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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저자사항
테크놀로지의 덫 : 자동화시대의 자본, 노동, 권력 / 칼 베네딕트 프레이 지음 ; 조미현 옮김 인기도
발행사항
서울 : 에코리브르, 2019
청구기호
338.064 -19-14
자료실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부산관] 서고(열람신청 후 2층 주제자료실)
형태사항
624 p. : 삽화, 도표 ; 23 cm
표준번호/부호
ISBN: 9788962631975
제어번호
MONO1201973321
주기사항
원표제: Technology trap : capital, labor, and power in the age of automation
부록 수록
참고문헌(p. 561-604)과 색인 수록

목차보기더보기


머리말
서문

1부 대침체
01 산업화 이전의 간략한 발전사
02 산업화 이전의 번영
03 기계화의 실패 이유

2부 대분기
04 공장의 도입
05 산업혁명과 그 불만

3부 대평준화
06 대량 생산에서 대번영까지
07 기계 문제의 귀환
08 중산층의 성공

4부 대반전
09 중산층의 몰락
10 추진과 분열
11 양극화 정치

5부 미래
12 인공지능
13 부에 이르는 길

감사의 글
부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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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0002566049 338.064 -19-14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0002566050 338.064 -19-14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0002576386 338.064 -19-14 [부산관] 서고(열람신청 후 2층 주제자료실) 이용가능
0002576387 338.064 -19-14 [부산관] 서고(열람신청 후 2층 주제자료실) 이용가능
  • 출판사 책소개 (알라딘 제공)

    테크놀로지의 역사,
    자동화 시대의 경제적․정치적 양극화를 이해하기 위한 지침서!


    이 책 머리말에는 미국 퓨 리서치 센터(Pew Reserach Center)의 2017년 설문 조사 결과가 나온다. 현재 미국인 중 85퍼센트가 로봇의 부상을 제한하는 정책에 찬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과학자인 앤드루 양(Andrew Yang)은 자동화로부터 일자리 보호를 구호로 2020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물론 이 두 사례 이면의 우려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컴퓨터는 인공지능(AI), 로봇공학, 머신 비전(machine vision: 사물을 시각으로 인지하고 뇌로 판단하는 인간의 기능을 기계가 대신하는 기술), 센서 기술 등의 발달에 힘입어 몇 년 전만 해도 인간만이 할 수 있었던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자동화가 일어나는 데 하향식 프로그래밍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컴퓨터 스스로 학습할 수 있다. 요원한 일일 것 같았던 혁신적 컴퓨터 프로젝트들이 이제는 현실이 됐다.
    이는 현재 우리가 직면한 이른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언급인데, 우리는 이에 희망과 더불어 우려와 두려움도 갖고 있다. 카카오 택시에 대한 일반택시 기사들의 반발에서 보듯 새로운 기술의 도입에 대한 기존 노동자들의 두려움을 우리는 직접 목격하고 있다. 게다가 1차 산업혁명에서 영국 사회를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러다이트 운동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4차 산업혁명(저자는 이 말의 사용을 꺼린다. 오히려 기존의 산업혁명처럼 산업의 요소가 전혀 없기 때문에 ‘탈산업혁명’이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을 겪고 있는 현재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를 잘 관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극심한 사회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으며, 그래서 정치경제적 측면이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그렇다면 이전의 산업혁명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날 당면한 새로운 기술의 시대를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러한 밑바탕에서 출발한다. 먼저 농업혁명에서 시작해 현재의 기술혁명과 인간의 대응 관계를 포괄적으로 개관한다. 그러고 나서 특히 현재 우리가 직면한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직접 관련이 있는 1차 산업혁명, 즉 영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가져온 사회 변동을 다룬다. 다음은 기술 패권이 미국으로 넘어간 19세기 중엽(1870~1880년) 이후 2차와 3차 산업혁명 시기의 새로운 기술이 미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현재 진행형인 4차 산업의 기술을 다룬다.


