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lime)처럼 상큼한 책과 콘텐츠를 만드는 출판사 리메로북스(limerobooks)의 두 번째 책 詩소설집 『뜻밖의 의지』가 출간되었다. 이장욱, 구병모, 김선재, 김수온, 여성민, 임현, 정지돈 등 개성 있는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들의 ‘시소설’ 7편을 엮었다. ‘시소설’은 단순히 시와 소설의 특징이 혼재된 것이 아니라, 시와 소설에 이미 내재해 있는 시적, 소설적 자질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작가의 문학적 경험과 신념이 반영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친구 “지혜”의 죽음이라는 서사에서 출발해 고유명사였던 “지혜”가 동음이의어인 일반명사로 쓰이다 형용사와 같이 존재하는 상황을 시적으로 풀어내는 이장욱의 『지혜와 거리두기』, 숨 쉬는 것조차 비용이 발생하는 현실을 “공기 요정”과 그것을 막는 “신제품”에 비유해 서술하는 구병모의 『숨값』, 실어증에 걸려 학대당하는 “너”를 베일에 싸인 “나”의 시점에서 묘사해 화자의 존재를 알레고리 속에 가두는 김선재의 『뜻밖의 의지』, “여인”이라는 등장인물들이 “정원”을 무대로 행동함으로써 상징주의극과 같은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김수온의 『애프터눈 티』, 언어의 반복, 대화의 맥락 없음 등 부조리극의 장치를 도입해 유희적으로 의미와 무의미를 오가는 여성민의 『밤에 해변에』,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서사를 시적 상황으로 설정하고 섬세한 직유와 은유를 통해 문장을 이끌어나가는 임현의 『미망』, “프랑크 헨젤”을 추적하던 서사가 급작스럽게 다른 결말에 이르게 될 때 각 인물의 언어(행동)와 의미(해석) 사이의 균열을 포착해 내는 정지돈의 『프랑크 헨젤』 등 때로는 시편에 가깝게 때로는 서사 장르에 가깝게 창작된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독자는 시와 소설의 본래적 의미에 답하는 낯설고 흥미로운 화법을 감상하게 된다. 특히 구병모의 『숨값』은 코로나 유행 이전, 미세먼지 등으로 실외 활동 시 일부 소비되던 마스크에서 착상한 작품이다. 실제로 마스크 품귀 현상이 발생한 코로나 시기를 거쳐 지금은 실내 필수품이 된 현실을 염두에 둘 때, 문학이 시대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동시에 배반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단순한 형식의 차원을 넘어 산문에 잠재된 시적 아이러니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출판사 소개
스페인어로 라임장수를 뜻하는 리메로(limero). 장르적 규약을 뛰어넘는 다양한 기획출판을 통해 라임(lime)처럼 상큼한 책과 콘텐츠를 만들겠습니다.
시소설詩小說이라는 단어는 얼핏 시와 소설의 특정을 뒤섞어놓은 장르를 떠올리게 한다. 외국의 경우 오래전부터 시소설, 혹은 운문 소설로 번역 가능한 ‘verse novel’이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으며, 국내의 경우 크로스오버crossover 형식을 표방하는 시소설 작품집이 온-오프라인 모두에서 출간된 바가 있기에 어감만 놓고 본다면 일반 독자들에게도 아주 낯설게 여겨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독자들의 예상과 달리 시의 장르적 특징과 소설의 장르적 특징을 뒤섞는 작업은 뜻밖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시소설을 창작하기 위해선 먼저 시와 소설에 대한 장르적 규약을 확정 짓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학 전공자나 문학에 조예가 깊은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미하일 바흐찐, 유리 로트만 등 러시아 구조주의 평론가들의 난해하기 그지없는 저서를 살펴보더라도 시와 소설의 분명한 경계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러시아 구조주의자들은 종종 소설을 규명하기 위해서 시적인 자질을, 시를 규명하기 위해서 소설적 자질이 비교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것을 토대로 시와 소설 각각의 장르가 일정한 규약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발표 당시 작가가 부여한 성격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밝혀 낸다. 