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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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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아버지’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전쟁을 중심으로
그리스의 도시를 비롯해 동방의 여러 나라를 조사하여 기술한
전설과 역사가 담긴 책 《역사》(상하)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였던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페르시아 전쟁을 중심으로 그리스의 여러 도시를 비롯해 동방 여러 나라의 전설과 역사가 담긴 책이다. 이 책의 상권에는 제1권부터 제4권이 수록되어 있으며, 하권에는 제5권부터 제9권 그리고 또한 〈부록〉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길이·넓이·부피·무게 등의 단위를 알 수 있는 〈그리스의 도량형〉을 수록하여 상세한 지지학적 서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책의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의 특징 중 하나는 이집트와 스키타이의 풍토 및 습속에 대한 기술 등 지지학적인 내용의 상세한 서술이 돋보인다는 것이다. 식민지 출신인 헤로도토스는 식민지적 기풍에서 유래한 자유롭고 활달한 기상과 진취적인 탐구심과 보수적인 인생관은 이 책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역사》 전편에서 신탁이나 예언이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그의 인생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 유력한 자료가 된다.
헤로도토스는 본래 지리학자에서 역사가로 변모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지리학과 민속학에 관심이 많은 밀레토스인 해카타이오스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이나 이국 풍물에 대한 역사에서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리적 조사와 역사의 기술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그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옛 전승이나 설화, 전설 등이 삽화적으로 나열되어 있는데 또한 그것이야말로 이 책의 특색이자 매력이며, 전체 뼈대를 지탱해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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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도토스의 생애
헤로도토스의 생애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극히 적다. 다만 10세기경 편찬된 것으로추정되는, 이른바 《수다(Suda)》사전(종래에는 《수이디스》라는 이름으로 북렸다)에 기술된 헤로도토스 및 그와 관련된 사항, 고대(古代) 작가들의 단편적인 언급, 그리고 그의 저작물인 《역사》자체의 기술료 미루어 대강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헤로도토스는 소아시아 남부의 도시 할리카르나소스의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의 이름은 릭세스, 어머니의 이름은 도리오였다 한다. 테오도로스라는 형제가 있었고, 또한 당시 유명한 서사시인이었던 파니아시스는 그의 종형제(從兄弟)였다 한다. 다른 전승(傳承) 에 의 하면 어머니의 이름이 로이오였다고도 하는데,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도리오의 오기(誤記) 라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파니아시스는 종형제가 아니라 숙부였다는 전승도 있다. 이 설은 물론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아지만 《수다》의 기술을 정통으로 받아들인다면 결국 종형제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할리카브나소스는 카리아 지방에 있었던 그리스의 식민 도시로, 기원전 10세기경에 그리스 본토인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아르고리스 지방의 옛 도시 트로이제으로부터 온 이주민이 건설했던 것이다. 현재는 터키 땅으모 보H룸이라 불리고 있다. 트로이젠은 도리스계 도시였기 때문에 할리카르나소스도 당연히 도리스계였지만, 일찍부터 북방의 이오니아 문화의 강한 영향하에서 이오니아화되어 있었던 듯하머 기원전 5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이오니아어로 씌어진 비문도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헤로도토스 시대에는 이미 이오니아 방언이 공통어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헤로도토스가 뒤에 서술할 사모스 망명중에 처음으로 이오니아 방언을 배웠다는《수다》의 설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의 이름인 릭세스, 종형제 또는 숙부인 파니아시스라는 이름은 명백히 그리스계가 아니라 카리아계에 속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어머니의 이름은 그것이 도리오이든 로이오이든 그리스 이름임에 틀림없고, 형제의 이름인 테오도로스, 또 헤로도토스 자신의 이름도 모두 훌륭한 그리스 이름이다. 생각건대 원주민인 카리아인의 혈통을 이은 릭세스가 그리스 계통의 여자를 아내로 맞고, 태어난 자식들에게는 그리스 계통의 이름을 지어 준 것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런 해석일 것이다. 이는 식민지에 있어서의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는데, 《수다》 사전에 ‘명문가 출신’ 이라 되어 있는 것도 반드시 귀족 계급을 의미하
