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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저자사항
조선왕실의 풍수문화 :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공간생활사와 장소미학 / 최원석 지음 인기도
발행사항
서울 : 지오북(GEOBOOK), 2021
청구기호
133.3337 -21-6
자료실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부산관] 종합자료실(1층)  도서위치안내(부산관)
형태사항
663 p. : 삽화, 초상화 ; 23 cm
표준번호/부호
ISBN: 9788994242781
제어번호
MONO12021000010009
주기사항
대등표제: Pungsu culture of the Joseon dynasty
참고문헌(p. 658-660)과 색인 수록
201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진흥사업단)의 한국학 총서(왕실문화총서) 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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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004
일러두기 019
1부 조선왕실 풍수문화의 전개 020
1. 조선왕실의 풍수 실천과 태도 022
2. 조선왕실의 풍수 제도와 운용 038
3. 인문풍수의 지평과 미학 046

2부 권위의 장소, 궁성 054
1. 한양의 터잡기와 풍수 비보 056
1) 왕도와 풍수 056
2) 태조가 꿈꾼 새 도읍지 060
3) 한양의 풍수 보완 091
2. 한양의 궁궐과 풍수 109
1) 북궐의 풍수 111
경복궁 111
2) 동궐의 풍수 145
창덕궁 145 /창경궁 155
3) 서궐의 풍수 162
경희궁 162 /인경궁 170

3부 생명의 터전, 태실 174
1. 조선왕실의 태실 조성과 관리 176
1) 태실과 풍수 176
2) 왕태실의 풍수 202
2. 역대 왕태실 209
1) 태실의 비중이 컸던 시기: 태조부터 예종까지 211
1대 태조 태실지 211
2대 정종 태실지 217
3대 태종 태실지 220
4대 세종 태실지 223
5대 문종 태실지 230
6대 단종 태실지 236
7대 세조 태실지 242
8대 예종 태실지 245
2) 태실의 비중이 약화된 시기: 성종부터 순종까지 248
9대 성종 태실지 248
11대 중종 태실지 253
12대 인종 태실지 257
13대 명종 태실지 262
14대 선조 태실지 265
15대 광해군 태실지 271
18대 현종 태실지 273
19대 숙종 태실지 276
20대 경종 태실지 279
21대 영조 태실지 283
22대 정조 태실지 287
23대 순조 태실지 289
24대 헌종 태실지 294
27대 순종 태실지 297
위치가 확인되지 않는 왕태실지 300

4부 영속의 공간, 산릉 302
1. 조선왕실의 산릉 조성과 관리 304
1) 산릉과 풍수 304
2) 산릉의 조성과 관리 316
2. 역대 산릉 327
1대 건원릉(태조), 제릉(신의왕후), 정릉(신덕왕후) 328
2대 후릉(정종·정안왕후) 349
3대 헌릉(태종·원경왕후) 353
4대 영릉(세종·소헌왕후) 367
5대 현릉(문종·현덕왕후) 376
6대 장릉(단종), 사릉(정순왕후) 392
7대 광릉(세조·정희왕후) 404
8대 창릉(예종·안순왕후), 공릉(장순왕후) 411
추존 경릉(덕종·소혜왕후) 424
9대 선릉(성종·정현왕후), 순릉(공혜왕후) 433
10대 연산군, 거창군부인 묘 449
11대 정릉(중종), 온릉(단경왕후), 희릉(장경왕후),
태릉(문정왕후) 450
12대 효릉(인종·인성왕후) 475
13대 강릉(명종·인순왕후) 480
14대 목릉(선조·의인왕후·인목왕후) 486
15대 광해군, 문성군부인 묘 503
추존 장릉(원종·인헌왕후) 505
16대 장릉(인조·인렬왕후), 휘릉(장렬왕후) 515
17대 영릉(효종·인선왕후) 532
18대 숭릉(현종·명성왕후) 540
19대 명릉(숙종·인현왕후·인원왕후),
익릉(인경왕후) 545
20대 의릉(경종·선의왕후), 혜릉(단의왕후) 561
21대 원릉(영조·정순왕후), 홍릉(정성왕후) 572
추존 영릉(진종·효순왕후) 587
추존 융릉(장조·헌경왕후) 594
22대 건릉(정조·효의왕후) 608
23대 인릉(순조·순원왕후) 618
추존 수릉(문조·신정왕후) 624
24대 경릉(헌종·효현왕후·효정왕후) 632
25대 예릉(철종·철인왕후) 638
26대 홍릉(고종·명성황후) 643
27대 유릉(순종·순명황후·순정황후) 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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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판사 책소개 (알라딘 제공)

    동아시아와 한국의 역사 통틀어 풍수문화가 가장 번성했던 조선왕실
    519년을 이어온 권위 장소 궁성과 태실, 산릉을 둘러싼
    풍수문화의 전개를 종합적으로 고찰한 『조선왕실의 풍수문화』 출간!!

