 세상에 끌려 나왔는가?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 않은 이 기록이 그 질문에 답해 줄 것이다.

    자신을 지워가는 노병들

    “최정범 씨, 세상이 달라진 것 몰라요?” 1961년 5월의 어느 날, 일단의 사복경찰이 들이닥쳐 최정범을 잡아갔다. 일개 제방공사 현장감독으로 있던 그는 영문을 모른 채 묵묵히 경찰의 뒤를 따라나섰다.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는 혹시 모를 내란을 방지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주요 인물들을 위험인물로 재분류했다. 그리고 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내란 초기 며칠 동안 구치소에 유폐시켰다. 이른바 ‘예비검속’이었다. 예비검속 대상자 명단에는 최정범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의 이름 비고란에는 ‘전직 빨치산 간부’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한때 빨치산은 호시탐탐 국가 전복을 시도하던 위협적인 존재였다. 쿠데타 당시 빨치산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지만 이제 막 권력을 손에 쥔 군부에게 과거 빨치산 활동을 한 ‘불순분자’들은 여전히 두려운 ‘적’이었다. 그가 밤중에 끌려간 구치소 라디오에서는 박정희 군부의 ‘혁명공약’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본격적인 반공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제 다시 한 번 빨치산 전사들은 피의자 신분으로 군부에 의해 핍박을 당해야 했다.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최정범을 비롯한 수많은 빨치산 노병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여당 후보의 선거를 돕거나 삐라를 돌려야 했다. 그들은 그렇게 세상에 녹아 들어가 그토록 타도하려고 했던 그 세상의 일부가 되었다. 정치인들의 선거 운동에 동원되어 삐라를 돌리던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최정범의 술회는 생각보다 담담하다.

    전선에서 총성이 사라지고 공식적으로 종전이 선언된 직후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그동안 내가 인정하기 싫어 투쟁했던 질서 속으로 온전하게 유입되었다. _ 230쪽

    흥미롭게도 당시 내가 선거운동을 하고 돌아다녀야 했던 곳은 주천, 산내, 아영, 운봉, 동면, 이백, 산동, 보절 등 빨치산 활동을 하던 시절에 보급투쟁을 다녔던 지역들이었다. 그동안 그토록 타도하려고 투쟁했던 남쪽 정가의 보수 정치인에게 표를 달라고 떠들면서 그런 지역들을 누비고 다녔으니 완전한 자기모순이었다. _ 245쪽

    그래도 그때는 죽창이라도 있었다

    최정범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자 자화상이다. 간평일이 되면 마름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굽실거리던 부모의 표정이 그가 만난 세상의 첫 얼굴이었다. 그 시절 열에 아홉은 굶주리고 헐벗은 소작농이었다. 그나마 머리가 잘 돌아가고 눈치가 빠른 이들은 재빨리 지주에게 붙어 중간에서 착취자 구실을 하며 지주의 손발이 되었다. 가진 것도 없고 눈치도 없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1년간의 소출이 결정되는 간평일이 되면 손발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어린 최정범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계는 엉망이었다.
    이런 극심한 빈부 격차가 조선 반도 천지에 널린 수많은 어린 ‘최정범들’의 일상 세계를 지배했던 사회경제적 조건이었다면, 친일파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지위를 그대로 인정하며 집권한 이승만 정권은 최정범이 속한 정치 세계의 본질이었다. 이승만과 그의 추종자들은 여러 가지 정략적인 이유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오히려 친일파를 우대했다. 일제의 경시서는 경찰서라는 이름으로 명칭만 바뀌었을 뿐, 그곳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투옥하고 구타했던 경찰관들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제 그들의 곤봉과 수갑은 가난한 평민들을 향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될 터였다. 친일을 했던 이들은 다시 기용되어 경찰이 되었고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백면에도 경찰지서가 생겼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빌붙어 경찰 노릇을 하던 자들을 대부분 그대로 다시 기용해 각 지서에 파견했다는 사실이다. 인민위원회가 지하로 숨어들자 대한독촉을 포함한 우익단체의 행동대원들은 미군정의 비호 아래 거침없이 활보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경찰에서도 인민위원회에 가담해 활동했던 사람들을 포고령 위반 명목으로 잡으러 다니느라 혈안이었다. _ 61쪽

    최정범에게, 아니 그 시절 빨치산으로 입산한 수많은 공산주의자에게 그 모습은 견딜 수 없이 역겹고 슬픈 현실이었다. 그들은 이승만을 피해, 자유당을 피해, 제국주의를 피해 지리산에 들어갔다. 지리산의 거대한 생태계 안에서 그들은 자율적인 질서를 구축해 수년간 연명했다. 춥고 배고팠지만 그들에겐 만인이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엔 누가 쥐어준 것이 아닌, 스스로 깎아 만든 죽창이 들려 있었다.

    입산: 지리산 달궁 비트

    그러나 최정범은 공산주의 이론가는 아니었다. 단단한 사상 무장과 바위 같은 이론이 그에겐 없었다. 남들보다 좀 더 오래 걷고 빠르게 숲을 오갈 수 있는 튼튼한 심장과 두 다리를 지녔을 뿐이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만인이 차별 없이 평등한 세상’이었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고 그 소득을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 갖는 사회. 이 단순한 명제를 실현할 사상은 사회주의 말고는 없었다. 당시 평범한 절대다수의 생각과 동일했다. 최정범이 산에 들어간 이유도 평범했다.
    이런 그가 지리산에 입산해 활동한 시기는 6·25 전쟁 직후 몇 년간이었다. 한반도 남부의 거의 모든 빨치산이 그 시기에 처음 등장했고 사라졌다. 한때 우파 정권의 존립을 위협했던 가장 불온한 세력이었던 빨치산은 그들의 치명성만큼이나 빠르고 신속하게 소멸했다. 남원과 하동군 사이를 비집고 들어앉아 있는 지리산은 그 격렬한 몇 년 동안 빨치산들의 든든한 보금자리였다. 최정범은 이 지리산에서 빨치산 유격대를 이끌고 2년 남짓 ‘보투’를 지휘했다.