는 것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종형제 또는 숙부에 해당하는 파니아시스는 당시 가장 뛰어난 서사시인으로서 그 이름을 널리 드높이던 사람으로, 오놀날에는 그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작품 이름 몇 가지는 전해지고 있다. 헤로도토스가 그 풍부한 문학적 소양을 그에게서 적지 않게 물려받았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생년월일은 자세히 알 수 없는데, 기원전 490~480년 사이라는 것이 정설에 가깝다. 이것은 그의 《역사》의 주제가 된 페르시아 전쟁이 한창이었던 때다. 보다 엄밀히 기원전 484년 설을 주창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후에 서술할 투리오이 식민의 해 (기원전 444년)에 그가 40세에 이르렀다는 가정에 바탕을 둔 것으로, 정확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여하튼 그는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기원전 484?~406년)와 거의 동년배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 할리카르나소스가 여걸로서 알려진 아르테미시아 1세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것은 《역사》의 기술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헤로도토스가 그녀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그 서술 경향으로부터 명백히 알 수 있다. 그 후 그녀의 손자(혹은 아들?)에 해당하는 리그다미스 대에 이르러 독재자 타도를 목표로 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기도는 좌절되었다. 이 와중에서 파니아시스가 목숨을 잃었고 헤로도토스도 어쩔 수 없이 사모스 섬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의 사모스 체재 기간은 상당히 길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역사》의 제3권을 비롯한 사모스에 관한 상세한 기술은 그곳에서 망명하는 동안 보고 들은 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차 시도된 반란에 의해서 리그다미스는 타도되고 할리카르나소스에는 독재정(獨裁政) 대신에 민주정이 들어섰다. 그 반란에서 헤로도토스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무엇인가 기여를 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 혁명이 일어난 연대도 명확하지 않은데, 기원전 454년에 이 도시가 델로스 동맹에 참여한 기록에 비추어 볼 때 기원전 450년대 초엽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의 긴 여행이 이 귀국 후부터 시작되어 기원전 444년경의 투리오이 이주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중 수차례에 걸쳐 계속됐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지만, 그 연대나 기간에 대한 상세한 것은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아테네에 상당히 오래 체류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아테네에 체류하는 동안 페리클레스, 소포클레스 등의 명사들과 교우관계를 맺었고 그 자신 아테네인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는 것은, 몇 가지의 전승으로부터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테네는 그의 저술을 위한 자료 수집에도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지만, 그보다 더한층 중요한 것은 페리클레스의 통치하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아테네의 문화가 헤로도토스에 끼친 정신적 영향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성립 과정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벌어지고 있고 간단히 결론지을 수 없지만, 여하튼 그 최종적인 구상은 저자가 아테네의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은 이후에 비로소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된다. 아테네가 헤로도토스에 끼친 영향력은 그 정도로 강력했으며, 그 사실은 《역사》를 한번 읽으면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444년에 헤로도토스는 아테네가 중심이 되어 계획한 남이탈리아의 투리오이 식민지 건설에 참여한다. 이것은 페리클레스의 발의에 의한 것으로 기원전 6세기 말에 음락(淫樂) 때문에 멸망했다고 전해지는 고도(古都) 시발리스의 유적지에 새 식민 도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헤로도토스가 이에 참가한 동기는 명확치 않다. 타고난 모험심, 호기심이 이때도 그를 미지의 땅으로 유혹한 것 같다. 다만 이주 후의 그의 동정에 대해서는 전연 알 수 없다. 이때까지의 그의 경향에서 추측하면 이 새로운 땅에서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을 것인데, 《역사》에 있어서의 이탈리아에 대한 기술은 의외로 적다. 《역사》의 주제와 관련된 것이 적기도 하고 이주 후에는 이미 여행에도 지루함을 느껴 오로지 저작에만 전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망 연대 및 장소도 분명치 않다. 투리오이에서 생애를 마치고 그 묘소도 그곳에 있었다는 전승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그가 투리오이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데, 이것은 제1권의 서두에 있는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의’라는 구절을 ‘투리오이 출신의’로 보는 이설(異說) 이 있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사본은 일치해서 ‘할리카르나소스’라는 이름을 채용하고 있지만, 고대에는 ‘투리오이’라는 이름으로 보급되어 있었다 한다. 어느 쪽이 본래의 이름이었는지는 오늘날에도 논란이 분분하지만, 투리오이가 헤로도토스에게 있어 마지막 주거지였다면 투리오이 출신이라고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사망 연도가 적어도 기원전 430년 이후였다는 것은 《역사》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언급한 곳이 몇 군데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거의 틀림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장 넓게 잡아 기원전 430~420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출생 연도도 마찬가지로 넓게 잡아 기원전 490~480년으로 보고 양극을 취하면 기원전 490~420년이 그의 생존 기간이고 70세에 사망한 것으로 된다. 그러나 오히려 중간을 잡아 기원전 485~425년, 따라서 60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상이 헤로도토스의 생애에 대해 우리가 아는 대략적인 사항이다.

