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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저자사항
국경을 넘은 한국사 : 왜 한국사는 세계사인가? / 안형환 지음 인기도
발행사항
파주 : 김영사, 2015
청구기호
김형오 951 -15-89
자료실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형태사항
290 p. : 삽화, 지도, 초상화 ; 20 cm
표준번호/부호
ISBN: 9788934972617
제어번호
MONO1201922048
주기사항
참고문헌: p. 283-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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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0002509020 김형오 951 -15-89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 출판사 책소개 (알라딘 제공)

    왜 한국사는 세계사인가?
    세계인들과 함께 숨 쉰 5,000년 한국사를 기록한 최초의 책
    다양성과 객관성의 새로운 세계사를 만나다


    한국사는 단지 한반도와 만주 일부 지역을 지리적 배경으로 하는 사건들이 아니다. 한국사는 엄연한 세계사다. 중국 산둥반도에 산재했던 신라방은 국제적인 디아스포라Diaspora의 한 형태였고 쌍화점의 도시 개성에서는 고려 여인들이 아라비아인들과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었으며 조선시대 궁중 연회에서 코란을 읊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한국사는 삼국통일 후 중국에 남겨진 고구려인의 후예 라후족과 백제 유민들의 고장인 백제향, 파미르고원을 넘은 고선지와 제濟 왕국의 강력한 통치자 이정기의 역사를 포함한다. 이 책 <국경을 넘은 한국사>의 저자 안형환은 세계사 속의 한국사를 복원하고 한국사 속에서 숨 쉬는 세계사를 되살려냄으로써 철저하게 객관적인 입장에서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일깨우고 싶었다고 말한다.

    한반도에 터를 잡은 이슬람인들

    회회回回 사문沙門 도로都老가 처자식을 데리고 와서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임금이 명하여 집을 주어 살게 하였다.
    -《태종실록》 권13, 태종 7년 1월 17일자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회회回回 사문沙門 도로都老’. 그는 누구일까? 회회回回는 이슬람인을, 사문沙門은 성직자 집단을 가리키며 도로都老는 이름이다. 즉 조선에 정착한 이슬람 성직자였던 것이다. 이슬람 지역은 신라시대부터 한국과 꾸준한 교류가 있었고 이런 흐름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이슬람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대는 11세기 고려다. 《고려사》에는 “현종 15년 9월 대식국의 열라자悅羅慈 등 100명의 상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사가 나온다. 또 정종 6년(1040)에는 “대식국의 상인 보나개保那盖 등이 와서 수은·용치龍齒·점성향占城香·몰약·대소목大蘇木 등 각종 산물을 바쳤다. 그러자 왕은 해당 관원에게 명하여 이들을 객관에 묵게 하고 후하게 대접하였다. 또 이들이 돌아갈 때 많은 금과 비단을 주었다”는 기사를 남기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대식국이 바로 이슬람이다.
    이슬람 역사가들도 9세기부터 한국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846년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의 《도로 및 왕국 총람》에서 신라로 이주한 이슬람인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중국의 저쪽 감숙甘肅 맞은편에 산이 많고 왕이 많은 한 나라가 있는데 신라라고 불린다. 그곳은 금이 풍부하다. 그곳으로 간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빠져 영원히 정착해버리곤 한다.” 또한 신라의 선박 돛이 외국으로 수출되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서역인은 아마 처용일 것이다. 처용의 처處는 ‘머물다’, ‘살다’는 뜻을 지니고 있고 용容은 ‘담다’, ‘받아들이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 처용이라는 이름 자체가 ‘머물러 사는 것이 허용된 사람’을 의미하는데, 《삼국유사》에서는 처용의 생김새가 심목고비深目高鼻, 즉 눈이 쑥 들어가 있고 코가 높다고 기록하여 아랍계 사람일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경주의 괘릉에 있는 무사상 역시 눈이 깊고 코가 높은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기마 인물형 토기에 묘사된 무사도 코가 우뚝 서 있고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다. 상상 속의 인물을 조각한 것은 아닐 테니 아마도 주위에 있던,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을 이었을 것이다. 이는 상당수의 서역인들이 신라 조정 내에서 비교적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끊임없이 이어졌던 이슬람과의 교류는 한국 문화와 과학기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 세종 때 이순지 등이 만든 세계 최고 수준의 역법서 《칠정산七政算》은 아랍 역법인 회회력回回曆을 토대로 하여 원주각을 360도로 표기하고 있으며 장영실의 만든 물시계 자격루 역시 이슬람의 물시계에서 자동 시보 장치를 따왔다.