    ● 조선왕조는 태조의 한양천도부터 풍수사상에 기초하였으며
    조선의 국왕들은 풍수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풍수를 적극 활용하였다.

    27대로 이어진 조선의 왕 중에서 태조, 태종, 세종, 선조, 광해군, 정조 등은 풍수에 대한 믿음이 깊거나 활용 정도가 높았던 왕으로 꼽을 수 있다. 반면에 성종과 중종 등은 풍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태도의 일면을 보였다.
    태조와 태종은 개성에서 한양 천도 과정만 보더라도 풍수에 대해 상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세종 때는 경복궁 명당 논쟁, 헌릉 길 폐쇄 여부 등 풍수에 관한 여러 현안이 제기되었다. 세종은 풍수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이 높아 자손들의 태실을 정비하는데 풍수를 적극 활용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의 묏자리는 풍수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그저 부왕(父王)인 태종 곁에 묻히면 된다고 생각하여 효성이 위주가 되어 완벽한 명당자리가 아니라도 보완(비보)하면 된다고 했다. 선조는 개인적으로 풍수를 대단히 믿었고 자신의 태실을 길지에 봉안하기 위한 애착이 컸다. 광해군은 교하천도가 좌절되자 경덕궁과 인경궁의 축조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 묘원의 이장을 목적으로 풍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식을 쌓았다.

    정조는 풍수를 독학했으며 풍수지식이 가장 깊었던 왕이었다.

    “나는 인정(人情)이 안정된 뒤에야 풍수[地理]도 좋아진다고 생각한다(『정조실록』, 13년 7월 11일).”
    이 한 문장이야말로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정조의 조선왕실의 풍수에 대한 가치관을 응축하고 있다고 『조선 왕실의 풍수문화』에서 저자는 표현했다. 또한 저자는 조선의 국왕 가운데 풍수에 대한 가장 조예가 깊었던 한 사람으로 단연코 정조를 꼽는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 이장을 위해 독학으로 많은 풍수 책으로 공부하여 풍수 원리를 터득하였다. “옛사람이 지리를 논한 여러 책을 읽고, 깊이 생각하고 탐색하여 마침내 그 종지(宗旨)를 얻은 듯하였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정조의 풍수 지식은 사도세자의 현륭원 이장과 화성 건설에서도 발휘됐다. 현지의 조건을 바탕으로 꼼꼼하고 세밀하게 풍수의 실행을 지휘 감독하였다. 또한 정조는 정치적으로 사도세자의 복권을 꾀하고 수원지역을 개혁의 진원지로 삼과 왕권 강화를 위해 풍수적인 핵심요소를 활용했다. 정조의 창의적인 풍수 안목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풍수 대상의 스케일에 맞게 기준과 방법을 적용하는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둘째, 형세론과 방위론에 경중의 가치를 두고 차별적으로 인식하였다.”

    조선왕조의 풍수는 고려왕조와 달리 개인의 인성과 사회윤리를 강조했다.

    고려왕조의 풍수가 선불교에 기반한 비보풍수로서 마음을 더욱 강조하였다면 조선의 풍수는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인성풍수로서 사람과 문화의 역할을 상보적으로 강조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의 풍수 교과서 『지리신법호순신』에, “길흉의 조건은 땅에서만 구할 수 없으며 사람의 덕(德)을 본받아 따른다.” 고 밝히고 있으며 저자는 길흉이 작동하는 조건에서 사람의 덕이 주이고 땅의 풍수는 종이라고 하였으며 인성풍수는 “스스로 수양하여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에 달려있다.”기 때문에 인성의 함양과 윤리의 실천이 중요하고 ‘땅의 길흉은 사람의 덕을 따른다.’ 라고 쓰고 있다. 따라서 세종, 정조를 비롯한 여러 왕들은 민생을 먼저 고려하여 태실이나 산릉(왕릉을 비롯한 왕실의 능) 조성을 하였다. 땅은 자연지형이지만 명당은 풍수경관으로 관계를 맺는 주체들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점은 조선왕실의 풍수가 비보에서 벗어나 풍수에서 말하는 길흉의 효과를 ‘덕’과 인성으로 관장하는 내적인 장치가 되었다.

