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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저자사항
다시, 서울을 걷다 / 권기봉 지음 인기도
발행사항
파주 : 알마, 2012
청구기호
金珍培 951.91 -12-7
자료실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형태사항
339 p. : 삽화 ; 21 cm
표준번호/부호
ISBN: 9788994963549
제어번호
MONO1201851219
주기사항
참고문헌: p. 335-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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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0002433870 金珍培 951.91 -12-7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 출판사 책소개 (알라딘 제공)

    “여기에 그런 뜻이 담겨 있었어요?”

    권력자의 시각이 아닌 수많은 ‘우리들’이 바라본 서울은 어떤 모습일까?
    무심코 지나친 서울의 일상과 장소, 문화, 의미를 다시 떠올린다

    우리는 고도古都 서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처럼 역사가 깊은 도시는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이 본격적인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은 조선이 개국하면서 수도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긴 600여 년 전부터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삼국시대 때부터 이 지역을 놓고 패권을 다퉜을 만큼 서울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만큼 서울은 다사다난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법궁인 경복궁을 비롯한 중요한 건축유산들이 불에 타거나 훼손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는 민족 고유의 건축 양식인 한옥들이 제국주의 양식의 서양식 건축물들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서울의 고유한 지명들 역시 일제의 편의상 사라지거나 변경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뿐 아니라 한국전쟁 동안에 수많은 폭격으로 서울은 거의 황폐화되다시피 했다. 게다가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철학도 명분도 없이 두더지처럼 혹은 불도저처럼 서울이라는 공간을 삭막한 콘크리트로 뒤덮어버렸다.

    그럼에도 서울이라는 도시가 매력적인 이유는?

    이처럼 서울은 런던이나 파리처럼 오랜 역사를 지녔음에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압축적인 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특히 문화적인 면에서 크게 후퇴했다. 그럼에도 서울이라는 도시가 여전히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1000만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새로운 문화와 기억 그리고 의미를 각각의 장소에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대와 근대 그리고 현대의 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서울은 때로 정리되지 않은 듯 보이지만 그 역사가 오랜 만큼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을 가지고 있다.
    권기봉은 이처럼 서울이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 그중에서도 우리가 알던 것과는 다르거나 숨겨져 있는, 또는 잊지 말아야 할 서울의 역사적 의미와 장소, 문화,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2008년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에 담았다. 우연찮게도 이 책이 발간될 즈음 숭례문 방화사건이 일어났고, 역설적이게도 이 사건으로 인해 서울과 서울 속 문화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부쩍 늘어났다. 경복궁이나 서울성곽과 같은 곳을 답사하는 이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을 뿐 아니라 서울을 다루는 책들도 여럿 출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여가 흘러 숭례문 복원공사가 마무리되고 있는 지금 서울이라는 공간과 그 속에 산재한 문화재를 대하는 사람들의 시각과 태도에는 과연 변화가 있었을까?
    이에 권기봉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보다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현장을 찾아 다시 서울로 나섰다. 권력자의 시각이 아닌 이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우리들’의 입장에서 다시 서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서울을 걸으며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서울의 모습을 발견하다

    지은이 권기봉은 ‘서울지하철’을 시작으로 ‘성수대교’와 ‘세종로’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찾아 일상 속에 녹아 있는 서울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고민했다. ‘피마길’과 ‘마장동’ ‘어린이대공원’ ‘장충체육관’ 그리고 ‘대학로’ 등 얼핏 익숙한 듯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낯설기만 한 곳을 걸으며 우리가 서울이라는 공간과 역사에 얼마나 무심한지도 살펴보았다. 화교나 도시빈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투영되어 있는 ‘옛 소공동 차이나타운’과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을 찾았으며, 노동자들과 철거민의 삶이 오롯이 새겨져 있는 ‘가리봉 오거리’와 ‘회현 제2시범아파트’를 답사했고, 한국 사회의 오늘을 보여주는 ‘말죽거리’와 ‘압구정 로데오거리’를 걸었다. 그 많던 건물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는 말해주지 않은 채 복원사업에만 열중하고 있는 ‘경복궁’과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서울시청이 스스로 부숴버린 ‘옛 서울시청사’도 주요 목적지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지나간 옛이야기 정도로 치부하고 있으나 슬그머니 역사적 반동을 꿈꾸는 세력의 망령을 고발하고자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과 신당동의 ‘박정희 가옥’ ‘남영동 대공분실’ ‘전쟁기념관’ 등을 샅샅이 살폈다. 제국주의 향수에 젖어 있는 일본의 몰상식한 태도를 비판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들에 대해 토론해보고자 ‘일본대사관’과 ‘경성방송국 옛 터’ 그리고 ‘중명전’도 돌아보았다.
    권기봉은 “다시 서울을 걸으며 깨친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모든 과거가 한결같이 ‘현재적’이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역사는 과거에 멈춰 있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숭례문 복원 완료를 앞두고 있는 지금 《다시, 서울을 걷다》를 세상에 내놓는 이유”라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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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속에서 (알라딘 제공)

