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국회도서관 홈으로 정보검색 소장정보 검색

목차보기


시인의 말 5

1부 생목의 기억법

입추立秋12
도마의 길13
드라이플라워 15
레미콘 17
생목의 기억법18
석류나무 정거장20
신탄진 졸음쉼터21
열무물김치 23
얼굴 25
중심의 기울기27
호수 의자 28
감感에 관하여29
개구리참외 경매작전30
마개 빠진 소리32
배꼽 33
벼랑의 언덕34
빗방울 대관식36
기상도 37
술의 계급사39
어판장에서 41

2부 회전목마

투명한 연대44
가을, 그 두 얼굴에 대하여 45
감정의 회로46
개화리에서 47
고드름 당신48
망치 49
맹물 50
멍 51
옹이의 눈52
틈 53
회전목마 55
엄마 56
꽃들의 전쟁57
단추의 수사학58
대나무 수도승59
물의 장례 60
박주가리 61
손바닥 62
신 63
파리의 경전64






3부 빗방울 조문객

한 수의 패68
그림자 그늘69
흔적 70
수염 71
염탐 72
대추나무의 저녁73
먼지 74
허공의 발자국75
빗방울 조문객76
월력月曆78
화살표 79
질주에 대한 편견80
그릇 81
파리채 82
기일忌日 -초를 불 켜다84
문제들 85
인류사 86
운명 -산란産卵, 혹은 난산難産 사이의 모래87
모처某處럼89
고구마 91

소품 93
입술 94
바다를 읽다95
구름의 노래96
늙은 시계 수리공97
솜이불 99
배반 100
일기를 지우다101
잠 많은 만화가 102

해설삶의 변곡점에서 발아한 사유
-최병근 시인의 시 읽기최 준104
최병근 론먼지 하나의 철학반경환116

이용현황보기

먼지 : 최병근 시집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0002879846 811.15 -22-1026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0002879847 811.15 -22-1026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출판사 책소개

알라딘제공
최병근 시집 {먼지}는 그의 세 번째 시집이며, {먼지}는 존재에 대한, 그리고 생에 대한 자각의 시편들로 채워져 있다. 먼지 하나의 철학은 짧고 곧고, 먼지 하나의 철학은 찰나의 빛이다. 최병근 시인의 '먼지 하나의 철학'은 그의 행복론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오랜 기간 수도했다고/ 다 도승道僧은 아니다// 짧은 도행道行에도 반질하고 곧게 길들여져/
정정히 살아가는 수도자가 있다// 한 마디 두 마디 쌓아 올린 빈 집 같은
― 「대나무 수도승」 전문

한 편의 선시를 마주하는 느낌이다. 시인은 대나무를 수도승과 맞댄다. 사군자의 하나인 대나무는 그 꼿꼿한 모양새로 선비의 기개, 혹은 절개에 흔히 비유된다. 비바람에 휘어져도 부러지지는 않고 온갖 풍상으로부터 끝내 살아남는다. 어쩌면 시인은 자신의 생이 대나무와 같다고 여기는지 모르겠다. 시인의 사유대로 물리적인 시간이 중요한가.
깨달음은 시간과는 무관한 것일 수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사유가 저절로 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시인이 말한다. 대나무는 시인의 삶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대상일 듯도 하다. 돈오頓悟는 세속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지우는 일에 다름 아니다. 허무주의와는 완연히 다르다. 시인은 대나무를 보며 어떤 깨달음에 도달했을까.
대나무와 수도승을 겹쳐놓고 보면 여기엔 묘한 접점 하나가 생겨난다. 모든 욕망을 비워버린 텅 빈 공간 하나. 깨달음에 이른 수도자는 마음을 비운 사람이다. 세속적인 욕망이 도사리고 있던 자리를 말끔하게 지워냈다. 대나무도 다르지 않다. 수도자처럼 속이 비어 있다. “한 마디 두 마디 쌓아 올린 빈 집 같은” 것이다.
시의 마지막 연은 수도자와 대나무를 하나로 겹쳤다. “쌓아 올린”이란 정진의 시간이겠지만 상대적인 시간이 아니다. 시인은 “한 마디 두 마디”라는 깨달음의 과정을 대나무에서 발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결심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만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게 가능한 노릇인가. 시인은 삶의 여정에서 이러한 깨달음에 도달한 듯하다. 이 또한 일상을 열심히 살아낸 용맹정진의 결과가 아닐까.