여행과 저작
헤로도토스가 시도한 경탄할 만한 긴 여행이 사모스에서 귀국한 후 투리오이 이주 때까지 10여 년간 수차례에 걸쳐 행해졌으리라는 것은 앞서 이미 서술했다. 그러나 이 대여행의 연대, 그 밖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그 무엇 하나 확실히 알 수 없다. 우리는 《역사》의 기술 자체에서 그의 발길이 미친 지역의 범위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그 서술에서 단지 전해 들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직접 그곳을 답사해 보고 들은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인데, 그러한 경우들을 종합해 보면 동쪽으로는 바빌론 내지 수사, 서쪽으로는 리비아의 키레네, 바르케, 남쪽으로는 나일 상류의 시에네(오늘날의 아스완), 북쪽으로는 흑해 북안의 그리스 식민 도시인 오르비아를 중심으로 크리미아 반도, 우크라이나 남부 주변에까지 발길이 미치고 있음은 거의 확실하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실로 놀랄 만한 대여행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특히 당시의 교통 사정을 생각해 볼 때, 일개 개인에 불과했던 헤로도토스가 이러한 대탐험 여행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실로 커다란 수수께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인 문제는 물론 언어나 생활 습관의 차이에서 오는 여러 장애, 여행 도중에 일어나는 위험이나 재해 등 그 어려움은 아마 우리의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가 상업 활동을 해가면서 여행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것은 솔론의 고사(故事)에 바탕을 두고 유추한 것으로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그의 조사 여행의 실상은 그에 수반하여 일어났을 여러 사건과 함께 저자 자신이 침묵하고 말하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는 언제까지나 커다란 수수께끼로 머물 것이다. 물론《역사》안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되고 있는 삽화 속에 저자 자신의 체험이 모습을 달리하여 서술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창작의 여과 과정을 경과한 것이며, 이른바 다큐멘터리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또한 《역사》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는 작자의 대변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여지는 자들도 있다. 예컨대 아르타마노스나 데마라토스의 발언 중에서 작자 자신의 견해를 간파해 낼 수 있음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비극(悲劇)의 합창과 같이 간접적인 표현에 머무르는 것이며, 작자가 명백하게 자기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헤로도토스가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와 같은 자신의 체험을 골자로 한 여행기를 남기지 않은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역사》가 본래 동서 항쟁사를 주제로 하여 구상된 것인 이상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역사》가 9권으로 나뉘고 각각의 권에 뮤즈의 이름이 붙여져 있는 것(이 책에서는 생략)은 이 책의 본래의 모습은 아니고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교정자의 작위(作爲)에 의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9권으로 나눈 것도 뮤즈의 수에 맞추기 위해서라고도 생각되고, 호메로스의 2대 서사시가 각각 24권으로 나뉘고 알파벳으로 권을 표시하고 있는 것과 같은 수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경우도 그렇지만 《역사》의 권 구분도 전적으로 교정자의 자의에 의한 기계적인 조작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각 권은 각각 그런 대로 통합되어 있고, 구분 방식에서 별다른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의 전체적인 서술 배열을 염두에 두고 보면 보다 적절한 구분도 생각할 수 있다고 보이지만, 여하튼 현재의 권별로도 별다른 불편이 없으므로 이 문제를 이 이상 더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기서 상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제1권 서두에서 작자는 먼저 그 이름을 밝히고 저술의 목적과 주제를 간단히 서술하고 있다. 동과 서—