    [P.18-19] 지하철 건설하면 나라 망합니다!-역사를 안고 달리는 ‘서울지하철 1호선’
    노면전차의 빈자리를 메우고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를 보완하기 위해 떠오른 대안은 바로 ‘지하철’이었다. 자동차가 나날이 늘어났기 때문에 불붙은 데 기름 붓는 격이 아니고서야 버스를 더 늘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는 이 상황을 딱 한마디로 정리했다.
    “지하철 건설하면 나라 망합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고작 255달러에 불과했다. 필리핀보다는 60달러 정도 많았지만, 당시 잘나가던 아르헨티나에 비하면 4분의 1 수준이었다. 부총리의 반대가 완강했지만, 문제는 차량 못지않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서울 인구였다. 1955년만 해도 157만 명이던 서울 인구가 1970년에는 3.4배에 가까운 543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바로 그때 대중교통 수요만이 아니라 교통난까지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인 지하철 건설이 결정되었다.
    [P. 32-34] 성수대교는 그저 흘러간 옛이야기가 아니다-부실공화국의 증거, ‘성수대교’를 찾아
    이후 성수대교 건설에는 교각 사이를 종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넓게 할 수 있는 ‘거버 트러스Gerber Truss’ 공법이 도입되었다. 교각을 세운 뒤 그 사이를 삼각형으로 짠 강철구조물 상판으로 잇는 방식이었는데, 상판들끼리는 지름 19센티미터짜리 핀을 이용해 연결했다. 이는 거꾸로 말해 핀만 제거하면 교각 사이의 상판이 쉽게 주저앉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성수대교가 ‘안보 개념이 가장 잘 도입된 다리’였다는 이야기가 나온 이유다. 건설부 장관이 박정희의 심복 김재규였고, 서울시장도 5.16군사정변 당시 육군본부를 점령하는 데 공을 세운 ‘혁명 동지’ 구자춘이었기에 그런 추측이 힘을 얻었다. … 아이러니컬하게도 성수대교 붕괴 사고의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기업이나 관계 당국 모두 내실을 다지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이문을 많이 남기고 뻔지르르한 겉모습을 갖추는 데에만 치중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설계는 타당성 조사도 없이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감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시공을 맡은 동아건설이 다방면에서 부실 시공을 한 정황이 역력했고 안전검사를 위한 접근 통로조차 없었음에도, 서울시나 건설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P. 43-44] 누가 짜장면을 하찮다 하는가-지금은 사라진 ‘소공동 차이나타운’을 찾아
    화교들의 지역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일이 벌어진 것은 1966년 들어서였다. 박정희 정권이 251명의 간호사를 처음 서독으로 파견한 그해 말에 제36대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이 방한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의 용병 격으로 베트남에 1개 군단 규모의 군대를 파병해놓은 상태였으니, ‘보스’의 방한을 허투루 준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울 인구가 379만 명 정도이던 그때, 일반 시민 155만 명에 학생 100만 명 그리고 공무원 20만 명 등 모두 275만 명을 동원해 김포공항에서부터 환영식이 열리는 서울광장까지 24킬로미터에 달하는 연도 주변에 빈틈없이 도열시켰다. 존슨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팻말과 꽃다발,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게 하고 마치 북한에서 하는 듯한 ‘열렬한 환대’를 베푼 것인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막상 환영식이 열리는 서울시청 주변의 낙후한 환경을 미리 손보지 않아 쇠락할 대로 쇠락한 소공동 차이나타운의 모습이 그만 미국 텔레비전 카메라를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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