    조선왕실에서 풍수는 왕권을 강화하거나 정치권력간의 세력 다툼에 적극 활용됐다.

    조선왕실에서 실행한 궁성, 태실, 산릉의 풍수는 대규모 공사와 관리 인력이 소요되는 국가적인 대사였다. 특히 산릉은 자리 선정과 시설 조성에 있어 정치권력과 깊은 연관성을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조선왕실에서 풍수를 실천한 것은 그 결과로서 기대하는 풍수적 소응과 효과만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풍수 행위는 왕권을 강화하고 드러내는 정치사회적인 수단으로도 적극 활용됐다. 국왕은 궁성과 태실, 산릉의 풍수 입지와 경관 조성을 통치자의 절대적인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썼다. 산릉의 입지선정과 이장과정을 둘러싼 치열한 쟁론은 각 정치세력 간에 벌이는 주도권 다툼이자 경합이기도 했다. 선조 당시에, “모두들 선왕조 때 간신들이 산릉의 일을 가지고 죄를 얽어 살육한 것만을 생각했다.(『선조실록』, 33년 9월 2일)”라고 통탄한 사관(士官)의 표현은, 산릉의 일이 왕실에서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해준다. 이렇듯 능의 풍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세력간의 다툼은 조선왕실 풍수정치의 독특한 한 면이다.

    ● 조선왕실은 산줄기의 주맥 파악과 보전을 중시하며
    궁성풍수, 태실풍수, 산릉풍수 세 가지 유형으로 구성하였다

    조선전기에는 명당풍수론을 엄밀하게 실천했으며 국가대사로 한양 천도를 통해 궁성의 터잡기와 풍수비보, 태실 조성을 하였다. 조선왕조 초기에 한양 천도를 통한 왕도계획과 궁궐 조성과정에 풍수사상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다. 태실풍수는 조선왕조 초기에는 비중이 컸으나 중후기로 갈수록 가치와 위상이 약화되었다. 왕릉을 비롯한 산릉의 조성과 관리는 여전히 명당풍수론에 따라 이루어졌다.
    “우리 조상께서는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데에 지리를 살펴서 정하시고, 백성들의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에도 반드시 산수의 지형을 보게 하였으니, 지리가 세상에 유행된 것은 예전부터였다. (『세종실록』, 15년 7월 15일)”

    새도읍지 선정과 도성공간 조성을 위한 궁성풍수

    조선왕조의 궁성풍수는 고려왕조와 비교했을 때 지리지식과 국토에 대한 인식의 발전, 유교사상의 인문적 합리주의, 정교해진 풍수이론으로 인해 당시의 사회문화적 여러 조건과 연동되어 있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한양천도는 풍수가 국토환경계획에 대한 인식의 틀로서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또한 계룡산 도읍지를 반대를 한 하륜 같은 조선의 공간정책을 주도했던 신하들도 국토에 대한 지리적 인식과 풍수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균형적으로 겸비해야 했다. 풍수담론은 새도읍지의 풍수입지와 경복궁의 주산과 명당 논쟁, 창경궁 뒷길 폐쇄와 청계천 명당수 준설 논의 등 다양한 정책적 논쟁을 유발하기도 했다.
    한양을 도읍지로 정해진 다음 도성공간은 세종, 문종, 세조를 거쳐 성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전기에 경관을 완성하기 위해 궁궐로 이르는 주맥의 산줄기 비보와 궁성의 사방산과 장풍비보, 물줄기 비보가 집중되었다. 특히 경복궁터가 지닌 풍수상의 결점인 물부족이 명당수 문제로 지적되어 궁성 주위에 못을 파고 도랑을 내서 물길을 끌어 내는 시도를 했다. 청계천 명당수의 정화문제 역시 한양의 물길 비보로서 맑은 하천 유지를 위해 풍수적인 해결책을 마련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조선왕조의 궁궐의 조성동기와 입지, 경관과 배치 그리고 조경 등에 풍수와 관련된 내용을 북궐이자 법궁(法宮) 혹은 정궁(正宮)인 경복궁,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 서궐인 경희궁(경덕궁), 인경궁, 덕수궁(경운궁) 등 총 6대 궁궐의 특징을 답사와 사료를 통해 설명해냈다.