이를테면 운율이나 리듬감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시에서 시적 특성을 찾아낸다거나, 전체가 운문으로 쓰인 소설에서 소설적 특징을 이끌어 내는 식이다.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시는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시가 아니라, 여하한 소설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시이기 때문에 시인 것이다. 소설 역시 운문이 아니기 때문에 소설이 아니라 운문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소설이기 때문에 소설인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시소설은 시와 소설의 특징을 뒤섞는 작업이라기보다 이미 각 장르에 내재해 있는 시적 혹은 소설적 자질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는 작업인 셈이다. (…중략…) 이 책의 출간 전 작가들에게 요청했던 바는 시소설 청탁을 받았을 당시의 당혹스러움을 수정에 최대한 반영해 달라는 것이었다. 기교의 세련됨을 더해 달라는 요청과는 가장 거리가 먼, 각자의 문학적 경험과 믿음으로 시소설을 호명해 달라는 무척 난감한 부탁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시소설은 장르가 아닌 도전이며, 시와 소설의 기대를 모두 배신해야 하는 가면 쓴 내포 작가의 능청스러움과 절박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시인이나 소설가 모두에게서 늘 반쯤은 잠겨있는 상태. 투명 인간의 근사한 외출복처럼 어쩌면 그것이 호명될 때에야 비로소 겉옷을 걸치고 보이지 않는 속살을 빚어내는 형식인지도 모르겠다. - 기혁 시인·리메로북스 노조위원장
책속에서
[P.9] 열 살이 되고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된 후에도 지혜는 엉뚱한 말을 하는 버릇이 있었죠. 낮에도 밤에도 누구를 만나도 그곳이 어디어도 지혜는 지혜로워지지 마세요! 라고 말했는데 그건 물론
지혜가 지혜였기 때문에 가능한 농담 아무래도 우습지 않은 농담 아무도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농담
이장욱, 「지혜와 거리두기」
[P. 41~42] 지난번에 내가 뭐랬어 숨만 쉬고 살아도 돈이 든댔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따박따박 떼어 가는 건보료 하며 병원 문턱에도 안…… 못 가는데 그냥 허공에 녹아 사라지잖아 설탕 같은 숫자가 결산이며 자료라고, 너 이렇게 먹고 입었다며 화면을 건드리고 지나가지만 숫자와 맞바꾼 구체적인 실물을 내가 만져 본 적은 손에 꼽잖아 나 정말 구제救濟 받고 싶다고 주민 센터에 갔거든 건보료만이라도 어떻게 안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여기가 아니래 건보공단에 가래 그래 갔지 담당자가 그래 소득이 있으니까 안 된다고 그래 하지만 월세로 나가고 밥 먹을 돈도 전화요금도 없는데요, 했더니 그건 또 우리 소관이 아니래 어쨌든 너는 돈을 벌고 백 원 천 원이라도 벌고 거기서도 세금이 까이는 게 당연한데 어떻게 건강보험만 날로 먹으려 드느냐고 그래 지금 젊어 그렇지 창궐하는 공기요정들로 인구의 절반 이상이 호흡기 질환자인데 평생 병원 문턱 한 번 안 넘어 보고 살 거 같냐고도 그래 그러면서 나를 구제驅除할 것 같은 눈으로 바라봐 구병모, 「숨값」
[P. 59] 나는 왜 아직 여기 있을까. 침묵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밤이면 가끔 그런 것이 궁금해진다. 애초부터 나를 만든 건 희망이 아니다. 나는 그저 희망이나 절망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떠돌 뿐이다. 비가 지나간 뒤 더 짙어지는 웅덩이나 웅덩이를 건너뛰는 아이의 짧고 작은 허공. 나는 그 사이 어디쯤에서 발음되는 존재다. 물론 나는 네가 발음할 수도 발음한 적도 없는 존재였다. 곁에 있는 내가 너를 감각할 수 없는 이유다. 나는 보고, 본 것을 전하거나 기억할 뿐이다. 눈을 뜬 네가 비척비척 일어나 빈 화분 쪽으로 돌아앉는 지금도, 나는 너를 바라보기만 한다. 속옷을 내리고 검은 똥을 흘리는 너를. 창백하고 건조한 얼굴을 드는 너를. 김선재, 「뜻밖의 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