아시아와 유럽이 어떤 원인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내용에 중점을 두고 그리스인이든 비그리스인이든 인간이 이루어 낸 위대한 업적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 집필의 주요 목적임을 밝힌다. 서두에 저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주제를 제시하는 것은 이미 헤로도토스의 선배인 헤카타이오스의 저술(단편)에서도 볼 수 있고, 또한 헤로도토스의 후배인 투키디데스도 같은 수법을 답습하고 있다. 동서 항쟁의 역사는 일단 전설 시대부터 이야기되지만, 그것은 이른바 서론에 불과하고 본격적인 서술은 작자에 있어서 최초의 역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리디아의 왕 기게스로부터 시작된다. 기게스가 리디아의 왕위와 왕비를 함께 수중에 넣는 이야기는 플라톤의 《국가》에서도 변형된 형태로 기술되고 있어 그리스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지만, 작자의 말투가 교묘하여 우선 이로써 청중 혹은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고 이로부터 계속해서 서술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리디아는 크로이소스 대 (代)에 그 패권을 신흥국인 페르시아에 빼앗겨 결국 동방의 대표 세력으로서 페르시아 왕국이 그 모습을 나타내며, 한편 서방에서는 마침내 페르시아와 대결할 그리스 본토, 특히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역사와 현황이 이야기된다. 이오니아 여러 도시의 반란에 아테네가 가담하고 사르데스를 파괴한 시점부터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적대 관계가 결정적인 단계로 접어든다. 다레이오스(다리우스) 대에 시도된 최초의 그리스 공격은 마라톤에서의 패전으로 좌절되지만, 다음 대의 크세르크세스는 재차 그리스 침입을 기도한다. 제7~9권에서 상술되는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원정은 《역사》의 중심부를 이루는 것으로, 서술 속도도 자연히 빨라지고 주제에서 어긋나거나 삽입적인 설명도 줄어든다. 살라미스, 플라타이아의 2대 회전(會戰)에 의해서 페르시아 전쟁은 실질적으로 종결되지만, 마치 여운과도 같이 그 후에도 몇 번의 소전투가 벌어진다. 본서의 기술에 있어서는 미칼레의 전투가 그 첫째이고 세스토스 공략이 그 둘째이다. 그리고 저자는 세스토스의 함락(기원전 479년)으로 페르시아 전쟁이 종결됐다고 보고 글을 끝맺는다.
헤로도토스의《역사》가 현재의 형태로 완성된 것인지의 여부는 오늘날도 학자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지만, 완성설을 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결말이 웅대한 계획 위에 구성된 이 대작의 말미로서는 박력이 결여되어 있다든지 별안간 끝난다든지 하는 비판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상심한 크세르크세스가 사련(邪懇)에 빠지고 그것이 왕비 아메스트리스의 잔혹한 행위를 유발시키는 이야기는 패전 후의 페르시아 왕실의 퇴폐 양상을 그리는 데 부족한 감이 없진 않지만, 최후로 일찍이 국조(國ffl)인 키루스가 국민에게 내린 훈계름 기록하고 건국 당시의 페르시아인의 뜻을 나타낸 데는 저자의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언뜻 보아 전체적으로 지극히 산만한 서술 형태환 취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보면 사소한 결락(缺落)一 예컨대 제1권에서〈아시리아사(史)〉에 기술하겠다고 약속했으면서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 등― 은 별도로, 오히려 놀랄 만큼 정밀한 계획에 기초하여 시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제에 벗어난 내용이라든지 삽입적 기술 같은 부분도, 그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저자가 명백히 의식하고 행하고 있으며 질코 착각을 했다거나 부주의하여 잘못 혼입된 것은 아니다. 아마 헤로도토스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본서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읍 계속 경주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본서가 최종적인 완성을 볼 때까지 발표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옛 전승에서도 알 수 있듯이 헤로도토스는 그 《역사》를 각처에서 구연(口演)하고, 먼저 그료씨 명성음 얻었으며 또한 수입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나 그것은 호메로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1회로 끝나는 강담(講談) 같은 형태로 행해진 것이고, 각각의 기회에 따라 청중의 기호에 맞춰 발췌해 이야기한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역사》는 그들 개개의 구연 활동과는 별도로 웅대한 구상하에 퇴고를 거듭하며 이루어 낸 일대 노작(勞作)이있던 것이다.

