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국회도서관 홈으로 정보검색 소장정보 검색

목차보기


[들어가며] 배제된 3·1운동의 여성사적 의미

1장 여자대학이 된 민족성지 태화관

01. 고증 부족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민족의 심장에 일제 상징 박아 넣은 서울시 | ‘그때그때 달라요’ 역사관, 재귀적 좌파 이벤트 | ▶“3·1운동 기생 사진은 본래 여학생 사진”

02. 여성해방 상징하는 3·1운동 공간
외신들도 주목한 소녀들의 항쟁 | 태화관서 시작된 천지개벽, 여성참정권 획득 | ▶최초의 여성들, 잊힌 여성들의 비극

03. 3·1정신 이어받아 탄생한 성신여대
1886년 추정되는 태화의 뿌리 ‘성경학교’ | 하나의 조상, 여러 갈래로 뻗은 여성교육 | 여자대학들의 설립과 전통, 학원분규 | ▶첫 번째 ‘근대 여성전문직’ 전도부인

04. 확장되는 역사, 보이지 않는 전쟁
역사 확장성 놓고 기억투쟁하는 대학들 | 성신여대의 잃어버린 15년 ‘태화’

2장 3·1독립정신의 장소성 계승한 ‘적자’

01. 선구여성의 일터, 여성운동의 요람
민족성지 태화관의 여성해방 상징성 | 구여성도 신여성으로, 교사가 되다 | 모자보건의 시작, 여의사·간호사·산파 | ▶여자성인교육 선도, 태화여자관

02. 한양 중심석 있던 북촌의 갑제
권문세가들의 갑제에서 순화궁터로 | 조선왕실의 명당에서 친일파 소유로

03. 3·1독립선언식 전후의 태화정
독립운동 건축가 재건축, 재개발로 사라져 | ▶한국 최초의 여성전용 도서관

04. 3·1정신 간직한 천도교 중앙총부
천도교기념관에서 개교한 성신 | 성신이 거쳤던 역사적 장소들 | 태화의 기독교정신과 성신의 건학이념

3장 서울여학생운동으로 발화한 성평등교육

01. 각성한 여학생들의 자발적 향학열
맹휴의 시대, 자주성 외친 여학생들 | 교육받은 여성의 임무, 농촌계몽운동 | ▶태화여학교 재학생들의 면면 | ▶학생들의 신망받은 장귀련 교사

02. 양성평등 여성교육·여권신장에 솔선
여선교사들의 페미니즘 사상과 한계

03. 태화여학교생 8명, 독립운동가 서훈
만세운동 태화여학교생 경·검 신문조서 | 6·10만세운동에 고초 겪은 태화여학교 | ▶광주학생운동 ‘여학도 투쟁기’ | ▶한 집안 이중포상의 문제

04. 태화 승계 성신의 혁신·여성연대
태화와 성신의 공통점과 차이점 | 여학교·여자대학은 왜 존재하는가 | ▶여자팀 감독은 여자선수 출신으로 | ▶성신여학교 출신의 성평등 공헌

4장 여성계에 기여한 태화·성신의 인물들

01. 한국 땅에 헌신한 여성 선교사들
한국 관련 소설과 저작 남긴 와그너 | 격동의 한국근현대사에 휘말린 여선교사

02. 가정법 개정 앞장선 여권운동가 이숙종
이숙종의 성장환경, 미술가로서의 면모 | 언론에 비친 이숙종의 페미니즘과 부일 | ▶서울시내 사립여학교 교장 모임, 구인회

03. ‘여권통문’ 발굴, 박용옥 성신여대 교수
한국여성의 자생적 근대화 조명 | 식민사학 벗어난 주체적 여성사관

04. 북유럽 설립 국립의료원간호대 승계
태화, NMC, 성신으로 이어진 간호 역사 | 4·19혁명 총상 학생들의 치료 거점 | ▶언론에 비친 간호대학

[나오면서] 한 세기라는 시간, 그리고 한 개인의 염원

이용현황보기

3·1 민족성지 태화관은 어떻게 여대가 됐나 : 여성공간의 상징 태화여자관 101주년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0002910279 305.40951 -22-7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0002910280 305.40951 -22-7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B000054233 305.40951 -22-7 부산관 주제자료실(2층) 이용가능