    책의 구성

    단순하게 생각하면 신기술이 노동을 대체할 때 그것에 대한 적대감과 사회적 격변이 따라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반면 그 기술이 활성화 유형일 때, 그리고 성장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배분될 때 신기술이 쉽게 확산되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1부 ‘대침체’는 약 1만 년 전 농업의 발명부터 산업혁명 여명기까지의 기술 발전을 간결하게 요약한다. 물론 이 시기에도 번득이는 발명품(괘종시계, 인쇄기, 망원경, 기압계, 잠수함)이 존재했으나 이 기술들에 대한 경제적 목적과 광범위한 사용은 없었다. 그리고 농업이 소유권을 확립하고, 따라서 산업혁명 이전에 정치권력은 지주 계급이 확고하게 쥐고 있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재산권 개념과 그 권리를 유지할 수 있는 정치 구조를 탄생시켰다. 기사의 보호와 소작 노동의 맞교환은 불평등한 세상을 만들어냈고, 거기서는 발전보다 지대 추구가 더욱 벌이가 쏠쏠했다. 노동 대체가 고통, 사회 불안, 그리고 최악의 경우 현 정치 체제에 대한 도전을 유발할 것이라는 지배 계급의 두려움은 노동자 대체 기술이 저항을 받거나 심지어 금지되는 일이 많았음을 의미했다. 정치계의 권력자들이 발전으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잃을 게 더 많았던 이러한 역학 때문에 서구 세계는 사람들의 기능을 위협하는 기술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테크놀로지의 덫에 계속 갇혀 있었다.
    많은 사건이 혁신가들에게 유리하도록 정세를 일변시켰다. 민족 국가의 부상과 군주 간 경쟁 심화는 기술 발전을 억압하는 대가가 대단히 커졌음을 의미했다. 퇴보하는 나라는 머지않아 진보하는 나라에 추월, 아니 최악의 경우는 정복당할 것이었고, 이는 현 정치 체제의 유지와 경제적 보수주의의 공조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바꿔 말하면, 외부의 위협이 아래로부터의 위협보다 더 커졌다. 대체 기술에 저항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던 동직 길드는 도시 간 경쟁이 커지면서 약화했다. 그들의 약화는 길드에 해를 끼쳤지만 정부가 기업가와 발명가 편에 서는 것을 더 용이하게 해줬다.
    결론적으로, 영국 산업이 기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엘리트 지배 계급이 혁신가들 편에 서기 시작한 이후였다.

    2부 ‘대분기’는 1780년과 1850년 사이 세 세대도 지나지 않아 인류 역사상 전례 없이 영향을 미칠 영국의 모습을 바꾸어놓은 사실에 주목한다. 그럼에도 산업혁명기에는 전반적인 성장이 느렸을 뿐 아니라 산업 생산량도 혁명이라고 할 만한 종류의 갑작스러운 급증을 겪지 않았다. 1750∼1800년 1인당 소득 증가는 같은 세기의 상반기보다 빠르지 않았지만, 1870년 들어 영국의 1인당 소득은 1750년보다 82퍼센트가 더 높았다. 이러한 사실은 성장이 초기에는 점진적이었지만 수많은 저항을 불러일으켰던 산업혁명을 탄생시킨 테크놀로지들이 광범위한 범용 기술이 되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서구와 나머지 세계 사이의 대분기가 시작된 전조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초기 기계화에 영국 내부의 대분기도 수반되었다는 사실이다. ‘엥겔스의 휴지’라고 일컫는 이 시기에 많은 시민의 생활 수준은 정체되거나 악화하기까지 했다. 일반 국민이 기술 발전의 혜택이 자기 주머니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보기까지는 무려 70년이 걸렸다. 가령 수직 방직공들의 소득은 동력 직기의 확산에 맞춰 급속히 감소했다. 산업화 초기에 경제 성장에서 발생한 이득은 압도적으로 자본가들에게 돌아갔다.