    세계 최대 제국에 불어 닥친 한류, 고려양
    13~14세기에 몽골제국은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라는 이름에 걸맞게 동유럽에서 고려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대규모의 인적, 물적 교류를 촉진시켰다. 그리고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종교 등을 강요하지 않는 지배 방식 덕분에 몽골제국 안에서는 여러 민족이 공존할 수 있었다. 원의 수도인 대도大都에서 시작된 길은 전 세계 어느 곳으로도 통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은 고려의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고려인들이 개방적인 눈으로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고려는 알려진 것처럼 극심한 내정간섭을 받기도 했지만 몽골과의 교류를 통해 사회·문화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14세기 세계 최대 제국 원元에서는 고려양高麗樣이라는 한류 바람이 불었다. 원나라 말기에 궁중에서 일하는 여인 가운데 절반가량이 고려 여인이었고 몽골 귀족들 사이에서 고려 여인을 부인으로 맞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이들을 통해 고려식 복식과 음식, 기물 등이 유행하게 되었다. 일부 고려 여인들은 중국 대륙을 넘어 인도, 중앙아시아로 시집을 가기도 했다. 충렬왕 24년(1298) 6월 마팔아국馬八兒國의 왕자 패합리唄哈里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은사모銀絲帽와 침향, 베 등을 바쳤다. 마팔아국에서 고려에 선물을 보낸 것은 왕자비가 고려 사람인 채인규蔡仁揆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려 지식인들도 대거 몽골로 향했다. 이곡李穀, 이색李穡, 빈우광賓宇光 등은 원나라 과거에 합격해 원의 관료로 일했으며 보우普愚, 천희千熙, 혜근惠勤 등의 승려들은 몽골에서 사원의 건립과 중수, 불경 편찬 등의 일을 맡았다. 고려의 금속활자 역시 몽골로 흘러들어갔다가 이곳에서 이슬람 상인에 의해 서아시아나 유럽으로 보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 술인 소주는 원나라를 통해 고려로 들어왔다. 아랍에서 발명된 증류 방식의 술 제조법이 몽골을 통해 전래됐는데 이 증류주를 몽골어로 아라키亞刺吉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개성 지방에서는 소주를 아락주라고 부른다.

    “중국에게 도움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베이징에서 반경 1,000킬로미터 내에 중국어를 나라말로 쓰지 않는 민족은 오직 우리뿐이다. 중국은 근세 150년을 제외하고는 인류 문화의 최선두에 서 있었던 나라, 언제나 지구 전체 GDP의 1/4 이상을 차지해왔던 국가 이상의 국가였다. 그런데 한국은 이런 중국에 맞서 동화되지 않고 반만 년 동안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중국과의 대외 교류사를 보면 뜻밖에도 사대 관계가 아닌 평등한 관계를 목격할 수 있다.
    7세기에서 9세기까지 당 제국은 세계 최고의 문화 선진국이자 초강대국이었다. 그런데 신라는 이런 초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했고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나당전쟁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정확히 읽어낸 국제적 감각의 산물이었다. 669년 9월 중국의 서쪽 변방에서 일어난 토번 제국이 실크로드의 중심지인 타림 분지를 공격했다. 이는 당의 서부와 중앙아시아 지역 지배권에 대한 도전이었고, 자칫하면 당나라가 무너질 수도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기회를 포착한 신라 지도부는 기습 공격과 고개를 조아리는 양면전술을 병행하면서 결국 676년 기벌포 전투를 마지막으로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다.
