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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발간사 / 이상배

목차

총설 / 류상진 7

"신발을 보면 신는 사람의 성격도 알 수 있어요" / 박해권 17

어린 시절 18

고향 양화점에서의 견습 생활 18

서울 상경과 구둣방 취직 23

양화점 개업과 위기 25

화교를 통한 중국 수출과 중국 구두 업계의 성장 27

댄스화로 눈을 돌리다.직접 춤을 배워가며 개발한 대스화 31

장인의 주업이 된 수선업 33

구두 업계의 현실과 협동조합에 대한 기대 36

"수제화로 만들면 첫째로 튼튼하고 편하죠" / 조동희 39

서울로 올라와 구두일을 시작하다 40

견습생 시절의 보조 작업, 퇴근 후에는 미싱 연습 43

브라보제화의 '선생'으로 가다 46

제갑과 저부, 구두일의 분담 구조 49

도급제, 만드는 켤레에 따라 돈을 받는 문화 52

염천교, 봉천동, 합정동의 여려 제화 공장들 58

염천교 파피제화에서의 호경기와 공장 부도 60

기술자로서의 자부심, 그렇지만 지금은 배우려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어 63

기성화가 못 따라가는 댄스화로 눈을 돌리다. 64

장인이 보는 수제화 산업의 미래 65

"패턴사라면 어떤 디자인을 갖다 주더라도 만들 수 있어야죠" / 전기태 69

상고 졸업, 산업은행 지점 취업, 퇴직 후 구두를 만나다. 70

사장님의 권유로 패턴사의 길로 들어서다 71

힘들었던 패턴사의 길, 동료들의 시기와 질투로 손가락을 자르기도 74

100명 중에 1명이 패턴사로, 피나는 노력을 해야 76

상경, 염천교에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다. 78

토탈패션 메르꼴레디 실장으로 선택받다. 82

한국 최고의 구두 브랜드 금강제화 실장(패턴사)이 되다 83

디자인 실장이란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나? 86

신발의 모든 측면을 완벽하게 다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87

외국 장인들의 수재화 샵, 우리나라도 그런 성공이 가능하다 90

"염천교 신발은 부산에서도 가져갔어요" / 정상만 93

광주에서 시작한 구두일 94

20대 초반에 면소재지 양화점의 사장이 되다. 97

제1차 석유파동으로 고향 양화점을 접고 서울로 상경 99

구두일을 접고 보일러 설비업에 종사하기도 102

1984년 염천교에서 구두공장을 시작하다 103

2002년 월드컵을 겨냥해서 만든 축구공 구두 110

구두 장인들의 사승 관계 112

"저는 깔창에 중점을 뒀어요. 사람들이 저보고 '발바닥 의사'래요" / 고기황 113

전국을 누비며 도장을 파서 자수성가한 부친, 농지개혁 때 가졌던 땅을 잃어 114

만들기를 좋아했던 소년, 환등기를 만들어 버려진 필름으로 영화놀이도 117

대전에서 구두 일을 배우기 시작하다 119

구두를 더 배우기 위해 상경하다 121

서울의 구두 일자리는 호황, 기술자는 아무데나 갈 수 있었다 123

효율적인 창 작업을 위한 기술 개발 124

20대 후반에 들어온 염천교, 경기가 좋았던 그때 그시절 126

염천교에서 연구한 등산화로 승부를 보다 128

장인 정신, 손님의 발만 생각한다. 나는야'발바닥 의사' 131

제화 기술은 평생 배워도 부족하다. 장인 정신이 필요한 길 134

"염천교는 엄청나게 바빴어요. 밤 새다시피 했죠" / 권혁남 137

어린 시절과 매형 가게에서 배웠던 이야기 138

공인중개사 시험 도전과 1970~1980년대의 염천교 호황 142

중국 수출과 염천교에서의 일화 145

장인의 철학과 '오쏘코리아'라는 이름의 연원 146

구두 기술 전수 방식 150

도급제의 문제 151

한국 기술자들의 일본 진출 일화 152

중국으로의 기술 이전 문제 154

도급제로 인한 장인들의 건강 문제 155

가죽공예를 접한 중학생들의 긍정적 변화 157

"염천교는 합성피혁이 거의 다 지배를 했어요" / 김영배 159

기술 배우려고 17살에 무작정 상경하다 160

이태원 누님 옆집의 소개로 구드일을 시작하다 162

기술을 배우려면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163

지방 양화점으로 초빙, 최고 기술자로 대접받다 164

기술을 가르쳐준 스승 166

1년에 세번도 이동, 기술자 스카웃 경쟁 167

합성피혁이 유행하면서 명동 살롱화가 자존심과 함께 죽어버렸다 169

염천교 합성피혁으로 전선기, 구두 공장을 시작하다 170

성공비결이 된 '만만이 부츠'와 '멍청이 샌들' 172

구두공장 운영과 도소매 유통 대한 생각 173

일본도 기술 전승 힘들어, 자체 명품 못 만들어냈다 175

개성공단에서 실험한 수제화 사업 176

이제는 중국도 나름 기술 축적이 돼 있다 177

염천교 구두 산업의 역사성 178

수제화 만드는 데 여성들의 역할, 재단사들은 여자 179

"맞춤깔창은 본인 발을 찍어야 하니까 중국 제품이 안 통하죠" / 안효성 181

경찰공무원이었던 부친의 시련과 어려웠던 어린 시절 182

부친의 귀농, 야간 중학교 입학, 다시 서울로 185

마크 크로바제화에서 구두일을 처음 배우다 186

연탄창고를 빌려서 구두공장을 차리다 189

김일성의 구두와 말안장을 만들었다는 김병근 장인에 대한 추억 190

견습생 시절의 기억 192

한국 제화업과 일본의 영향 197

잘 나가는 청년 사업가 시절, 부산 출장과 결혼 198

튼튼한 신발 만들기에 주력하다 201

인생 최대의 위기, 홈쇼핑의 '갑질' 202

맞춤깔창을 통해 재기를 꿈꾸다 205

"구두는 사람 손이 들어가야 돼요" / 박재영 207

광주 고모부 양화점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구두 208

서울로 올라온 시절, 크게 유행했던 해군 단화 210

휴전 후 부산 남포동에서 일했던 일화 214

나주 양화점을 개업했던 일화 216

최전방 문산에서 일하며 만난 미군과 '양색시' 217

사람들로 붐볐던 당시의 염천교 구두가게 222

수제화 전통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 224

구두 장인의 자부심 225

"여화는 예술, 남화 노동력이라고 하죠" / 이금채 227

영화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 228

서울 상경, 남영동에서 하견습으로 구두일을 시작하다. 229

제화공 문화와 급여 체계 233

20대 초반 아현동에 가게를 내다 235

아현동 가게 폐업 이후 이대'분홍신'까지 237

이대 분홍신을 정리한 후 고깃집을 시작하다가 IMF를 맞다. 239

염천교로의 정착 241

도매 위주의 염천교 242

구두 업계의 열악한 처우와 그 이유 244

구두 장인의 기술과 디자인 245

판권기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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