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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김호운(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김수온|한 폭의 빛
김채원|빛 가운데 걷기
박산윤|까마귀 서점
박민경|살아있는 당신의 밤
서찬란|새의 귀환
원미란|고상한 소스의 세계
유영은|퍼레이드를 기다리는 시간
정재운|섬 자장가
김나현|양배의 이야기
김쿠만|백년열차
김희숙|푸른 미로
서재일|어느 동물병원 원장의 죽음
심병길|발우생활정보신문 창업기
양영석|불면
이수빈|무지개 숄
請霞 이정희|먼 사람
정성문|하얀 개
정진희|백만 잔의 커피
주연오|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진서정|불시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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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신예작가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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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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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담장을 허물고 있는 단지 근처를 지나쳐 걸었다.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닌 소음이 이어져 기압이 높지 않음에도 귀가 먹먹했다. 자선공연을 하는 남자의 곁을 지날 때쯤 노인은 작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유쾌하고 즐거운 노래였는데 음조를 지키지 않고 불렀기에 만약 누군가 귀를 기울인다면 장난에 가까운 혼잣말처럼 들릴 것이었다. 노인은 자동차가 줄지어 세워져 있는 공용 주차장에 몸을 숨기고 포도 향이 나는 담배를 가볍게 깨물어 피웠다. 노인의 얼굴 위로 무언가 물러나듯 햇빛이 드리웠다. 기분이 좋았다. 몸이 비교적 따뜻했다. 이대로 햇볕에 반쯤 바랜 자신이 죽음을 몰아내지 못하고 기진맥진해서 주차장 바닥에 여러 차례 으깨져 누워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온 사방이 순식간에 눈부시게 환해져, 그와 동시에 교각 아래 공원에서 달리기를 하며 바람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또한 상상했다. 핫소스 병. 등대. 나무껍질. 상점들. 가지요리. 사이다 자판기.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사람들. 자두를 증류해 만든 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루이스 페데리코 를루아르의 강의를 듣기. 그곳에 두꺼운 이론서를 두고 뒤돌아 자리를 떠나기. 의자를 넘어뜨리면서 시끄럽게 문을 열기. 모든 것이 사실 같았다. 노인의 머리가 어지러워 계속 흔들거렸다.
이런 곳에 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빛 가운데 걷기」 중에서)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이곳은 태 선배가 운영하는 카페는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크고 넓은 곳에 통유리 바깥으로 선 베드가 여러 개 있고 커피족욕 시설까지 갖추고 있는 곳이라니. 카운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장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가 노랑머리 직원과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그는 태 선배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블루마운틴 커피 한 잔과 허니버터브래드를 앞에 놓고 있는 나는 평온한 듯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머릿속은 마구 헝클어진 상태였다. 나의 마음은 사람을 신뢰하고 싶다는 소망과 이용당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 어디쯤에 놓여 갈팡질팡했다. 선배를 믿지 않았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뭐라 말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허니버터브래드 위에 끼얹어진 캐러멜소스를 보면서 어떠한 음식 맛도 모두 가려버리는 소스처럼 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고상한 척을 하며 앉아 있었다. (「고상 소스의 세계」 중에서)
두 달 전, 대표와 면담에서 나는 입사 면접 때 제출한 기획안이 친구의 아이디어를 허락 없이 사용한 것이라 고백했다. 대표가 칭찬한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했다. 대표는 그 기획안이 뭐였느냐 물었다. 준비한 문서 파일을 건네주자 찬찬히 읽어보더니 이제 기억이 돌아온다면서 잠시 웃다가 얼굴에서 미소를 금방 지워버렸다. “그런데 이건 당신을 채용할 때 결정적으로 고려한 사안은 아니었어요.” 대표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실력을 충분히 입증한 사람이고, 그것만 보자면 회사에 남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이것은 원칙의 문제라고 했다. 그러니까 입사 시 허위의 문제가 있었다면 채용은 취소되어야 했다. 대표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러다가 생각을 정리한 듯 진실하지 못한 사람과 일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조용히 마무리하기로 해요.” 스스로 회사를 나가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그 말대로 했다. (「양배의 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