길을 잃어버린 신 하나가/ 발의 기억을 껴안은 채 버려져 있다// 누군가의 발을 마지막까지 섬겨왔을 신/ 닳고 낡아 기울어진 뒤축으로// 신과 발이 서로의 뒷모습을 아무리 베껴도/
균형 잡지 못해 버림받은 신// 마지막 발의 중심을 끝내 놓지 못하고/ 구멍마다 단단한 줄에 묶여 있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오, 바닥만을 끌어안은 가련한 신
― 「신」 전문

누군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타인의 생의 여정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 이름만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있을 테고 이런 저런 관계로 맺어진 오랜 지기들도 있을 테고 태생적인 혈연도 있을 테다. 우리는 애초부터 우리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었다. 시인의 전언대로 저마다 버려진 “신”과 같은 존재였다. “신”이 곧 신발의 주인이었음을 주지하는 시인의 인식은 생의 여정이 발에 묶여 있는 “신”에 다름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신”의 주인은 누구였던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는 한 때 “신”의 주인이었을 테지만 그 주인은 용도폐기 된 “신”을 버렸다. 그리고 그 “신”의 주인은 “신”을 만든 우리 모두이다. “여정”에서 버려지는 것을 “신”이라 하지만 기실은 그 “신”이 곧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신” 이야기는 고스란히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 우리도 언젠가는 용도폐기 된다. 부지런히 세상을 살아가지만 닳고 낡아지지 않는가. 결국은 “바닥만을 끌어안은 가련한” 존재라는 시인의 인생론적인 깨달음이 “신”에 배어 있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이 지점에서 “신”은 은유화 된다. 다시 음미해보면 종교적인 “신”으로도 읽힌다. 결론은 이러하다. 우리는 “신”을 만들고 필요성에 따라 이용하다가 용도폐기 해버린다. 희망이었다가 절망이 되어버린 불쌍하고 가련한 “신”. 우리의 운명도 “신”과 같은가?

오랜 기간 수도했다고/ 다 도승道僧은 아니다// 짧은 도행道行에도 반질하고 곧게 길들여져/ 정정히 살아가는 수도자가 있다// 한 마디 두 마디 쌓아 올린 빈 집 같은
----[대나무 수도승] 전문

그렇다. “오래 기간 수도했다고/ 다 도승은 아니다/ 짧은 도행道行에도 반질하고 곧게 길들여져/ 정정히 살아가는 수도자가 있다// 한 마디 두 마디 쌓아 올린 빈 집 같은”----. 자기 자신의 목숨이 먼지와 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부자에게 아첨할 일도 없고, 최고의 권력자에게 굴복할 일도 없으며, 어떤 미인들 앞에서도 음탕해질 이유가 없다. 짧고 곧고, 짧고 굵은 대나무같은 ‘도승의 시학’ 속에 자기 자신의 사상과 이론으로 자기 자신만의 행복을 연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둠의 그늘에서 잠자던// 뿌리도 없이 자라난 너는// 어디서 왔을까// 저 침묵은 어느 전생인가// 현생은 찰나의 빛이라고// 아침마다 눈을 뜬다// 창틈으로 새어든 햇살로 바라본다// 내 이름 새긴 먼지 하나
----[먼지] 전문

최병근 시인은 2020년 {애지}로 등단했고, {바람의 지휘자}와 {말의 활주로}의 시집을 출간했으며, [먼지]는 그의 세번 째 시집의 표제시가 된다. “어둠의 그늘에서 잠자던/ 뿌리도 없이 자라난 너는/ 어디서 왔을까”는 그의 뿌리에 대한 물음이 되고, “현생은 찰나의 빛이라고/ 아침마다 눈을 뜬다”는 그 존재론적 성찰에 대한 답이 되고, 마침내, 그 존재론적 성찰 끝에 “내 이름 새긴 먼지 하나”를 창출해내게 된다. 최병근 시인은 언어의 사제로서 오랜 기간 동안 말과 말의 활주로를 비행해 왔던 것이며, 마침내, 그 비행 끝에 “내 이름 새긴 먼지 하나”를 창출해내게 되었던 것이다. 먼지 하나는 그의 혹이고 명예이며, 먼지 하나는 그의 인생이고 행복이다. 먼지 하나로 자기 자신을 불태우고, 먼지 하나로 자기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먼지 하나로 모든 욕망을 다 비우고 돌아갈 것이다. 먼지 하나의 철학은 찰나의 빛이고, 이 찰나의 빛은 영원할 것이다.
먼지 하나의 철학은 짧고 곧고, 먼지 하나의 철학은 찰나의 빛이다.
최병근 시인의 '먼지 하나의 철학'은 그의 행복론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