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간행 사업은, 일본의 여성문학이 근대 이후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성과를 축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을 살아온 한국 여성의 삶이나 문학,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체계적으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집 형태가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기획된 것이다. 이에 근대인으로서의 자아각성이나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 원폭, 전쟁, 식민지 체험 등 일본 여성문학이 다루어 온 다양한 주제를 체계적으로 망라하여, 한국의 여성학, 여성문학연구자 더 나아가 일반 독자들이 유사한 경험을 한 한국 여성의 삶과 문학을 사유하는 데에 참조가 되는 구성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모쪼록 이 책이 일본 여성문학을 이해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성문학을 아우르는 젠더적 사유를 발견하고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어가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 -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일본근현대여성문학연구회 -
『여자고개女坂』 이 소설은 1949년에서 1957년에 걸쳐『소설신초小説新潮』등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1957년에 가도가와쇼텐角川書店에서 간행되어 같은 해 제10회 노마문예상野間文芸賞을 수상하였다. 제목 ‘여자고개女坂’의 사전적 의미는 높은 곳에 있는 신사나 불당 등으로 이어지는 두 갈래 길 중에서 경사가 급한 ‘남자고개男坂’에 반대되는 경사가 완만한 비탈길을 일컫는 말이다.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자택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이기도 하며 도모倫라는 한 여성의 일생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한다.
소설은 메이지시대 고위 지방관리인 시라카와 유키토모白川行友의 아내 도모倫가 남편의 첩을 찾으러 어린 딸을 데리고 상경한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다. 도모는 봉건적인 집안에서 권위적인 남편 아래 처첩동거의 생활을 하면서도 묵묵히 남편에게 순종하며 안팎으로 집안을 꾸려간다. 어린 첩을 들인 이후에도 남편의 여성 편력은 끊임없고 하녀는 물론 며느리와도 관계를 갖는 파렴치한 모습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시라카와’라는 가문을 지키고자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도모. 그런 그녀는 예기치 못한 병으로 어이없게도 열 살이상 연상의 남편보다 일찍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억압된 삶을 산 도모의 마지막 유언은 장례식도 거부하고 유해는 시나가와品川 앞바다에 뿌려달라는 것이었다. 남편 유키토모는 40여 년 간 자신의 곁을 지켜준 아내 도모의 마지막 부탁마저 거절한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의지를 당당히 밝힌 도모의 외침은 비로소 자유를 찾으려는 한 여성의 처절한 선언으로 들린다.
『주홍을 빼앗는 것朱を奪うもの』 작가 엔지 후미코의 자전적 장편소설로 불리는 이 작품은『상처 입은 날개傷ある翼』『무지개와 수라虹と修羅』로 이어지는 3부작의 제1부이다.『주홍을 빼앗는 것』은 1956년에 발표되자마자 문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1969년에 제5회 다니자키준이치로상谷崎潤一郎賞 수상했다.
제목은「논어論語」의 한 구절인 “보라가 주홍을 빼앗는다”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고대에는 주홍이 정색正色이라 불리었으나 공자시대에는 중간색인 보라紫가 널리 사랑받으면서 가짜가 진짜의 지위를 빼앗는다는 비유로 쓰인다.
시게코滋子라는 여성의 유년부터 결혼 첫날밤에 이르는 반생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일종의 시게코의 성숙기 혹은 청춘의 성장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와 할머니의 그늘아래에서 유복하게 자란 여성이 아버지의 부재 이후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과정과 그 속에서 싹트는 연애와 성性의 자각이 요염하면서도 아름답게 때로는 과감하게 섬세한 묘사로 그려져 있다. 여성의 자립과 성, 그리고 인생을 그린 ‘현대여성필독서’라는 평가대로 작가 엔지의 모습에 오버랩되는 주인공 시게코를 통해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 쇼와昭和로 이어지는 근현대의 격랑 속에서 연애와 결혼을 통해 성장해 가는 한 여성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과연 ‘보라’에 담겨진, 혹은 ‘주홍’에 은유된 시게코의 감춰진 감정은 무엇일지를 탐구하며 읽게 되는 작품이다.
책속에서
[P.212] 도모는 쥐색 숄을 목까지 바싹 감싸고 얼음같이 차가워진 손에 무거운 우산을 들고 눈이 내리는 길에 서있는 단 한사람 자신에게 의미 없는 절망을 느꼈다. 몇십 년간 유키도모라는 감당할 수 없는 남편에게 생활의 열쇠를 맡긴 채로 그 제한 범위 가득 자신의 힘으로 괴로워하며 노력하고 얻어온 모든 것......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집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된 비정하고 단단한 벽에 갇힌 세계였다. 그 세계를 자신은 발을 디디고 살아왔다. 그것에 자신의 생활방식 모든 것은 담겨있는 것 같았지만 그만큼 온갖 정력과 지혜를 다 쓰고 온 이른바 인공적인 생활방식의 공허함을 도모는 새삼 외로운 한쪽 마을 집 불빛 안에서 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