    새 생명 탄생의 뿌리를 보전하고 축원을 담은 태실풍수

    현대에도 아이가 태어나면 제대혈을 보관하지만 전통시대에는 태를 새 생명의 뿌리로 소중하게 다뤘다. 고려에 이어 조선의 왕실에서도 풍수 길지에 태실을 조성하여 특별 관리를 했는데 조선왕실의 출산문화이자 풍수문화이다. 태를 묻는 곳을 태실이라고 하며 장차 왕이 될 왕세자나 왕세손의 태는 태실에 보관하고 왕이 된 다음 태봉이라고 하여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이 태실풍수는 신라 때 김유신의 태를 묻은 태실을 태령산이라고 한 기록을 미루어 보아 신라와 고려 사이에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중국과 일본 왕실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문화이다. 조선 왕실의 태실은 총 143개소가 파악되었는데,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하고 각 도에 분포한다. 대부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성종 대 이후로는 경기도와 강원도에도 태실을 조성했고 황해도 지역에도 있었다. 지역적으로는 경상도가 32%로 가장 많고, 경기도 25%, 충청도 16%의 순으로 나타났다. 조선국왕의 태실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22기가 남아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태실풍수의 인식과 제도적 규정, 절차와 의례, 관리, 기록에 관한 내용을 조선왕조실록 등 고문헌과 위성사진 고지도 현장답사 사진을 통해 태실지 입지를 조감할 수 있도록 했다.

    영속의 공간이자 왕실 권위의 표상 산릉풍수

    산릉(山陵)이라는 말은 조선왕실에서 왕과 왕비의 능을 합쳐서 부른 공식적인 용어이다. 산지에 입지한 능이라는 지리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조선왕릉은 풍수 원리로 능자리를 정하고 격식을 갖추어 경관을 구성하고 제도적으로 관리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여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왕릉은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북동쪽과 북서쪽 권역에 32기가 모여 있다. 한강은 교통의 장애물이었기에 강 너머는 입지의 제한 요인이었다. 한강 남쪽에는 7기의 왕릉만 있다. 산릉에 행차하거나 관리하는 데 있어 왕궁에서의 지리적 접근성이 중요했다.
    조선왕실에서는 산릉풍수를 정치적 권위를 높이는 상징수단으로 활용하였으며 유교의 효 관념과 연관되어 있다. 또한 풍수정치의 핵심이라 할 만큼 왕릉은 단순한 왕실의 무덤을 넘어 조선의 왕과 왕실, 왕과 신하, 종친과 신하 등 정치권력간의 역학관계가 투영된 경관으로 조성되었다.
    조선왕실의 국가예식에 관한 규정인 『국조오례의』 에는 왕릉의 축조와 사후관리는 풍수의 원리로 이루어짐을 기록해두었다. 왕릉의 축조과정은 산릉도감에서 주관했으며 능자리를 검토 후 산론(山論)으로 풍수적 견해를 국왕에게 보고했으며 조성일지를 남겼다. 산론에는 대상지역의 검토일, 참여인물, 평가, 풍수적 특징 등이 기록되었으며 조선왕실은 산릉의 그림지도인 산릉도도 남겼다.
    조선왕실의 무덤은 총 119기 이며 42기는 능 42기, 원13기, 묘 64기가 있다. 이 책에서는 4기의 추존 능과 연산군, 광해군 포함 능 44기를 분석하였다. 조선왕릉의 풍수 관련 사실과 개요, 왕력, 실록의 기록, 능의 조성과 이장기록 후대의 풍수적 관리를 정리해냈다.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능의 위치와 능의 현재위치 비교, 위성사진으로 본 조성입지, 능의 형태와 배치, 능의 풍수적 산줄기 입지에 초점을 두고 능의 풍수에 관한 상소와 논쟁, 이장을 둘러싼 정치적 의미 등을 다루었으며 함께 저자의 견해와 답사 소회도 덧붙였다.

    ● 조선왕실 풍수의 사회문화적 순기능과 역기능

    긍정적인 역할을 평가하면, 도성과 궁궐의 환경계획과 경관관리에 풍수는 지속가능한 지침으로 작용했다. 길지에 태실을 조성함으로써 생명의 고귀함과 가치를 높였다. 산릉 조성을 통한 죽음의 존엄과 영속의 바람은 의례뿐만이 아니라 장소미학을 통해서도 철저히 구현됐다.
    왕실풍수의 사회적인 역기능도 적지 않았다. 풍수에 대한 맹신과 길지에 대한 집착으로 태실과 산릉, 궁궐을 무리하게 조성하거나 중건한 적도 많았다. 여러 차례의 능자리 이장은 왕실의 재정을 파탄 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노역을 강제해 피폐하게 했다. 산릉의 이장을 둘러싸고 세력 간의 정쟁이나 권력 암투의 수단으로 풍수가 악용되기도 했다. 고려왕실은 과다한 사찰 조성에 왕조가 기울었고, 조선왕실은 지나친 산릉 조성에 국력을 소모했다.

