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그리고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배우이자 원조 한류 전도사인 구로다 후쿠미의 상극相剋의 韓·日 관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지극한 휴머니즘의 기록. 태평양전쟁 당시 죽음의 가미카제 조종간을 잡아야만 했던 한 조선인 청년의 영혼 귀향을 위해 헌신해 온 작가가, 영향마저 귀향을 거부당한 채 불귀의 객으로 떠도는 조선인 병사들의 귀향을 기원하며 ‘귀향기원비’를 건립하기까지의 지난한 세월 속 발자취가 눈시울을 적신다. 그 과정 속에서 한국인들의 반일反日의 원형과 그 핵심 형질로써 한국 사회 일부에 만연한 배신과 협잡, 무책임이란 코드가 ‘반일감정’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상승효과마저 발휘하는지 생생한 체험을 통해 담담하게 진술한 논픽션이다.
<꿈속에서 만난 조선인 청년 특공병>흔히 한국통이자 친한파 한류 전도사로 잘 알려진 일본이 사랑하는 여배우 구로다 후쿠미. 그녀는 또한 뛰어난 에세이스트로서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에 별 관심이 없던 일본인들에게 책과 신문, 방송 등의 미디어를 통해 한국의 풍물과 문화, 한국인의 일상을 소개해 왔다.
27년 전인 1991년 작가의 나이 35살 무렵, 구로다 후쿠미는 일본 남쪽 섬을 여행하던 중 한 호텔의 잠자리에서 이상한 꿈을 꾼다. 꿈속에 구릿빛 얼굴을 한 청년이 밝게 웃으며 나타나 ‘천황을 위해 전사한 것은 억울하지 않으나 나의 원래 이름으로 죽어 있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토로한다.
작가는 이를 계기로 직접 답사 취재를 통해서 당시 가고시마 현 지란 육군 특공 기지에는 모두 11명의 조선인 특공대 병사가 존재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11명 가운데 한 명인 미쓰야마 후미히로라는 병사가 자신의 꿈속에 나타난 청년일 거라는 확신을 갖기에 이른다. 1945년 5월 11일, 오키나와 상공에서 격추되어 전사한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 한국명 탁경현卓庚鉉.
<귀향을 거부당한 조선인 청년 특공병들의 영혼 귀향을 위하여> 작가는 그날 이후, 자신의 꿈속에 나타난 청년이 미쓰야마 후미히로라는 일본 이름 대신 탁경현이라는 원래 한국 이름을 되찾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소원을 들어주는 것으로는 청년의 위령비를 청년의 새로 태어난 조국 대한민국에 세워 청년의 넋이나마 귀향시켜 위로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작가는 분주한 배우 활동 틈틈이 야스쿠니신사를 비롯한 일본 내의 자료를 찾고, 수시로 한국으로 건너가 탁경현의 친인척을 수소문하며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을 찾는 등 자비를 들여 위령비 제작 건립에 매진한다. 그런 노력과 정성 덕분인지 몇몇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탁경현의 고향인 경남 사천 땅에 위령비를 건립, 제막식 행사까지 성대하게 치러질 것임을 사천시장으로부터 약속받고 한국관광공사 도쿄지사장을 비롯한 유력인사들의 참석까지 약속받는다.
구로다 후쿠미의 이런 노력은 한국인들뿐 아니라 일본 내에서조차 한 여배우의 일방적인 한국 편애와 무책임한 동정주의로부터 비롯한 자랑과 과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고는 했다. 그러나 일본인 병사로 전사한 한 특공병의 영혼이 단지 조선인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무시되고 외면 받아 온 시간과, 동족으로부터의 ‘전범戰犯’ 낙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사과를 건네야 한다는 양심의 호소에 자발적 응답이었다는 사실만은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다.
<귀향기원비 제막식 저지, 그리고 배신과 무책임>그러나 구로다 후쿠미의 선의善意는 ‘귀향기원비’가 설치되고, 제막식을 갖기 직전에 어이없게도 배신을 당하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제작된 ‘귀향기원비’가 원래 설치됐던 사천의 체육공원에서 공식적으로 약속된 제막식마저 ‘사천진보연대’와 ‘광복회 경남지부’ 등의 소위 시민단체 회원들에 의해 저지당한 채 쫓겨나고 만 것이다. ‘친일 부역자’, ‘전범’이라는 낙인 구호가 난무하는 가운데 시장 등이 한 공적 약속들은 손바닥 뒤집듯 없는 일이 되거나 취소되어 버렸다.