역사 기술의 태도와 후세의 평가
헤로도토스가 본래는 도리스계였지만 이오니아 문화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던 식민 도시 할리카르나소스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는 것은 그의 인격이나 사상의 형성에 깊은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식민지는 본토와는 달리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기풍이 감도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인류사상 처음으로 과학적인 관찰 및 사고방식 등을 창출해 낸 이오니아 식민지에서 그 경향이 현저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헤로도토스의 끝없는 지적 호기심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심은 아마 타고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러한 환경적인 영향도 컸을 것임에 틀림없다. 본토의 그리스인이 완강하게 고집한, 그리스적 중화사상(中華思想)이라고 할 만한 편견이나 오만함을 헤로도토스에게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평생 이민족과 접하고 그 자신 혼혈이었다고도 생각되는 헤로도토스가 민족적 배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고도 생각되는데, 그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예컨대 제3권에서 이야기되는 다레이오스의 흥미로운 실험에 대한 기술에 관해 “관습의 힘은 이러한 것으로, 나는 핀다로스가 ‘관습(노모스)이야말로 만물의 왕이다’라고 노래한 것은 실로 옳은 말이었다고 생각한다”라는 구절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페르시아인을 비롯하여 바빌론, 이집트, 스키타이 등 이민족의 풍습 습관을 기술할 때에도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일관되고 있고, 공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본토의 대부분의 그리스인에게는 이러한 태도가 오히려 이상하고 불성실한 것으로까지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가 글을 쓰는 데에 정확성과 공정성을 기했다는 것은 스스로 여러 곳에서 표명하고 있는 바이며, 실제 서술 방식에서도 충분히 간파할 수 있다. 헤로도토스가 수집한 자료 중 그 자신이 직접 보고 들어 확인한 사실은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구비 전설이라든지, 풍문·전승 등에 기초를 둔 것이다. 각각의 자료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특히 하나의 사항에 대해 여러 가지의 설이 유포되어 있을 경우,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 하는 데 있어 저자의 고심은 적지않았을 것이다. 저자의 자료 비판 태도는 반드시 한결같지는 않지만, 그의 기본적 원칙은 “이것을 믿는 사람은 이집트인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취하고 있는 원칙은, 각각의 사람이 말하는 바를 들은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다” (제2권)와 “내 의무는 전해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믿어야 할 의무가 내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나의 주장은 본서 전체에 걸쳐 적용될 것이다”(제7권) 등 두 문장으로 요약되고 있다.
《역사》의 특징 중 하나는, 제2권에 있어서의 이집트와 제4권에 있어서의 스키타이의 풍토 및 습속에 대한 기술과 같이, 각각 독립된 저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상세한 지지적(地誌的) 서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본래 지리학자로서 시작하여 후에 역사가로 변모했다는 주장이 유력한 학자에 의해 제창되고 있는 것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헤로도토스의 지리학이나 민속학에 대한 관심은 직속 선배라 할 수 있는 밀레토스인 헤카타이오스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소급해 생각해 보면 개척자나 항해자를 위해 예로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던 실용적인 안내서 같은 것과도 관계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지리적 조사나 기술이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이나 또는 이국의 풍물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역사의 기술 속에서 각각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역사서에 대해 우리가 갖는 통념에서 볼 때는 이들 지지(地誌)는 비록 역사적 사건의 관련 사항이라 하더라도 균형을 잃고 지나치게 길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서 곳곳에서 보이는, 삽화풍으로 이야기되는 옛 전승이나 설화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역사》가 갖는 특색이자 매력이며, 전체적으로 청중 혹은 독자에게 별다른 위화감을 주지 않는 것은 결국 튼튼한 뼈대가 전편을 지탱하고, 그것이 종종 보이는 탈선이나 정체에 동요를 보이지 않는 안정감이 높은 구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헤로도토스의 자유롭고 활달한 기상은 식민지적 기풍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말했지만, 일견 이것과 모순되는 듯한 그의 또 다른 특성 중 하나가 같은 환경의 영향하에서 조성됐다는 사실을 또한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자유롭고 진취적인 기풍과 함께 식민지에 사는 인간을 특징짓는 일종의 독특한 보수주의다. 헤로도토스의 경우, 그것은 오히려 고풍스런 운명관이나 신앙심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제3권에서 이야기되는 폴리크라테스의 이야기나 제7권에서 아르타마노스의 말로써 이야기되는 것은, 요컨대 인간의 지나친 행운, 그리고 그로부터 생기는 교만심이 신의 비위를 거슬렸다는 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것은 솔론에서 아이스킬로스로 이어진 그리스의 전통적인 운명관·도덕관이었다.