출판사 책소개

알라딘제공
3·1운동 발상지 태화관에서 탄생한 태화여자관 101주년 기념도서
태화관에서 탄생한 태화여학교가 성신여대로 발전한 전과정 추적


올해도 격동의 근대사를 상징하는 여러 사건들이 한 세기를 기념했다. 2019년 한민족 전반에게 ‘근대’를 깨우친 3·1운동이 100주년이 맞은 이래로, 2022년 3·1운동의 수장으로 지목됐던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 순국 100주기가 도래했다. 손병희의 사위 방정환이 제정한 어린이날이 100년이 됐다. 돈암동을 배경으로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 조각가 권진규를 비롯 김수환 추기경, 소설가 선우휘와 손창섭, 시인 김춘수, 건축가 김중업 등이 탄생 100년을 맞이했다. 한 세기 전 이 땅은 오늘날 삶의 모습을 탄생시킨 ‘근대’가 발화하는 혼돈과 창조의 시간이었다. 그 누구보다 세상의 절반, 여성들에게 닥친 급격한 변화는 반만년 한반도 역사에서 ‘최초’라 할 만한 일들을 만들어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해 획득한 여성참정권은 ‘남녀동권’이 제도적으로 인정받은 일대 개혁이었고, 여학교/여학생의 등장은 여성에게 공적교육이 작용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최근 세계적 주목을 받은 애플TV+ 드라마 ‘파친코’는 이 시기 한국여성의 삶을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여주인공 선자의 서툰 젓가락질이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대개의 여성들에게는 밥상에 제대로 앉아 젓가락을 사용하는 법조차 가르치지 않는 시대였다. 남성의 부속물처럼 여겨지던 여성이 하나의 인격으로 재탄생하며 스스로 삶을 개척하게 된 데는 여성에게 행해진 최초의 제도권 교육과 그 여파가 절대적이었다. 신간 ‘3·1 민족성지 태화관은 어떻게 여대가 됐나 ; 여성공간의 상징 태화여자관 101주년’은 한 여자대학의 묻혀버린 근원을 파헤치며 한국 여성교육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훑어 내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를 통해 아카데미가 시대와 어떻게 긴밀히 조응하는 지에 대한 통찰을 병행하고 있다. 또 여대의 존치를 두고 꾸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시대, 아직 150년도 채우지 못한 여성교육 의의와 여권의 위상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하는 부수적 효과까지 불러일으킨다.
3·1운동 발상지 태화관에서 탄생한 태화여자관이 101주년을 맞은 2022년, 작가는 3·1운동이 한국여성의 삶과 여성사에 미친 혁명적 영향력을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태화관을 조명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서 탄생한 태화여학교가 국내 굴지의 여자대학인 성신여대로 발전한 사실을 재발굴하고, 이 장소에서 어떻게 한국여성운동의 초석이 다져졌는지를 집중적으로 추적한다. 더 나아가 개신교 첫 여성선교사가 입국한 1886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여성의 공교육과 전문직업이 생긴 연원까지 헤집어내며 ‘연혁 복원’을 강력히 설파해낸다.
‘여성사가 여성이 받아야 할 권위를 되찾아준다고 확신’했던 ‘한국 최초 민간신문사 여기자 최은희’를 기리며 시작하는 이 책은 후배 여기자가 부르는 송가이기도 하다. 최은희로 시작, 김마리아, 이각경, 이숙종, 정종명, 한윤명, 이금전, 한신광, 유영준, 서대인, 앤 월리스 서 등 희미해지거나 아예 잊힌 수많은 여성인물들을 호명하며 여권을 이끌어온 진보적 여성상의 계보를 그려낸다. 동시에 주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당대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신문보도상의 에피소드와 사진들도 꼼꼼히 펼쳐놓아 대중서로 읽기에도 무리가 없다.
단락 하나하나를 독립된 기사로 풀어내도 될 만큼 문제의식과 자료조사가 철저한 것은 기자 출신 작가가 보여주는 최장점이다. ‘태화관’의 한자표기에 대한 문제제기와 같은 것들은 지금까지의 역사연구가 얼마나 상투적이고 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역사를 역사책 속에만 가두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지는 대목들이다. 역사의 현재성을 각인시키는 방법으로서 장소성에 천착한 것도 최신 흐름에 걸 맞는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도구로서 장소의 의미를 확장시키며, 왜 태화관이 여성의 공간이 돼야하는지를 주장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며 존폐여부를 놓고 떠들썩한 여성가족부, 또 여성부가 2024년 개관을 목표로 추진 중이던 국립여성사박물관의 존립 방안으로까지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여성사적 의미로 새롭게 다뤄야할 3·1운동과 태화관