그렇게 갈 곳을 잃은 채 사천의 한 사찰에 방치되어 있던 ‘귀향기원비’와 낙심한 구로다 후쿠미의 손을 잡아준 사람은 경기 용인에 있는 사찰인 법륜사의 주지승이었다. 그러나 비구니 주지승의 각별한 보살핌마저도 ‘광복회’ 등 반일 시민단체의 완고한 협박과 위력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서있어야 할 ‘귀향기원비’는 사찰 경내의 원래 서있던 자리에 앞면만을 드러낸 채 땅에 반쯤 묻힌 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아야 했다. 그렇게 탁경현을 비롯한 전사한 조선인 청년들은 조국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더 낮은 곳으로, 그리고 영혼마저도 숨을 죽인 채 더 어둡고 구석진 곳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상극相剋의 韓·日 관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지극한 휴머니즘의 기록>일본인 특유의 과장도 허황됨도 없는 정중함과 담백함으로 사실을 진술해 가는 문장들에는 일본이 사랑하는 여배우로서의 위상과 함께 자신의 내면세계와 치열하게 부딪히며 진실 앞에 다가서려는 에세이스트, 작가 정신의 기품 또한 가득하다. 고난과 역경, 비애와 좌절 속에서도 격조를 잃지 않고 절제함으로써 이념적, 민족적 감정에 경도되지 않는 ‘중립적’ 가치 또한 작가의 본모습이자 작가가 건네는 메시지의 미덕이다.
그런 한편으로는 오늘날 현대 한국 사회마저도 지배하는 ‘반일 무죄’, ‘친일 유죄’ 현상에 대해서는 엄격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에필로그 장 <‘진실을 말해 줄 사람’이 없어지기 전에>는 탁경현과 마찬가지로 특공병이었지만, 출격하기 전 종전이 된 덕분에 생존하게 된 한 특공병 출신 노인(우 옹翁)의 수기를 소개함으로써 현대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에 대한 작가의 진심을 대신하고 있다. 다음은 ‘어리석었을지는 몰라도 사악하지 않았던’ 한 생존 노인의 수기 중 일부분이다. 삼가 숙독熟讀을 권한다.
(전략)
탁경현 씨와 저는 나이도 그 당시 20대 전반으로 같은 세대였습니다. 저희들 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일본 국민이었습니다. 그것도 무기력하게 나라를 잃은 선대들의 원죄를 물려받아 병역 의무가 없는 대신, 참정권이 없어 일본인들로부터 온갖 차별을 받는 열등한 2등 국민이었습니다. 그 서러움은 젖먹이 나이 때부터 일본에서 자라난 저에게는 더욱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았습니다.
같은 동족 어른들 사이에서 ‘조선 독립’이라는 속삭임이 간혹 어렴풋이 들리긴 했지만, 그것은 시궁창에서 살고 있는 소녀가 꿈속에서 신데렐라를 보는 것만큼이나 현실성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조선인에게도 병역 의무가 주어져 저 자신이 징집 1기에 해당되게 되었습니다. 사실이지 두려웠습니다. 죽는 게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부터 저희들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바로 대놓고 ‘조센진(朝鮮人)’ 하고 민족을 비하하여 부르던 그들이 그 말을 쓰는 것을 스스로 금기시하게 되고, 대신 지역을 말하는 ‘한토진(半島人)’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너희들에게도 곧 참정권이 주어져서 우리들과 같은 권리 행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일본인 친구가 늘어났습니다.
저는 저희들에게 주어진 병역 의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죽는 대가로, 뒤에 남은 동족들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리라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는 징집영장이 바로 오지 않고, 본적지 면사무소에 와서 영장을 받아 입대하라는 면장으로부터의 전보가 전달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난생 처음 보는 고향 면을 찾아가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송행사에 다른 입대 장정들과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많은 고향 어른들이 저희들의 장도를 격려해 주셨고, 고향 후배인 학생들이 손에 손에 깃발을 들고 흔들면서 환송을 해주었습니다.