또한 《역사》 전편을 통해서 신탁이나 예언이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작자의 인생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 유력한 자료가 된다. 헤로도토스 자신이 제8권에서 표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신탁이나 예언의 진실성을 아주 솔직하게 믿고 있었던 듯하다. 그와 동시대의 그리스 본토의 지식인 대부분에게 있어서 이러한 운명관이나 신앙은 이미 시대에 뒤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자유롭고 진취적인 탐구심과 보수적인 인생관을 그가 식민지 출신이라는 데 귀인(歸因)시키는 것에는 이론(異論)도 있을 것이지만, 여하튼 언뜻 보아 모순되는 듯한 이 두 경향의 기묘한 혼합이 헤로도토스의 《역사》 서술을 특징짓고 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역사》가 예로부터 어떻게 평가받아 왔는가 하는 것은 매우 홍미 있는 문제다.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1권, 21~22장에서 자신의 역사 서술 태도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 산문 작가들(로고그라포이)은 진실보다는 청중(독자)에 대한 효과를 목표로 한다고 평하고, 자신의 저작은 일시적으로 청중의 기호에 영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전해야 할 재산으로서 집필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암암리에 헤로도토스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로고그라포스(복수형이 로고그라포이)란 말은 서사시 작가(에포포이오스) 등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헤로도토스가 선배인 헤카타이오스에 대해 언급하거나 그를 비판할 때에도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다. 투키디데스가 젊은 시절에 헤로도토스
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전승도 있고 또 당연히 그랬으리라고 생각되지만, 투키디데스의 엄격한 역사 기술의 규범에서 보면 헤로도토스가 그의 비판 대상으로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먼 서사시 시대에 헤시오도스가 뮤즈의 말을 빌려, 자신의 시가 진실을 노래하는 데 대해 진실과 비슷한 거짓을 노래하는 자라 하여 암암리에 호메로스 일파인 이오니아계 시인들을 비판한 고사(故事)를 상기시킨다. 고대, 그것도 특히 기원전 5세기경의 그리스에 있어서의 특수사정에 비추어, 문헌 자료가 극도로 한정되어 있었고, 물론 오늘날과 같이 고고학, 비문학(碑文學), 고전학(古典學) 등 역사학에 있어서 유력한 보조 수단이 되는 것들이 전무했음을 우리는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신화, 전설은 물론 풍문이나 전문(傳聞)의 자료에 신빙성을 두지 않고 직접 자신이 보고 들은 바에만 의존한다면 역사 기술은 시간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심히 제약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바로 이러한 엄격한 규범에 따라 씌어진 것으로, 그 한도 내에서는 가장 모범적인 역사서로서 영원히 역사 서술의 고전으로 존경받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투키디데스류의 방법은 문헌 자료가 풍부해진 후세까지 정통적인 규범으로서 계승되어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았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시간적으로도 지역적으로도 방대한 범위에 걸쳐 있고, 게다가 기담기화로 가득 찬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역사서로서 의심을 받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헤로도토스가 예로부터 역사가로서보다는 설화 작가로서 존중되어 온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역사의 아버지’라는 명예스러운 칭호를 헤로도토스에게 붙여준 로마의 키케로도 헤로도토스를 무조건 찬미했던 것은 아니다. ‘역사의 아버지’라는 구절이 인용되고 있는 그의 《법률론》제1권에는 “하긴 역사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헤로도토스나 테오폼포스의 경우도 무수한