    ● 일제에 의한 태실지와 태봉의 훼손과 개발에 의한 원형 상실

    조선왕조의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파헤쳐 강제적으로 옮겨지면서 원형을 잃었다. 일제는 1929년에 태실 54기를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 구석에 공원묘지처럼 집단으로 모아두었다. 태실명당에는 지역 권력자와 친일파들이 선조의 묘로 썼다. 그래서 조선왕실의 태봉 유적지는 대부분 텅 비어 있고 사묘가 들어서 있다. 특히 현종의 태실지는 개발공사로 봉우리가 깎여 나갔으며 숙종의 태실지는 일제강점기에 훼손 후 태실비 등 석물은 흩어지고 민간인 묘가 들어섰다. 순종의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어 방치되다가 태실지가 있던 태봉산 마저 공장지로 개발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근래 들어 지자체에서 태실을 복원하는 곳도 있지만 훼손되고 사라진 곳이 많다. 우리 전통 문화재의 장소적, 경관적 가치를 재평가해야 할 이유이다.

    ● 우리나라와 동아시아 풍수문화 연구의 외길을 걸어온 저자 최원석교수

    조선왕실의 풍수문화사를 궁성, 태실, 산릉을 통해 정리해낸 저자 최원석 교수는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의 풍수문화 연구의 외길을 걸어왔다. 저자는 조선시대에 풍수가를 지칭하는 산가(山家)를 자처하되 풍수연구자로서 조선왕실의 풍수인식과 정치적 의미를 역사문화사적 관점에서 분석해냈다. 특히 고려왕조의 불교적 기조에서 실천된 비보풍수에서 유교적 기조에서 실천된 조선왕조의 인성풍수로 전개되어 온 과정을 깊이 살펴보았다. 조선왕조가 풍수적 길흉의 효과를 관장하는 ‘덕’이라는 인성의 내적 장치를 마련해온 과정을 문헌과 현장을 통시적으로 고찰하여 조선왕실의 풍수문화의 정체와 특징을 정리해냈다. 저자는 조선왕실의 풍수문화의 사상적, 이론적, 사회적, 심미적인 특색은 각각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인성풍수의 윤리와 사상, 명당풍수론의 실천과 산줄기 풍수, 풍수담론의 사회정치, 풍수경관의 자연미학이다. 또한 저자는 중국에서 도입된 풍수가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 독자적으로 발전한 한국 풍수문화 연구에 더욱 정진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풍수인식이 자연경관의 이해와 공간미학에 대한 동아시아적 가치로서 자리매김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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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25] 고려왕조에서는 풍수도참이 지배층과 지식인 엘리트에 영향력을 크게 미쳤다. 풍수 과거 시험과목도 도참서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불교사상이 포함된 비보풍수도 널리 성행했다. 하지만 조선왕조는 불교적인 비보풍수와 예언적 인 도참사상을 배제했다. 조선 초기를 제외하면 도참을 떼어낸 풍수지리만 논의했다. 풍수 논리에 준거한 비보만 궁성과 산릉 등의 경관조성에 실행하였다. 유교적인 인본주의와 합리주의 이념으로 지침을 삼았기 때문이었다.
    [P. 78] 개성으로 돌아가기를 결정한 이튿날(8월 13일), 도중에 남경에 들른 태조는 신하들과 남경 옛 궁궐터의 풍수지리를 살피게 된다. 이때 이미 태조는 마음속으로 남경을 천도지로 작심했던 것 같다. 태조는 신하들과 형식적이나마 논의를 거쳐, 한양이 지닌 몇 가지 결점을 수용하면서도 전격적으로 한양을 조선왕조의 신도로 결정했다. 이런 판단과 결정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었을까? 미적미적한 여러 신료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었을까?
    [P. 114] 『태조실록』의 내용 중에서 몇 가지 사항을 고찰해보자. 우선 경복궁터는 남경(한양)의 궁궐터 남쪽에 자리 잡았음이 확인된다. 태조 대에 중신들 이 조선왕조의 궁궐터를 옛 남경의 남쪽으로 정했다고 했다. 그 이유는 남경터의 규모가 좁았기 때문이었다. 옛 고려의 남경터는 지금에 어디쯤일까? 경복궁의 북쪽에 있었고 좁은 규모라고 했으니, 현재의 청와대가 자리 잡은 구역으로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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