    “갑시다.” “어디로요?” “어디든 일단 왔던 길로 다시 갑시다!” 우리는 다시 뱀사골 쪽으로 향했다. 또다시 고단한 행군이 시작되었다. 의미도 목표도 희망도 찾을 수 없이, 그저 떠밀려 가는 행군이었다.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죽지 않는 것이었다. _180쪽

    그는 그 투쟁 동안 세 번의 총상을 입었으며 그중 한 발은 그의 발목 복숭아뼈를 산산조각냈다. 그들의 혁명 역시 조각난 복숭아뼈처럼 흔적도 없이 뭉개졌다. 빨치산의 역사는 혁명의 역사상 가장 처절하게 실패한 역사가 되었다.

    하찮고 쓸모없는 수기

    전후 미소양국의 대립 속에서 한반도에는 어느 한 쪽의 완전한 승리를 뜻하는 통일보다는 두 세력이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긴장감이 강요되었다. 그렇게 남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청산하지 못한 채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요란스럽게 출범했다. 빨치산들은 스스로를 세상에 억지로 끼워 맞추며 삶을 이어갔다. 우리에게 빨치산의 역사는 극렬하고 광신적이었던 이교도의 모습을 한 박물관의 전시물이거나 그런 것이 존재했는지조차 가물거리는 ‘없는 존재’일 뿐이다. 된소리와 거센소리로 이루어진 투박하고 거친 ‘빨치산’이라는 단어처럼 그들의 역사는 왠지 한국 현대사에서 부자연스럽고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그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일상의 언어에 편입하는 것조차 약간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자유와 평등. 촌스럽고 빛바랜 두 단어가 이 책의 주제다. 우리에게 이 두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식상하다. 첫째는 우리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거대한 착각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제 어느 누구도 평등과 자유라는 가치가 현실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반세기 전, 익명의 빨치산 유격대원들은 ‘차별 없이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 하지만 2016년 지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야권의 주요 정치인이 종북 프레임에 걸려 출마권을 박탈당하거나 시민단체의 건실한 청년이 빨갱이라는 별명을 얻고 쓸쓸히 퇴장하는 모습은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발견되는 일상이다.
    ‘오른쪽’의 세상에서 최정범을 읽는다는 것은, 어느 빨치산 노병의 삶을 복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백해무익한 쓸데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최정범의 수기를 읽음으로써 갈무리되지 않은 한국사의 민낯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가 과거에 비해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아니 오히려 더 평등하지 못한 세상으로 차갑게 얼어붙었음을 확인할 것이다. 그것이 독자에게 이 하찮고 쓸모없는 수기를 권하는 이유다.

    ※ 지리산 달궁 비트
    지리산은 6·25 전쟁을 전후로 해 전라도 지역의 빨치산들이 머무르며 투쟁을 벌였던 역사적인 공간이다. 그중에서도 달궁은 김지회(金智會)와 홍순석(洪淳錫)이 토벌군에 쫓겨 숨어든 은신처였고, 전후에는 지리산빨치산 남원군당이 은거한 아지트였다. 지리산 달궁 비트에서 ‘비트’는 비밀아지트를 줄인 말이다. 당시 빨치산 유격대원들은 지명 뒤에 ‘트’ 자를 붙여 ‘뱀사골트’, ‘달궁트’라고 불렀다.
    더보기
  • 책속에서 (알라딘 제공)

    [P.50] “워떠케 뺏겼는지도 모름서 멀 되찾았다고 좋아한다냐?”
    안평오 선생의 그 말이 가슴을 때렸다. 그는 이내 우리에게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일제가 을사늑약을 통해 우리의 주권을 어떻게 빼앗았는지, 우리는 그때 왜 제국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제대로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국권을 빼앗겼는지 등을 막힘없이 설명해줬다. 그가 나를 따로 불렀다.
    “최정범, 니는 더 알고 싶냐?”
    “예, 참말로 궁금혀 죽겠구만이라우.”
    “그러믄 서당 공부 끝나고 우리 집으로 오니라.” _제2장 어지러운 해방정국 中
    [P. 58~59] 교육은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워낙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 연찬(硏鑽)해 앎을 쌓아온 선각자의 가르침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히 내 가슴속에 똬리를 틀었다. 교관은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기본 모순을 알려주면서,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계급이 임금노동자와 농민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폐단을 설파했다. 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내가 어렸을 적에 품었던 ‘지주와 소작인’의 불평등한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꾸 떠올랐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나라는 적어도 그런 모습이어서는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가슴속에 새겼다. _제2장 어지러운 해방정국 中
    [P. 59] ‘공산주의를 제대로 실천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서로 많이 갖겠다고 탐욕을 부리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가 자리를 잡으면 지금처럼 뼈 빠지게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적당히 일하고 평등하게 즐기면서 살 수 있을 것이며 지주도 소작인도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세상이 아니겠는가!’ _제2장 어지러운 해방정국 中
    더보기

권호기사보기

권호기사 목록 테이블로 기사명, 저자명, 페이지, 원문, 기사목차 순으로 되어있습니다.
기사명 저자명 페이지 원문 기사목차
연속간행물 팝업 열기 연속간행물 팝업 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