작화(作話)로 가득 차 있지만” 하는 등으로 씌어 있으며, 키케로는 다른 저작에서도 헤로도토스가 지어낸 이야기가 많음을 지적하고 있다. 헤로도토스를 역사가로서보다는 설화 작가로 취급하는 태도는 그 후 오랫동안 헤로도토스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주류적인 위치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 헤로도토스가 역사가로서의 면목을 겨우 회복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에 속한다. 고고학, 비문학(碑文學), 파피루스학, 고전학 등 고대사에 있어서 오늘날 없어서는 안 될 보조 과학의 확립이 그의 명예 회복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이집트, 2대 강 및 그 밖의 오리엔트 모든 지역에 있어서의 발굴, 그에 수반한 많은 문헌 자료의 발견, 나아가 그 해독이라는 과정을 통해 고대 동방 모든 지역의 사정이 해명됨에 따라, 헤로도토스가 —
종래의 통념에서 보면—
의외일 정도로 정확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졌던 것이다.
여하튼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특히 초기의 오리엔트 연구가들에 있어서는 신뢰도 문제는 불문하고 헤로도토스를 단서로 하지 않고는 작업을 진행시키기가 곤란했던 것이 사실이며, 그 사정은 일찍이 슐리만이 호메로스의 기술에 의지하고 트로이아(트로이)를 발견한 그것과도 약간 비슷한 바가 있다. 하긴 슐리만은 호메로스의 진실성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지만, 헤로도토스를 역사가로서 재평가하는 과정은 오늘날에도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물론 새로운 지식에 의해《역사》의 기술이 보충 혹은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지만, 도리어 진실성이 입증되는 부분도 금후 더욱 증가되리라는 것이 충분히 예상된다.
이상 서술한 것은 주로 《역사》의 자료 및 기술 방법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이것과는 별도의 관점에서 비롯된 헤로도토스에 대한 비판도 고대부터 있었다. 그것은 요컨대 헤로도토스의 기술 중에서 악의나 편견이 발견되는데, 이것은 역사가로서의 공정한 입장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취지의 것이었다. 이런 유의 비판은 몇 사람의 이름으로 단편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들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플루타르코스(플루타르크)의〈헤로도토스의 악의에 대하여〉라는 글이 있다. 상당히 긴 에세이이므로 그 내용을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지만, 주요 논점을 두세 가지 들면, 먼저 이 에세이의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보이오티아인(특히 테베인)과 코린토스인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악의 서린 중상이다. 플루타르코스가 보이오티아 출신이기 때문에 이 반발은 그의 애향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의 서술 태도가 우리를 납득시키기보다는, 편견이 오히려 이를 규탄하는 측에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또한 제7권에 서술되어 있는 아르고스의 거취에 관한 경위에 대하여, 헤로도토스가 몇 개의 설을 열거하고 있는 서술 태도를 비난하며 이러한 방식은 공정성이라는 너울을 쓰고 실제는 아르고스를 중상하는 악랄한 수법이라고 결론짓는다. 또한 헤로도토스를 ‘오랑캐 편’이라고 비난하며 그가 지나치게 '아테네를 편드는 것’을 공격하는 등 헤로도토스에 대한 적의를 적지않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비난에 대해 헤로도토스를 변호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 항목 서두에 쓴 헤로도토스의 성향과 기술 태도, 나아가서는 앞서 서술한 그와 아테네와의 관계 등에서 비교적 용이하게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가 썼다는 이 글이 실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우리로서는 그야말로 악의에 찬 〈헤로도토스의 악의에 대하여〉라는 글이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전기 작가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믿고 싶기까지 한 것이다.
끝으로 이 번역은 《The Histories》(Penguin Classics)를 대본으로 하고 《歷史》(岩波文庫, 1981)를 참고한 것임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