    산둥반도와 강소성江蘇省 일대를 중심으로 무슬림과 쌍벽을 이루었던 신라방은 국제적인 디아스포라의 한 형태였다. 엔닌円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보면 장보고가 세운 산둥반도 문등현 적산법화원에서 매일 열린 법화경 강의에는 참석하는 사람이 40여 명이었고 많게는 250명이 참석할 때도 있었는데 모두 신라인이었다고 한다. 8월 보름에는 신라인들끼리 모여 잔치를 했는데 3일 밤낮을 이어서 먹고 마시고 춤추며 노래를 불렀다. 먼 타향에서 추석 명절을 지내는 신라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당나라에서 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사람은 당 말기까지 58명, 이후 오대五代·양당梁唐 시기에 32명, 합쳐서 모두 90명인데 그중 신라인이 80명이었다. 이는 응시 인원이 많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신라 학생들이 우수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고려와 송의 무역에서 사여품賜與品이 고려가 보내는 조공품보다 훨씬 더 많았다. 당시 고려가 송에 수출한 물건은 금·은 기구, 화문능라花文綾羅, 세모시, 생포生布, 인삼, 표범 가죽, 바다표범 가죽, 백지白紙, 향유, 화문석, 나전螺鈿, 장도, 지紙, 필筆, 묵墨, 부채 등으로 다양했는데, 이런 무역 역조 현상에 대해 소동파蘇東坡는 “우리가 받은 조공품은 노리개 같은 불필요한 물품인데 백성들이 고생하며 번 돈으로 그것들을 사고 있다. 고려 사절단이 가져온 물품들이 시장을 어지럽힌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고려는 송과 거란 사이에서 실리적으로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송이 거란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고려 지도부는 원병 요청 거부를 핑계로 송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한다. 실제로 제11대 문종 12년(1058년)에 왕이 송나라와 국교를 재개하려 하자 신하들이 입을 모아 반대하며 “지금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번성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장삿배가 줄을 이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진귀한 물자가 날마다 들어오고 있습니다. 중국과 교통하여도(국교를 재개해도) 실제로 도움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자존감과 자부심이 넘쳤던 것이다. 개혁 군주 광종은 후주後周 출신의 쌍기雙冀 등 귀화 중국인들을 적극적으로 관리로 채용하기도 했다. 이는 그 이전이나 이후 왕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으로 고려 사회가 그만큼 국제적이고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쌍기는 과거제를 주도하는 지공거知貢擧에 임명되어 광종의 개혁을 뒷받침했고 아버지 쌍철雙哲까지 고려로 불러들여 좌승佐丞으로 일하게 했다. 이처럼 정책적으로 귀화인들을 등용한 것은 우리 역사에서 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북방에서 내려온 한국사 : 코리족, 여진, 말갈, 만주족
    시베리아 바이칼호수에는 알흔섬이 있다. 이 섬은 코리족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는데 황소가 하늘에서 내려 온 백조를 부인으로 맞아 11형제를 낳았으며 이들로부터 코리족이 시작됐다고 한다. 이 코리족의 한 분파가 바이칼에서 동남쪽으로 이동해 코리→고리→고려(고구려를 본래 고려라고 부른다)를 이루었다는 학설이 있다. 《후한서後漢書》나 《양서梁書》에서는 주몽을 “북이北夷(동이東夷가 아님을 주목하자) 고리국槁離國인”이라고 했다. 청淸대 한자 대사전인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는 고려의 ‘려麗’를 ‘리’로 발음한다고 되어 있다. 또 이 지역에서는 명사수를 투멘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주몽(부여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불렀다)과 발음이 비슷하다. 현재 바이칼호수 동쪽에는 몽골족의 한 분파인 부르야트족이 살고 있다. 이 부르야트가 부여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도 있다. 