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반 하나의 질문 칼리반의 역사 우리의 상징 다시 마르티다 거짓 딜레마의 실체 자유세계에 대하여 시작된 미래 그렇다면 이제 아리엘은? 1993년 1월의 후기
다시 돌아보는 칼리반
현 단계의 우리 아메리카와 칼리반
오백 년 뒤의 칼리반
식인주의 앞의 칼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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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반 :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라틴아메리카 읽기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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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라틴아메리카 탈식민주의의 고전을 읽는다!! 셰익스피어의 『폭풍』의 등장인물 칼리반, 칼리반이라는 ‘개념-메타포’를 통해 살피는 탈식민적 주체의 가능성!
셰익스피어의 극중 인물 중에서 가장 다양하게 해석되어 온 인물인 폭풍우』(The Tempest)의 등장인물 칼리반. 이 책은 ‘칼리반’이라는 인물을 키워드로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탈식민주의적인 주체 및 지식/문화의 형성을 모색하고 있는 책이다. 쿠바의 시인, 에세이스트, 평론가로 20세기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지성이라는 평가를 받는 로베르토 페르난데스 레타마르가 1971년에 발표한 글인 「칼리반」을 비롯하여 ‘칼리반’이라는 ‘개념적 인물’과 관련해 쓰인 다섯 편의 글을 묶었다. 이 책은 ‘우리 아메리카의 혁명적 지식인을 어떻게 낳을 것인가?’라는 그람시적인 질문을 맴돌면서, 일종의 라틴아메리카 지식인 지도 그리기를 통해 민중적 기반의 해방정신으로 무장한 비판적 지성, 대항 헤게모니 투쟁에서 ‘칼리반’과 연대하는 혁명적 지식인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칼리반」은 라틴아메리카의 『오리엔탈리즘』
저명한 문학·문화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이 책의 표제작인 「칼리반」에 대해 라틴아메리카에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견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왜 라틴아메리카는 고유의 이론이나 담론을 생산하지 못하고 단순히 학문적 대상으로 전락하거나 서구의 규범과 지식 체계를 재생산하는 데 그치는가, 왜 라틴아메리카는 체계적이고 통합적인 사유를 생산할 능력이 없는가? 이 고통스러운 질문에 대해 독자적인 대항담론의 필요성이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는데, 페르난데스 레타마르의 「칼리반」은 이 요구에 대한 대표적인 응답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971년 『카사 데 라스 아메리카스』 68호에 발표된 「칼리반」에서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폭풍우』의 인물들에 부여되었던 정치·문화적인 의미를 재구성하는 면밀한 해석학적 독해를 통해 기존의 중심적인 이해에 문제를 제기한다. 저자는 흔히 ‘야만적인 괴물’로 묘사되는 칼리반과 이성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요정 아리엘의 대립 관계 속에서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흥미롭고 유용한 기표를 발견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특히 셰익스피어가 『폭풍우』의 배경으로 상정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카리브 해 연안 지역의 지식인들에게서 ‘칼리반’은 우선 미 제국주의자의 상징으로, 최근에는 제3세계 민중의 상징으로 역변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1898년 니카라과의 시인인 루벤 다리오(Rubén Darío)는 「칼리반의 승리」라는 에세이에서 그동안 라틴아메리카에 덧씌워졌던 ‘야만적인 칼리반’의 이미지를 미국의 물질주의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상징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호세 엔리케 로도(José Enrique Rodó)의 『아리엘』로 연결된다. 로도는 ‘아리엘’에게 그리스-라틴 문화의 정신주의적 가치를 부여하고, 라틴아메리카로 확장하고 있던 미국의 제국주의적 모더니티를 ‘칼리반’으로 명명한다. 하지만 다리오와 로도의 이러한 해석은 미국의 현실적 힘 앞에서 유럽 중심적 태도와 관점에서 기인하는 정신주의적 유토피아 담론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폭풍우』의 정복자인 프로스페로의 존재를 부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관점은 또한 라틴 혈통에 속하지 않는 인디오나 흑인을 타자화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모색 속에서 아르헨티나의 아니발 폰세, 마르티니크의 에메 세제르,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페르난데스 레타마르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칼리반에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다. 이들의 해석 속에서 칼리반은 프로스페로에게 저항하여 순응과 예속의 고리를 끊는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투사로서의 면모가 강조된다. 예컨대 에메 세제르는 『어떤 폭풍우』(1969, 국역본 제목은 『어떤 태풍』)에서 자기 해방을 선언하는 칼리반을 그려내기도 했는데, 이들의 이러한 담론적 실천은 그동안 영미 문학의 주류 담론으로 변질된 ‘탈식민주의 이론’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해오기도 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 지도