    산업화 이전 시대에는 창조적인 파괴로 인해 득은 거의 없고 실이 많았으므로 정치적 격변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군주들이 테크놀로지를 저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18세기가 되자 영국에서는 새로운 산업 계급이 강력한 정치 세력이 되었다. 기계는 영국 무역의 경쟁 우위에, 그리고 그에 따른 기업가들의 부에 아주 중요했으므로 정치 지도자들은 기계 기술의 전파를 용이하게 만들기로 했다. 그것이 노동자들의 효용성을 희생시키며 이루어진다 해도 말이다. 다시 말해,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민족 국가 간의 경쟁 심화와 동직 길드의 정치력 약화였을 텐데, 이는 갑자기 지배 계급이 기계화로 잃을 게 별로 없고 얻을 게 많아졌다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성난 노동자보다는 산업의 혁신가와 선구자들 편에 서기 시작했다. 공장의 부상이 노동자들의 행복을 감소시켰음에도 이들이 기꺼이 그걸 수용했다는 사실이 비논리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는 강제가 없었을 거라고 추정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기계화한 공장이 가내공업제를 몰아내 장인 노동자들의 소득이 사라지면서 많은 사람이 기계에 반발했다. 러다이트들은 발전을 막아보려 최선을 다했으나 가망이 없었다. 정치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정치력은 이제 그 밖의 다수에게는 불리하게도 발전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장악했다.
    그러나 단기간은 장기간과 구분해야 한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끝나가던 몇 십 년 동안 새로운 성장 패턴이 등장했다. 생산성 증가가 증기의 채택과 더불어 가속화하자, 실질 임금도 동시에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 노동조합이나 정부의 임금을 인상하려는 중대한 개입이 전혀 없는 가운데 일어났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전적인 산업화 시기 동안 테크놀로지는 기계화한 공장이 가내공업제를 몰아냄에 따라 기존 업무에서 숙련 노동자를 대체하는 자본의 형태를 취했다. 초기의 공장에 새로운 업무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새로운 부류의 노동자가 필요했다. 방적기는 인건비가 거의 안 들고, 협상력이 전혀 없고, 통제하기도 비교적 쉬운 어린이들이 다룰 수 있게끔 설계되었다. 오늘날 발전한 로봇공학이 그렇듯 기계를 다루는 아이들이 중간 소득 노동자를 대체했다. 반대로 이후 단계에서는 더 복잡한 기계를 도입하면서 공장에는 좀더 숙련된 노동자들이 필요했고, 이들의 기능은 테크놀로지에 의해 증진됐다. 그리고 갈수록 규모가 커진 공장에는 더 많은 기술직과 좀더 숙련된 관리 및 행정 인력이 필요했다. 테크놀로지의 변화는 대체 기술에서 활성화 기술로 바뀌었고, 노동자 숙련 기능의 가치가 높아짐에 따라 노동자의 협상력 증대에 기여했다. 근대적 성장 패턴의 도래가 기계에 대한 만연한 저항의 종식을 나타낸 것은 거의 우연이 아니다.