남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역사서술에 공을 들여왔다면 여성의 역사는 개별, 파편화되기 일쑤였다. 이 책은 한 여자대학의 뿌리를 찾아올라가며 이를 통해 한국여성의 근대화와 여권운동의 역사를 아우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여대는 여성의 영역에서 이뤄지던 일들의 연장선상에서 발전해왔다는 점에서 하나의 세계(universe, university)를 이루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국최초의 여권선언문도 1898년 ‘여학교설시통문’으로 시작됐을 만큼 여성교육에 대한 요구가 자생적 여성운동의 시작이었다. 항일독립운동과 궤를 같이 해온 한국여성운동은 전 민족적 혁명이라 할 수 있는 3·1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게 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여성참정권을 획득하고, 독립선언식이 이뤄진 ‘3·1운동의 발상지’ 태화관이 여성을 위한 교육·복지기관인 ‘태화여자관’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태화여자관을 배경으로 탄생, ‘여성의 지위 향상’를 노린 좌우합작 여성단체 근우회는 1930년 서울여학생만세운동을 주도한다. 한국여성들의 자발적 요구로 탄생한 태화여학교 역시 이 시위에 참여해 8명의 독립유공자가 추서된다. 1936년 여권운동가 이숙종에게 인계돼 성신여학교가 되고, 오늘날 최고학부 성신여대로 발전해 여성자신이 주축이 되는 학문적 공간을 이어오고 있다. 여성 주체성의 맥을 이어온 여대가 21세기 미투운동의 보루가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3·1운동100주년, 태화관에서 기려져야했던 것은 당연히 그 핵심적 결과물인 ‘여성의 권리’였다. 서울의 중심점에서 민족성전으로, 여성운동과 여성교육의 터전으로 계승돼온 장소적 상징성이 보여주는 바는 뚜렷하다. 이중삼중으로 핍박 받던 인류의 절반이 자존을 되찾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다. ‘자유, 평등, 박애’ 같은 평화적 의미를 아우르는 구호를 담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이들은 3·1운동에서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던 한 세기 전 여학생들보다도 진화하지 못했다.
한편 작가는 여성사와 여성주의를 결합한 글쓰기를 통해 여성에게 지워진 ‘공간의 불평등성’까지 논의를 확장시킨다. 시간의 연속성을 상기시키는 것은 ‘장소’라는 것을 웅변하듯, 현재에도 직관할 수 있는 역사의 숨결을 따라잡기 위한 서술을 이어간다. 여성들 사이의 유대와 그것이 만들어낸 연계를 통해 1886년 또 하나의 여자대학의 싹이 움터 오르고 있었음을 논증하며 아직까지는 왜 여학교/여대가 필요한지를 역설한다.

책속에서

알라딘제공
[P.51~52] 필자의 전작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에서도 지적했듯이 집권당의 완고하고 견고한 ‘내로남불’ 권력욕에 균열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여성들에 의한 ‘미투혁명’이었다. 이러한 여성의 힘을 잊고 있던 자칭 진보·좌파의 여성혐오는 곳곳에 드러났고, 결국 민심조차 떠나게 하는 원흉이 됐다. 태화관의 역사적 추이만 잘 살펴봐도 새롭게 ‘여성’이라는 가치를 끌어낼 수 있는 지점은 많았다. 2010년대 들어 꾸준히 재발견되고 있는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여성사적 흐름에만도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3·1운동100주년은 아주 새로운 계기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586세대의 청개구리식 방식에만 집중한 상상력의 한계는 일제잔재의 부활이라는 기괴한 기념행사를 만들어냈다. 지난 잔재의 철거도 당대 의식 속에서 국민적 합의를 거쳐 진행된 것인데 파괴와 재현을 반복하며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도, 통합된 대한민국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진영논리에 갇힌 사고다.
- ‘여성해방 상징하는 3·1운동 공간’ 중에서

[P. 58~59] 3·1운동이 가져온 가장 가시적 변화도 ‘여성’이라는 존재의 대두였다. … 여러 보도매체들에 남아있는 근대사의 증언만 봐도 역사가들에게 여성과 여성사가 얼마나 소외당하는지를 알 수 있다. 수개월간 지속된 만세운동 가운데 여성들에 의해 조직되고 주도된 평화적 행진이 많았고, 임시정부에서 여성참정권을 얻는 계기가 되지만 이에 대한 기억은 너무 쉽게 사라져버렸다. 임시정부의 적통을 계승하겠다면 한국여성의 활약상과 참정권 쟁취에 관한 부분을 반드시 한 몫으로 다뤄야할 것이다. 여성의 광범위한 독립운동은 임시정부의 여성정책에 큰 영향을 미쳐 남녀평등 방침이 제도화됐고, 여성과 여성운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에 크게 기여했다.
- ‘외신들도 주목한 소녀들의 항쟁’ 중에서
[P. 76~77] ‘남녀’가 아닌 여자를 앞에 둬 ‘여남’이라고 부른 것은 21세기 들어 탄생한 영영페미니스트(뉴페미)가 최초가 아니다.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1945년 조선부녀총동맹(총재 유영준, 부총재 정칠성·허하백)은 “봉건유제 타파해서 여남평등 이룩하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글로 남아있는 당대 여성운동가들의 주장은 여기서 일일이 다 거론하진 않겠지만, 경제적 자립과 사회적 관념 변화를 통한 남녀평등, 성과 정조의 분리 주장 등 현시대에도 진보적이라 할 만한 것들이다. 이들이 선택한 단발머리는 21세기 ‘페미니스트 숏컷 논란’처럼 여성억압에 대한 저항의 일환이었다. 여성해방론, 정조취미론, 자유연애론 등을 주장한 글을 발표해 파란을 일으켰던 나혜석은 한국최초로 ‘부모성함께쓰기’를 시도한 페미니스트라 하겠다. 1990년대 호주제에 반대한 여성운동가들이 양성쓰기를 실천하며 네 자 이름은 이 시기 한국 페미니스트들의 표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나혜석은 김우영과 결혼 후 낳은 첫딸의 이름을 김나열이라고 짓는데, ‘김우영과 나혜석의 기쁨(悅)’이라는 뜻으로 붙였다.
- ‘최초의 여성들, 잊힌 여성들의 비극’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