페르난데스 레타마르의 이 책이 ‘칼리반’이라는 인물을 중심적인 키워드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이 단순히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수용에 대한 기술에 멈추지는 않는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의 측근으로 쿠바 인민권력국가회의와 국가평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던 페르난데스 레타마르의 「칼리반」은 쿠바 혁명 이후 첫 12년을 이끌었던 문화 정책의 전략적 노선을 체계화하는 작업, 즉 문화를 위한 반제국주의 기획의 일환으로 구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업을 위해 페르난데스 레타마르는 이 책에서 호세 마르티, 시몬 볼리바르, 프란츠 파농,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등 혁명적 지식인들의 사상을 계승하고 확장한다. 특히 쿠바의 시인이자 문필가로 쿠바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쿠바의 국부(國父)라 할 수 있는 호세 마르티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페르난데스 레타마르는 마르티가 1891년에 발표한 「우리 아메리카」를 ‘1962년 제2차 아바나 선언이 나올 때까지 우리 아메리카에서 발간된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하면서 마르티가 이 에세이에 집약해 놓은 칼리반적 시각을 취해 서구적 논리를 무너뜨리는 주요한 근거로 삼고 있다. 마르티의 메스티사헤 개념에 깃든 반인종주의와 반식민주의는 진정한 토착적 아메리카성의 옹호로 요약되는 페르난데스 레타마르의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급진주의의 근본 요소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일종의 ‘라틴아메리카 지식인 지도’ 그리기를 통해 페르난데스 레타마르는 ‘아리엘’로 상징되는, 식민지 상황에 놓인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에게 ‘프로스페로의 겁에 질린 노예로서 주인을 섬길 것인가, 칼리반과 연대하여 진정한 자유를 위한 투쟁에 나설 것인가’를 묻고 있다. 저자가 투팍 아마루부터 레오 브라우어까지 한 페이지에 걸쳐 길게 호명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지식인과 혁명가들(37~38쪽, 이 명단만으로도 이 책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정치에 무관심한 한국 사회에서 탐구되고 기술되어야 할 중요한 목록을 제공하고 있다)은 이 싸움에서 칼리반의 편에 선 아리엘, 혹은 그 자신이 칼리반인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명단은 이 책의 시작인 “라틴아메리카 문화라는 것이 존재하긴 합니까”라는 유럽 신문기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이렇게 마르티나 체 게바라 같은 칼리반적 인물들을 그리는 동시에 페르난데스 레타마르는 그 반대편의 인물들, 식민 지배국의 문화 앞에서 사대주의와 순종에 길들여진 또 다른 지식인의 모습을 추적하고 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카를로스 푸엔테스처럼 잘 알려진 지식인들로부터 미국 중앙정보국의 자금으로 문화적 책략을 주도했던 에미르 로드리게스 모네갈 같은 이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류의 반칼리반적인 작가와 지식인들이 식민자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고 ‘자유세계’에 통합되고자 했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칼리반』, 라틴아메리카의 경계를 넘는 유토피아의 기획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근본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반란적 문화정치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있다. 모든 문화계와 대학이 “흑인과 물라토, 노동자, 농민으로” 분해야 함을 주장한 체 게바라의 1959년 연설에 기반하고 있는 페르난데스 레타마르의 주장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 대한 제언이기도 하지만, 또한 라틴아메리카의 경계를 넘어서는 유토피아적 기획이기도 하다. 그의 ‘칼리반’은 라틴아메리카의 경계에 갇혀 있지 않으며, 남도 북도 없는 탈서구적 인류 문화를 주창한다. “남자인 동시에 여자인, 범 성적인 완전한 인간 존재. 황인종이고 흑인이며 붉은 피부에 백인이고 메스티소인 존재. 소비자이기 이전에 생산자(창조자). 그의 중심은 동시에 그의 주변이어서 동서도 남북도 없는”(202쪽) 인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지 500년 후인 1992년 쓰여진 「오백 년 뒤의 칼리반」(이 책의 네번째 글)에서 페르난데스 레타마르가 예언적으로 경고했던 미국의 자국 중심주의, 인종주의, 반이민주의 정책이 현실화되고 있는 오늘날, 그가 이 책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칼리반’의 유토피아 기획은 성적·인종적 정체성의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 그리고 모든 것이 새롭게 구상되고 기획되어야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중요한 이론적 참조점을 제시하고 있다.
