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우리 추강을 낳으니, 곧은 절개로 세상에 홀로 섰네. 성품이 세상과 영합하기를 싫어한지라, 세상을 피하여 치욕을 멀리했지. 취중의 얘기는 공연히 준엄했고, 세상을 경시하며 늘 크게 웃었네. 지위에 벗어나 국시國是를 의논하다, 집안을 깨뜨리고 부관참시당했도다.
남효온의 절친한 벗이었던 조신이 『추강집』에 쓴 발문의 한 대목이다. 조신은 남효온의 삶을 추상같이 곧은 절개, 세속과 영합하지 않는 자세, 준엄한 취중담론, 세상을 바로 잡으려다 참극을 겪은 일 등으로 요약했다. 남효온은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단종의 생모인 소릉昭陵의 복위를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세조의 불법적인 왕위 찬탈을 용납할 수 없어 평생 정치 세계를 떠나 전국을 떠돌았던 방외인이지만 역사는 그를 절의의 표상인 생육신生六臣으로 추숭하고 있다. 서른아홉 살에 삶을 마감한 젊은 이상주의자 남효온의 꿈과 좌절의 여정이 『추강집』에 고스란히 남았다.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연구하며, 그 성과를 대중과 공유하는 인문고전 대중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는 부산대의 정출헌 교수는 『추강집』 중에서 남효온의 삶과 생각의 궤적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을 고르고 평설을 붙여 선집으로 꾸렸다. 작품이 등장한 시대적, 개인적 맥락에 대한 촘촘한 연구에 기반한 평설은 15세기 격변의 조선과 소신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지식인의 고뇌와 좌절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은 『추강집』에 대한 작품 선집이면서, 남효온에 대한 평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버려진 삶을 산다는 것 남효온에게 술과 벗은 삶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효온은 성균관 유생 시절 당대의 병폐 여덟 가지를 조목조목 들어가며 성종에게 개혁 방안을 제시했는데, 조목마다 세조의 불법적인 왕위 찬탈에 협력한 대가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훈구 대신을 겨냥하는 서늘한 의기가 넘쳤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복은 매서웠고, 결국 과거를 포기한 채 평생 세상에서 버려진 삶을 살아야 했다. 그 때문인지 그의 글은 자조와 울분으로 가득하다. 남효온의 절망이 유독 컸던 것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로 인해 주변의 친구들마저 하나둘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가 젊은 시절의 벗들을 추억하며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을 쓰고, 죽기 직전까지도 고치고 다듬었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성종 대 신진사류의 자화상이라 할 그 글은 미완에 그쳤다. 남효온은 갑갑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추구하기 위해 평생 전국을 떠돌았으나, 끝내 자유를 찾지 못했다. 남효온의 많은 작품은 그 시대를 증언하는 한편, 그의 고통스런 삶을 담고 있어 읽는 이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역적이 아니라 충신이다 세조가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불법적으로 왕위에 오른 사건은 조선의 정차사 중 충격적인 일로 꼽힌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단종과 사육신의 복권을 오랫동안 집요하게 요구했다. 결국 정조대에 이르러서야 복권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복권에 결정적으로 힘을 실어준 글이 바로 남효온의 「육신전」이었다. 『추강집』 속록에 실려 있는 이 작품은, 단종 복위 운동, 곧 병자사화로 죽은 인물 가운데 여섯 명을 선별하여, 그들의 충절을 증언하는 약전 형식의 기록이다.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은 사육신의 충절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왕위 찬탈을 주도한 인물들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성삼문의 약전에 세종의 은혜를 저버린 신숙주와 최항의 처사를 배치하고, 유응부의 약전에 한명회와 권람의 면모를 배치하여, 대비시킴으로써 누가 진정 충신이고 누가 진정 역적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병자사화 때 남효온은 겨우 세 살이었지만, 이후 시대의 선배들을 통해 사건을 전해 듣고 기록을 남겼다. 진실을 덮을 수 없다는 그의 결심은 어떤 신변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소신을 지키기 위해 평생 소외와 좌절, 슬픔 속에 살 수밖에 없었지만 불의한 세상과는 타협하지 않았던 남효온의 삶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책속에서
제1장 소릉 복위 상소로 조정을 뒤흔들다 18~25세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상소를 올리기 이전인 열여덟 살에 지은 시 한 편과 성종대왕에게 올려 화제를 불러일으킨 소릉 복위 관련 상소문을 실었다.
제2장 길 떠나는 벗이여 우리 언제 다시 27~28세 남효온은 소릉 복위 상소를 올려 곤욕을 치렀지만, 스물일곱 살 때 진사과에 합격한 것을 보면 새 시대에 대한 꿈을 포기하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훈구 대신과 신진 사류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상황에서 친구들은 조금씩 그의 곁을 떠났다. 갈등과 울분의 시절을 폭음으로 달래던 시절에 남긴 그의 슬픔이 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제3장 글은 으뜸이나 과거는 멀어라 29~30세 현실의 장벽에 막혀 과거를 포기하고 행주 전원으로 돌아가 생활할 때 쓴 글들이다. 남효온은 문장공부와 마음공부 사이에서 끝없이 방황하였다. 갈등 끝에 과거에 응시하지만, 훈구 대신이 불법적인 농간을 하는 바람에 떨어졌다. 결국 명리와 현달을 포기하고, 행주 전원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제4장 전원에서 씨 뿌리고 명승지를 유람하다 21~32세 한강 부근 행주에 거처를 정하고 추강거사로 자호를 붙이고 전원생활을 할 때의 기록이다. 직접 농사도 짓고 비교적 평온하게 지냈다. 뿐만 아니라 성리학 관련 논설을 활발하게 저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 가뭄으로 인한 극심한 궁핍과 김종직을 둘러싼 벗들 간의 불화를 지켜봐야 했다.
제5장 가족의 시련, 길 없는 방랑 33~34세 본격적인 방랑의 길로 들어선 시절이다. 둘째 아들과 고모가 죽고, 큰 기대를 걸었던 맏사위가 과거 공부를 중단하고 김해로 내려간다. 결국 남효온도 전원생활을 뒤로한 채 호남과 영남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제6장 스승 점필재에게 편지를 쓰다 35~37세 방랑 끝에 서울로 돌아왔지만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맏사위가 죽고 그는 병을 앓았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남효온은 스승 김종직에게 자신의 만사를 지어 올리고는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다.
제7장 천유를 품고 저 먼 곳으로 38~39세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추구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았지만 끝내 자유는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자유는 작은 내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족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죽음도 가까이 와 있었다.
제8장 불의의 시대, 증언의 기록 단종복위 운동을 펼치다 죽은 인물 가운데 여섯 명을 선별하여 그들의 충절을 증언하는 기록인 [육신전]과 더불어 시대정신의 궤적을 함께하는 [추강냉화], 자신과 절친했던 벗들과의 일화를 기록한 [사우명행록] 가운데 선별한 내용을 실었다.
제9장 평가 남효온 사후, 후대인이 기록한 다섯 편의 글을 실었다.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난신 취급을 받던 연산군 시대로부터 생육신으로 추숭된 정조 시대까지 남효온에 대한 평가가 300여 년 동안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