    3부 ‘대평준화’에서는 다른 형태의 산업화를 목격하게 된다. 19세기 초의 노동자들은 시장의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신들의 생계가 기계로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사력을 다해 거기에 저항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계속해서 악화하고 ‘엥겔스의 휴지’가 지속됐다면 기계화는 막힘없이 진척될 수 있었을까?”라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는 기계 도입에 반발하는 경우가 많이 둔화했다. 오히려 증기 동력 도입으로 기계화는 가속화했다. 그리고 20세기에 전력화와 내연 기관의 도래 후 기계화는 훨씬 증폭됐다. 이것이 2차 산업혁명이다.
    그런데 1870년대에 시작된 2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테크놀로지의 주도권을 인수했다. 테크놀로지의 국경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미국의 경험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뜻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반기계 저항이 종식되었냐는 것이다. 복지 제도의 부상은 틀림없이 실직의 경험을 덜 가혹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30년 미국의 복지 지출(실업 수당, 연금, 건강 보험, 주택 보조금 포함)은 국내총생산의 고작 0.56퍼센트에 불과했다. 복지 제도의 부상을 촉발한 것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물론 러다이트 정서의 상대적 부재는 어쩌면 노동자들이 더 나은 급료 및 근로 환경을 위해 투쟁하려 노조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기능을 위협한다고 인식된 기술에 격렬하게 반발했던 산업화 이전 시대의 동직 길드와 달리 노조원들은 자신의 분노를 기계로 집중시키지 않았다. 미국이 산업 국가 중에서 가장 폭력적인 노동사를 갖고 있었을 수는 있지만, 1870년대 이후 노동자들은 좀처럼 기계를 표적으로 삼지 않았다. 왜일까? 이후의 장들에서 논의하겠지만, 그 이유는 기술이 자신들한테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사람들이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20세기 내내 러다이트 정서의 상대적 부재를 유발했다고 입증하기는 어렵지만, 기술 발전의 결과로 노동자들에게 실제 일어난 상황과 이러한 부재를 떼어놓고 설명하는 게 훨씬 더 어렵다.
    우리는 신기술이 일자리를 파괴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거나, 서류상으로는 똑같아 보이는 직업들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기술적 변동이 노동을 대체하는 유형이라면 생산성 증가만으로는 고용과 임금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상쇄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활성화 기술은 생산성을 증대시킬 뿐 아니라 노동 인력을 완전히 새로운 업무, 직종, 더 넓게는 산업으로 복직시킬 것이다. 미국의 경제학자들은 실제로 1909∼1949년 미국의 가장 위대한 발명은 주로 활성화 기술 유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어떤 직업은 확실히 새 직업이 등장하면서 사라졌지만 전반적으로 신기술은 고용 기회를 엄청나게 신장시켰다. 실제로 자동차·항공기·트랙터·전력 기계·전화·가전제품 등을 생산하는 거대한 신산업이 등장했고, 이것들은 풍부한 신규 일자리를 창출했다. 테크놀로지의 마술이 진행되면서 구인은 늘어나고 실업은 줄어들었다. 그것들은 2차 산업혁명의 기술들이었다. 내연 기관과 전기가 그 밖의 기술보다 일자리 창출에 더 기여했다. 노동력 절감 기계도 생산성에 비슷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것들만큼 고용을 신장시키지는 않았다. 이는 전기와 내연 기관이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직종에 노동자를 배치시켰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따라서 경제학자들은 이 시기를 테크놀로지가 노동자한테 유리하게 작용한 때라고 결론 내리기에 이르렀다.