부르야트인들은 사먼을 지칭할 때 아르바이Arbai라고 하는데 여기서 r 발음이 약화돼 아바이Abai로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코리족이었던 주몽이 지금의 셀렝게 강변에 있던 부르야트족의 나라인 북부여에서 탈출해 남쪽으로 내려와 고리국(고구려)를 세우지는 않았을까? 또한 몽골인들은 한국을 솔롱구스라고 하는데 바이칼 인근에는 솔론Soklon족이 있으며 주변에 오랑키족도 있다. 혹시 우리가 부르는 오랑캐라는 말에 먼 옛날의 적대 종족에 대한 기억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통일신라시대에는 정규군인 9서당에 여진인들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고 발해의 백성들은 말갈인들이었다. 만주족의 역사를 정리한 《금사金史》와 청나라가 국가사업으로 편찬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로부터 나왔다는 대목이 나오며 《태조실록》에는 이성계가 잠룡이던 시절 그를 지킨 27인의 여진족 추장들이 등장한다. 이성계는 고향의 여진족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친 북방 지역의 전투에서 동북면 여진인들을 적극 포섭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대해나갔는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수 있었던 것도 병력의 주축이 그의 사병私兵이나 마찬가지인 여진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성계의 친우이자 참모였던 이지란李之蘭은 본명이 쿠란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인데 나중에 이성계로부터 이씨 성을 받아 이지란으로 이름을 바꿨다. 조선이 개국할 때 개국공신 1등에 봉해졌고 지금의 청해靑海 이씨李氏가 그의 후손들이다.

    남쪽 바다를 건너온 한국사 : 유구국과 베트남
    지금의 오키나와인 유구국琉球國은 1879년 일본에 귀속되기 전까지는 독립국이었는데 한반도와는 선사시대부터 꾸준한 교류가 있었다. 오키나와에서는 한반도 빗살무늬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소바다식曾畑式 토기와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석관묘가 발견된다. 또 오키나와 각지에서 상감청자가 출토되고 고려 광종 대에 만들어진 동종銅鍾과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라는 글이 새겨진 기왓장 등이 발견된 것을 보면 한반도와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세종 때는 유구국에서 조선 기술자를 초빙하여 병선을 짓게 했다. 배 만드는 기술을 배우는 한편 양국의 기술을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태조 3년(1394년)에 유구국의 왕이 조선에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구국 산남왕山南王 온사도溫沙道가 내전에서 패해 휘하 15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온 것이다. 유구국에서는 사신을 보내 산남왕의 송환을 요청했지만 태조는 응하지 않고 온사도를 후하게 대접했다. 조회에 두 차례나 참석시킬 정도였다. 온사도는 그러나 조선에 온 뒤 4년밖에 살지 못하고 태조 7년(1398년)에 사망했다. 조선으로 건너온 후 진양晉陽(지금의 진주)에서 살았던 온사도는 비록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부하 15명의 자손들은 지금도 이 땅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 것이다.
    온사도에 앞서 남쪽 나라에서 온 왕족 망명객이 또 있었다. 고려 고종 13년(1226년)에는 베트남의 첫 독립국가인 리왕조(1009년~1226년)의 9대 왕인 혜종의 숙부이자 군 총사령관이었던 이용상李龍祥이 한반도로 망명 왔다. 이용상은 반란군에 의해 왕족이 몰살당하는 와중에 3600킬로미터를 항해해 서해안 옹진반도의 화산에 도착했다. 때마침 몽골군이 이곳을 침입해오자 이용상은 주민들과 함께 힘을 모아 침략군을 물리쳤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고려 고종은 이용상에게 화산을 본관으로 하는 이씨 성을 하사했다. 지난 1995년 화산 이씨 종친회에서 베트남을 찾았을 때 베트남에서는 리왕조의 유일한 왕족의 후손이 왔다며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이 환대하는 등 예우를 깍듯이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성씨 280여 개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30여 개는 귀화 성씨다.