저희들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당당하게 입대하였습니다. 기왕에 죽을 바엔 일본인 병사들보다 더 용감하게 죽어서 조선 젊은이의 기개를 보여 주려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었을지는 몰라도 사악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상이 반민족행위자인 저의 변명의 전부입니다.
고향에서 제가 보았던 환송 행사가 사실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거짓 행사였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모두 내 탓은 아니고 남 탓이었을까요? 우리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나라 잃은 선대들의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서 이제는 구차스러운 변명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다만, 지금 반민족행위 시비에 휘말리고 있는 세대의 대부분이 어떻게 되어서이든 간에 잃었던 나라를 되찾고, 6·25전쟁에서 나라를 지켜냈고, 오늘의 대한민국 위상을 이루는 데 기초를 닦은 세대이기도 하다는 것만은 기억해 주십시오.
(후략)
<사람이기 때문에 건네고 건네받아야 하는 위로와 구원救援>일본의 많은 독자들이 생존자인 ‘우 옹’의 수기를 읽고 위안과 구원을 받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사실은 누구보다 그 시대를 고통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우리가 ‘우 옹’의 메시지로부터 위로와 구원을 구해야 하는 게 아닐까?
더불어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여배우 구로다 후쿠미가 던지는 메시지 또한 우리가 가슴으로 담아낼 수만 있다면, 민족과 이념이라는 ‘사악함’의 유혹으로부터 해방을 맛보는 순간이 되어 줄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진정한 ‘현대’ 한국인으로서 일본인들과 단순한 이웃 나라 관계를 넘어 공통의 미래를 꿈꾸는 일에도 주저함이 없게 될 것이다.
[탁경현은 누구인가]태평양전쟁이 클라이막스로 치달으며 일본의 패망이라는 대단원을 석 달여 앞둔 1945년 5월 11일, 오키나와 바다 위 상공에는 미 해군 함대의 일본 본토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일군一群의 가미카제 비행대가 함포 요격을 뚫고 항공모함을 비롯한 미 해군 함정들에 비행체를 던지기 위한 최후의 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키나와 상공의 가미카제 특공 비행대는 미 해군 함정들에 근접하기도 전에 요격, 모조리 격추당하고 만다.
그해 5월 11일, 격추된 채 쪽빛으로 일렁이는 서태평양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가미카제 특공대원 중에는 조선인 청년 조종사도 있었다. 일본이 조국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 출신 청년은 어릴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소학교와 중학 과정을 거쳐 교토 약학전문대학을 졸업한다. 그러나 청년은 전공한 약사의 길 대신 하늘을 날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육군 특별 조종사 견습사관 1기로 지원, 입교한다.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며 전황이 다급해진 일제 군국주의자들은 견습을 마치기가 무섭게 청년들로 하여금 가미카제 조종간을 잡게 하고, 문을 밀봉해 버렸다. 250킬로그램의 폭약과 편도 분량의 연료만 주입한 가미카제의 조종간을 잡고 가고시마 현 지란기지를 이륙, 일본 육군 비행대의 일원으로 출격한 경상남도 사천 출신의 약관 스물넷의 조선 청년 탁경현卓庚鉉이 바로 그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서울아시안게임을 계기로 한국을 드나들며 한국을 알아나가기 시작한 한 일본인 여배우가 있었다. 1991년 7월 어느 날 그 여배우는 꿈속에서 한 청년을 만난다. 청년은 밝고 건강한 웃음을 지으며 여배우 앞으로 다가오더니 스스럼없이 말을 건넨다. 조종사로서의 자기 죽음에 억울한 것은 없으나 ‘일본 이름’으로 죽었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표한다. 여배우는 이 의문을 꿈을 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서 오키나와 상공에서 격추, 죽음을 맞이한 조선인 청년 ‘탁경현’을 알게 된다.
[미디어 소개]☞ 월간조선 2018년 12월 기사 바로가기☞ 미디어워치 2018년 11월 13일자 기사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