책속에서
[P.18~19] 사실 혼동은 근원적인데, 우리는 수많은 원주민, 유럽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 거주자들의 후손이지만 소통을 위한 소수의 언어, 즉 식민자들의 언어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식민지 주민들이나 과거의 식민지 출신자들은 대도시 한복판에서 그들끼리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반면, 우리 라틴아메리카인과 카리브인은 여전히 식민자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식민자의 언어는 토착어도 크리올어도 가로지르지 못하는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링구아프랑카linguas francas다. 지금 우리가 이 식민자들과 논쟁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지금은 우리의 언어이기도 한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또 지금은 우리의 개념적 도구이기도 한 그들의 숱한 개념적 도구를 동원하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논쟁을 벌일 수 있겠는가? 아마도 역사상 가장 뛰어난 픽션 작가일 셰익스피어의 한 작품에서 우리가 읽은 놀라운 외침도 이와 다르지 않다.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인 『폭풍우』에서 흉측한 칼리반은 자신의 섬을 강탈하고 자신을 노예로 삼고 자신에게 말을 가르쳐 준 프로스페로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네놈이 내게 말을 가르쳤지, 그리고 내가 얻은 것은 / 저주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는 거다. 내게 말을 가르친 대가로 / 천연두에나 걸려 뒈져라!”(『폭풍우』, 1막 2장)
[P. 37~38] 따라서 우리의 상징은 로도의 생각과 달리 아리엘이 아니라 칼리반이다. 칼리반이 살았던 바로 이 섬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메스티소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프로스페로는 섬에 쳐들어와 우리의 선조들을 살육하고 칼리반을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의사소통을 위해 그에게 강제로 자신의 말을 배우게 했다. 그러니 칼리반이 프로스페로의 언어가 아닌 그 어떤 언어로 자신의 주인을 저주하고, 또 ‘천연두’가 그자의 머리통 위에 떨어지기를 학수고대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우리의 문화적 상황과 현실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드러내는 은유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의 상징은 로도의 생각과 달리 아리엘이 아니라 칼리반이다. 칼리반이 살았던 바로 이 섬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메스티소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프로스페로는 섬에 쳐들어와 우리의 선조들을 살육하고 칼리반을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의사소통을 위해 그에게 강제로 자신의 말을 배우게 했다. 그러니 칼리반이 프로스페로의 언어가 아닌 그 어떤 언어로 자신의 주인을 저주하고, 또 ‘천연두’가 그자의 머리통 위에 떨어지기를 학수고대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우리의 문화적 상황과 현실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드러내는 은유를 알지 못한다. …… 우리 역사와 우리 문화, 그것이 바로 칼리반의 역사이자 칼리반의 문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P. 145] 칼리반을 우리의 상징으로 제안하면서 칼리반 역시 전적으로 우리 것이 아니며, 비록 이번에는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 근거하긴 했지만 여전히 생경한 산물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러한 생경함을 어떻게 철저히 피할 수 있겠는가? 쿠바에서 가장 숭배되는 단어인 맘비mambi 는 독립 전쟁 당시 적들이 우리에게 붙인 경멸적인 호칭인데, 아직도 우리는 그 의미를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이 단어는 명백하게 아프리카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독립 운동가는 해방 군대의 주력부대를 이루었던 흑인 노예들─스스로 독립 전쟁을 통해 해방된─과 다를 바 없다는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의 오만한 생각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백인─흑인 독립 운동가들은 식민주의자들이 하나의 모욕이 되기를 바랐던 이 말을 영예롭게 자신의 것으로 전유했다. 이것이 바로 칼리반의 변증법이다. 그들은 모욕하기 위해 우리를 맘비라 부르고 깜둥이라 놀리지만, 우리는 영광의 증표로서 우리 스스로를 결코 노예주의자의 후손이 아니라 맘비의 후손, 반란자─탈주자요 독립주의자인 흑인의 후손으로 여기는 영예를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