    활성화 기술이 보수가 나은 신규 일자리를 풍부하게 창출하는 세상에서는 대체 기술도 노동자에게 그다지 나쁘지 않다. 20세기는 노동 시장이 전무후무하게 혼란스러운 시기이기는 했지만, 노동자 대부분이 결국에는 이득을 볼 거라고 여전히 기대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미국의 공장에서 창출되는 점점 더 많은 수의 반(半)숙련 일자리는 어쩌다 실업자가 된 이들한테도 풍부한 기회를 줬다. 사람들은 고된 밭일을 집어치우고 더욱 쾌적하고 보수가 나은 공장 일을 찾아 떠날 수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대체 기술로 인해 농장에서 밀려났다기보다는 더 나은 급료와 근로 환경을 제공하는 2차 산업혁명의 굴뚝 산업 도시들로 이끌려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가정의 기계화는 여성들로 하여금 무급 가사 노동을 뒤로하고 유급 사무직을 찾아 떠날 수 있게 해줬다. 일부 농장 노동자, 철도 전신 기사, 엘리베이터 운전원, 항만 노무자 등은 분명 직업을 잃었다. 특히 대공황으로 대안적인 직업 선택지가 더 줄어들어 기계에 대한 불안감을 촉발한 1930년대에는 그랬다. 하지만 그때조차도 우리가 19세기에 봤던 종류에 상응하는, 기계 도입에 맞선 노동자들의 저항은 없었다. 기계화의 혜택이 노동자들에게 그야말로 너무나 컸던 것이다. 제조업의 지속적 팽창과 학력 상승이 대다수를 급료가 더 낫고 덜 위험한 직업으로 전환하게끔 해줬고, 그리하여 평범한 미국인은 발전의 주요 수혜자가 되었다. 노사 관계가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과 전반적 근로 환경 향상과 더불어 이러한 전환을 수월하게 하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회 복지 제도의 등장이 실직을 덜 가혹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핵심은 사회적 창의력의 중요성을 경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울러 테크놀로지 자체가 카를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구성원들이 확고하게 중간 계급이 될 정도로 만인을 더 잘 살게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의 이성적 대응은 기계화가 진척되도록 허용하는 한편 노동자에게 부과되는 적응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4부 ‘대반전’에서는 컴퓨터로 대표되는 3차 산업혁명을 다룬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의문의 여지없이 다양하고 풍요로운 중산층의 탄생과 부상이다. 그것은 대부분 2개의 산업혁명의 결과였다. 19세기 중반부터 컴퓨터 시대까지는 기술 변동이 노동자 중 꾸준히 증가하는 비율의 사람들이 중산층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끔 해줬다. 이런 측면에서 컴퓨터 혁명은 한 세기 동안의 기계화의 연장이 아니라 그것의 완전한 역전이었다. 최근 자동화는 20세기 동안 사무기기 및 공장 기계의 확산으로 창출됐던 일자리를 제거해왔다. 미국 경제의 구조 조정은 중산층에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다. 1980년대 이후 몇 십 년간 일어난 일은 여러 면에서 기계화한 공장의 도래가 유사한 노동 시장 공동화를 초래하고, 노동자의 임금에 하향 압력을 가하고, 소득에서 노동의 몫이 하락하는 원인을 제공했던 19세기 초의 경험과 닮아 있다. 최근의 포퓰리즘 역풍은 중산층 비대졸자들이 겪은 운명의 반전을 생각하면 덜 당혹스럽다. 블루칼라 가정(특히 출세했다고 느꼈던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 뒤처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위 중간 계급의 임금이 오르고 괜찮은 보수의 고용 기회가 풍부하다면 포퓰리즘이 이만큼 호소력이 있을 거라고 보기는 힘들다.
    요점은 미국이 테크놀로지의 시계를 컴퓨터 혁명의 시작점에서 멈추었다면 더 잘 살았을 거라고 얘기하려는 게 분명 아니다. 우리는 산업혁명이 러다이트에 의해 저지당하지 않았던 것에 감사할 수 있고, 자동화 시대는 산업혁명처럼 특히 소비자에게 어마어마한 혜택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산업혁명처럼 그것은 경제적·사회적 조직을 근본적으로 구조 조정하기도 했다. 노동 시장의 다수 집단에 손해를 끼치면서 말이다. 19세기 초와의 유사성은 분명 과장된 것일 수 있다. 지금 동시대의 미국인이 ‘어둡고 사악한 공장들’과 자신의 일자리를 맞바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가난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겪는 역경은 러다이트의 물질적 환경에 비하면 덜 가혹해 보인다. 2011년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은 〈에어컨, 케이블 TV, 엑스박스: 오늘날 미국에서 가난이란 어떤 걸까?〉라는 자극적인 보고서를 발간했다. 저자들은 가난한 미국인의 물질적 수준이 지난 세기 동안 엄청나게 향상했다고 적었다. 한때 사치품이었던 혁신적인 상품이 모든 가정에 흔해졌다. “2005년 정부가 가난하다고 정의한 전형적인 가정은 차 한 대와 에어컨을 갖고 있었다. 오락용으로는 컬러텔레비전 두 대, 케이블이나 위성 TV, DVD 플레이어 한 대와 VCR 한 대가 있었다. 집에 아이들이 있다면, 특히 아들이 있다면 엑스박스나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게임기가 있었다. 부엌에는 냉장고, 오븐과 난로, 전자레인지가 있었다. 기타 가정 편의 시설로는 세탁기, 건조기, 천장 선풍기, 무선 전화기, 커피 메이커가 있었다.” 하지만 러다이트도 그들의 증조부모들이 구할 수 없었던 다양한 소비재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소 추세인 중산층의 행복에 대한 우려를 고려할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가격이 더 떨어지지 않는 필수품도 많다는 사실에 대한 우려를 고려할 가치가 없어지는 것 또한 아니다. 