    다양성과 객관성의 한국사를 위해
    국정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 폭풍처럼 한 차례 지나갔다. 대체 한국사가 무엇이기에 이처럼 격렬한 대립과 갈등을 낳는 것일까? 역사는 기본적으로 과거의 사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민족의 정체성이 달라진다. 일본의 역사 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은 이런 맥락에서 발생한 부적절한 산물이다. 그렇다면 국정 역사 교과서는 어떨까? 최종적인 결과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국정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 우리의 정체성을 두고 벌어지는 갈등이자 미래를 좌우하는 하나의 분기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에 건강한 역사관은 기본적으로 다양성과 객관성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환상적인 민족주의에 도취되어 세계 제국 고조선을 상상할 필요가 없고, 식민사학의 그늘 아래 위축되어 애써 한국사의 영역을 축소할 필요도 없다. 반만년 동안 세계와 함께 숨 쉬어온 한국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통찰하고, 세계사를 함께 만들어온 이웃들의 역사와 더불어 미래를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 특정한 시기의 대외교류사를 다룬 책들은 많았지만 오천년 한국사 전체를 꿰뚫으면서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한국사 속의 세계사, 세계사 속의 한국사를 소개한 책은 드물었다.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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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베리아 바이칼호수에 알흔섬이 있다. 이 섬은 코리족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 황소가 하늘에서 내려 온 백조를 부인으로 맞아 11형제를 낳았는데 이들로부터 코리족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 코리족의 한 분파가 바이칼에서 동남쪽으로 이동해 코리→고리→고려(고구려를 본래 고려라고 부른다)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후한서後漢書》나 《양서梁書》에서는 주몽을 “북이北夷(동이東夷가 아님을 주목하자) 고리국槁離國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청淸대 한자 대사전이랄 수 있는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는 고려의 ‘려麗’를 ‘리’로 발음한다고 되어 있다. 또 이 지역에서는 명사수를 투멘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주몽(부여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과 발음이 비슷하다. 현재 바이칼호수 동쪽에는 몽골족의 한 분파인 부르야트족이 살고 있다. 혹자는 이 부르야트가 부여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부르야트인들은 사먼을 지칭하는 아르바이Arbai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r 발음이 약화돼 아바이Abai로 부르기도 한다. 또 몽골인들은 한국을 솔롱구스라고 한다. 바이칼 인근에는 솔론Soklon족이 있는데 이들과 한민족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또 인근에는 오랑키족도 있다.
    -<한민족의 시원을 간직한 바이칼호수>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중국 운남성云南城 서남부, 미얀마 서북부와 태국 북부, 라오스 서북부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라후족〔拉祜族〕이다. 라후족은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고, 닭을 옆에 두고 결혼식을 올리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 등 고구려와 유사한 풍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들이 입는 옷이나 몸에 하는 장신구 등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들도 명절 때면 우리처럼 색동옷을 입는다. 식생활에서도 음식물을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먹고, 채소를 소금으로 절인 후 물로 씻어내고, 밥을 으깨 넣어 발효시켜 먹는다. 이현복 서울대 명예교수는 “라후어는 문장을 이루는 낱말의 배열 순서가 주어+보어+술어로 한국어와 일치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라후어 ‘너레 까울리로 까이베요’는 ‘너는 한국으로 간다’는 뜻이다. 여기서 ‘너레’의 ‘너’는 우리말 ‘너’와 형태가 아주 비슷하다. 또한 ‘레’는 북한 사투리 ‘내레’의 레처럼 주격 조사로 볼 수 있다. ‘~로’ 역시 ‘서울로’, ‘광주로’와 같은 움직임의 방향을 나타내는 우리의 격조사와 형태나 기능이 같다. ‘까이’도 우리말 ‘가다’와 뜻과 발음이 유사하다. ‘까울리’는 중국이나 태국 등지에서 ‘고구려’나 ‘고려’를 뜻하는 말로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라후족의 기원은 고대 중국의 감숙甘肅와 청해靑海 지역에 살았던 민족들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청해성은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병사들이 주둔했던 곳이다. 따라서 라후족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에 잡혀갔다가 오지에 버려졌던 고구려의 후손들일 가능성이 높다.
    -<라후족, 백제향, 그리고 고선지와 이정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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