물가가 일부 노동자의 임금보다 빨리 상승함에 따라 얼마나 많은 텔레비전, 전자레인지, 스마트폰, 컴퓨터를 갖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많은 미국인은 의료 서비스, 교육, 주거를 감당할 여유가 없어지고 있다. 빈민층이 아니며 한때 확고한 중산층이던 많은 가구가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 아울러 그렇게 된 한 가지 이유는 바로 많은 소비재의 가격 인하인데, 그 가격은 자동화와 생산 시설의 국외 이전으로 내려간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다. 기술이 노동자를 대체하는 변동의 시기에 제품 가격 인하의 배후에서는 상당수의 인력이 노동 시장에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그것이 산업혁명 초기 단계에, 그리고 자동화 시대에 일어난 일이다. 자동화의 재분배 효과가 19세기 말 기계화한 공장의 경우 그랬듯이 장기적으로 안정될 것이고, 기술 변동이 결국에는 모든 배를 들어 올린다고 가정하더라도 어떤 이에게는 그 단기간이 평생이 될 수 있다.
    5부는 ‘미래’다. 컴퓨터의 활용 폭을 한층 넓혀놓은 AI와 로봇 등이 주축이 되는 자동화의 현재와 미래를 예측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래가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빅 데이터가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컴퓨터 또한 자가 학습을 수행할 정도로 발달했지만, 이 가술들이 사실 얼마나 발전하고 확장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로이 아마라의 유명한 관찰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단기적으로는 기술의 효과를 과대평가하고, 장기적으로는 그 효과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이 법칙은 과거 테크놀로지 발전의 궤적에 대한 훌륭한 지침이 되어왔다.
    이는 인공지능 기술이 미래에 가져다줄 새로운 직업과 업무가 정확히 무엇일지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프레데리크 바스티아(Frédéric Bastiat)의 관찰을 어느 정도 믿어야 할 것이다. 그는 1850년의 뛰어난 에세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That Which Is Seen, and That Which Is Not Seen)〉에서 이렇게 적었다. “경제 부문에서 하나의 행동, 하나의 습관, 하나의 제도, 하나의 법은 하나의 효과만이 아니라 일련의 효과를 낳는다. 이런 효과 중 오직 첫 번째만이 즉각적이다. 그것의 원인과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원인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 밖의 효과는 연속적으로 전개된다. 그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만일 그것들이 미리 보인다면 우리에게는 좋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기계와 관련해 관찰할 수 있는 첫 번째 효과는 대체다. 창출될 일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미국에 존재하는 직업 중 산업혁명 초기인 1750년대에 존재했던 것은 거의 없다. 그리고 로봇공학자, 데이터베이스 관리자, 컴퓨터 지원 전문가를 비롯한 오늘날의 많은 직업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공식적인 직업 분류에 존재하지 않았다. 1980년과 대침체 사이의 고용 증가의 절반은 새로운 유형의 직업에서 발생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언제나 미지의 것이겠지만, 인공지능 기술이 기능 요건의 강화라는 20세기 패턴을 뒤집을 것 같지는 않다. 차기 물결에서 대체될 가능성이 가장 적은 직업은 몇 가지 예외는 있겠으나 사실은 숙련자의 직업이다. 그리고 2000년에 존재하지 않았던 신산업을 생각해보면, 이런 산업 대부분이 디지털 기술과 관련 있고 거기서 고용하는 노동자 대다수는 대학 학위를 갖고 있다. (과학, 기술, 공학 또는 수학 학위가 많다.) 그러므로 차세대 자동화 물결은 이전의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물결과 비슷한 효과가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공산이 크다. 전후 시대에 공장에서 일을 맡았던 이들은 컴퓨터 혁명 이후 이미 자신의 직업 선택지가 줄어드는 것을 지켜봐왔다. 그리고 소매업, 건설업, 운송업, 물류업도 자동화에 더 많이 노출되고 있으므로 그들의 선택지는 훨씬 더 나빠질 것이다. 사실 향후 30년이 과거 30년을 반영한다 할지라도 자동화는 최근 노동 시장 내 집단들 사이에 실직률을 밀어올리고 고졸 이하 사람들의 임금에 하향 압력을 가해왔으므로 그 말이 그다지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최종적인 생각들

    19세기 중반 영국이 마침내 엥겔스의 휴지를 벗어났던 바로 그즈음에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계속되는 기계화가 노동자 계급의 지속적 빈곤을 의미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과거에는 그들이 옳았다. 산업혁명 때 많은 영국인은 더 가난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속적인 발전이 똑같은 방향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틀렸다. 다른 많은 사람처럼 그들도 테크놀로지의 신비스러운 힘에 속았던 것이다.
    노동자에게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기나긴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일화들마저 마침표를 찍었다. 이 책의 논지는 현재의 경제적 추세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인공지능이 초래하는 생산성 회복에 대해 낙관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그 회복은 우리를 평균적으로 더 부유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일부 노동 인력에 대체 기술이 미치는 부정적 효과를 어느 정도 상쇄시키는 데도 일조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 역사에 비추어봤을 때, 그것은 수년 아니 심지어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더구나 더 전반적으로 노동 인구를 신규 일자리로 복귀시킬 수 있는 활성화 기술 물결의 정점에 우리가 와 있는지도 모르지만, 중산층 사람들이 거기에 딱 맞는 기능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도 그들에게 별로 위안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한 세기 이전에 자동차가 그랬던 것처럼 인공지능이 거대한 신산업을 낳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헨리 포드의 조립 라인 발명은 복잡한 작업을 초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도 수행할 수 있는 간단한 업무들로 쪼갰다. 지금까지 30년이 넘도록 기술 변동은 대학 학위를 요구하지 않는 신규 일자리는 거의 창출한 적이 없었다. 갈수록 기술적으로 정교해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자동화의 새벽이 오기 전 공장에 모여들었던 그들을 위한 새 일자리는 열릴 것 같지 않다.
    두터운 중산층을 탄생시켰던 경제적 질서는 거기에 의존했던 중산층 정치와 더불어 시들어버렸다. 대침체 때까지 자동화가 중간 소득 가구에 가했던 압박은 보조금 지급에 가려졌고, 이것은 비대졸자 노동자의 하락한 임금을 벌충하고 전반적 소비가 영향을 받지 않게끔 했다. 주택 시장 호황 역시 부동산 거품이 꺼지기 전까지는 풍부한 건설업 일자리가 제조업 일자리의 일부 손실을 메워줬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불경기는 꾸준했던 중산층 임금 하락의 정체를 드러냈고, 이것은 비교적 최근에 포퓰리즘이 왜 부상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앞날을 내다본다면, 자동화의 승자와 패자 사이의 간극은 더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차세대 자동화의 물결은 제조업뿐 아니라 운송업, 소매업, 물류업, 건설업의 많은 미숙련 일자리로 밀려올 것이다. 따라서 장기적으로는 낙관하는 게 타당하지만, 이런 낙관주의는 우리가 단기적 역학을 성공적으로 관리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자동화로 직업을 잃은 사람들은 아주 당연하게도 거기에 반발할 테고, 만일 그들이 반발한다면 장기적 효과와 분리한 채로는 단기적 효과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기능을 위협하는 기술에 대한 오랜 저항의 역사, 그리고 세계화에 대한 최근의 역풍에 비춰볼 때, 우리는 자동화를 삶의 냉혹한 사실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19세기 러다이트와 달리 지금 사람들은 20세기에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사람들을 더 잘 살게 만들었는지 목격해온 게 사실이다. 20세기의 처음 세 분기 동안 기계화가 진척됨에 따라 임금은 전 계층에서 상승했다. 그러나 만일 다가올 몇 년 안에 테크놀로지가 모든 배를 들어 올리는 데 실패한다면, 기술 변동에 대한 광범위한 수용도 당연시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엥겔스의 휴지 때보다 더 높은 기대를 갖고 있다. 그들에게는 투표권이 있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어떤 단일한 정부 정책도 자동화가 가져온 사회 문제의 전 영역을 다루지 못한다. 유감스럽게도 복잡한 일단의 문제에 대해 겉보기에 쉬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단기적으로는 선거에 승리를 가져다줄지 몰라도 현실은 조만간 발목을 잡고 만다. 중도 보수와 중도 진보는 골치 아픈 균형 잡기에 직면해 있다. 자동화의 효과를 과장할 경우 대량 실업의 공포를 촉발해 잘못된 정책 반응, 포퓰리즘 정당의 증가, 그리고 어쩌면 테크놀로지 자체에 대한 반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만일 정부들이 자동화의 사회적 비용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간다면, 그들의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오랫동안 정부들은 세계화의 비용은 간과하고 이익에만 초점을 맞추고 싶어 했다. 그 이익이 상당히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사회적 비용을 다루지 못한 것이 결국에는 주류 정치의 신뢰도를 깎아먹고 말았다. 정부들은 자동화로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위험성이 이렇게 높은 적은 없었다.
    누군가는 기계가 모든 일자리를 차지하는 새 시대에 우리가 들어서고 있다고 여전히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그게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고 말할 근거가 지금으로서는 거의 없다. 우리의 현재 궤적은 고전적 산업화 시기와 극도로 유사해 보이며, 우리 모두는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설령 이번이 다르다고 가정하더라도, 눈앞의 도전 과제는 여전히 기술이 아닌 정치경제학의 영역에 놓여 있다. 테크놀로지가 일자리는 거의 창출하지 않고 엄청난 부를 창출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놓인 도전 과제는 결국 분배의 문제다. 결론은 테크놀로지의 미래가 무엇을 품고 있건 그것의 경제적·사회적 영향을 결정짓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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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부란 우리로 하여금 최소의 인력으로 최대를 생산하게 해주는 테크놀로지의 누적 효과로 봤을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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