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종건과 박정희 19 2. 최종건, 최종현 형제 22 선경 치안대 조직 25 동생 최종현의 아름다운 양보 29 ‘닭(장닭 Rooster) 표’ 인조견 33 봉황새 이불감 36 나일론(Nylon) 직물 생산 38 폴리에스터 직물 생산(비상탈출구) 40 3. 직물 수출 1호 43 4. 최종현 등장 47 최종현 부사장의 첫 작품 50 수출 실적 링크제 (홍콩의 300만 마 대박) 52 5. 신제품 개발과 선경의 비약 56 크레퐁 선풍 56 직물연 회장 최종건 58 앙고라 탄생 - “남방셔츠 자락 자르겠습니다” 59 박정희 대통령과의 두 번째 만남 60 최고의 히트상품 ‘깔깔이’ 62 6. 꿈의 폴리에스터 원사(原絲) 65 최초의 섬유 기업 집단 72 7. 선경직물 사장 최종현 75 워커힐(Walkerhill)호텔 인수 80 8. 최종건 회장 타계 82 아름다운 기업 승계 84 형제(兄弟) 85
제2부 최종현의 제2의 창업
9. 최종현 회장 시대 개막 91 사원연수원 설립 93 경영기획실 설립 94 꿈의 매출 1000억 95 선경합섬의 R&D 계기 96 23년 만의 사옥(社屋) 98 10. 선경의 경영철학 - SKMS 100 한국고등교육재단 103 MBC 장학퀴즈 104 11. 선경종합무역상사 107 ㈜선경의 기업공개 110 12. 컬럼비아 영사 최종현 113 13. 건설업 진출 116 쉐라톤워커힐 호텔 120 14. 최종현의 집념 - 폴리에스터 필름 122 헤징 전략으로 자기테이프부터 122 삼성(제일합섬)과의 싸움 124 상공부의 변심 127 15. 화학기업 선경합섬 130 독자기술로 폴리에스터 병 개발 130 선경매그네틱(SMT) 선풍 132 비디오테이프 개발 135 16. 선경의 유공(油公) 인수 136 걸프(Gulf)의 철수 136 국영(國營)에서 민영(民營)으로 139 선경, 재계 5위로 143 최종현 회장의 석유 외교 143 석유 수급 조절 명령 146 유공(油公) 사장 최종현 147 유공해운(海運) 설립 149 유공의 유전개발 151 유공가스설립 153 17. 최종현의 새로운 도구 - SUPEX 155 SKC의 세계화 전략 159 18. 계열사들의 변신 159 선경매그네틱 선풍 161 선경건설의 EC화 추구 163 선경의 북방교역 진출 164 유통사업 진출 166 세계의 시선을 잡은 워커힐 호텔 167 의약 사업 진출 168 19. 석유정제 고도화 171 세계 최대 정유 공장 173 해외자원 개발 174 휘발유 엔크린 177 20. 유공(油公)의 히트상품 177 유공, SK주식회사로 180 선경, 중국 내 종합무역상사 설립 181 21. 선경의 질적 변화 181 ㈜선경의 선진금융기법 183 종합물류사업 진출 185 선경과 현대그룹의 유류판매 전쟁 187 SUPEX의 꽃 옥시케미칼 189 세계적 수준의 유공해운 191 22. 정보통신 사업자 ‘선경’ 193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194 정치적 소용돌이 197 최종현 회장의 선택 199 코드분할 다중접속 기술 세계 최초 상용화 신화 202 CDMA 기술 개발 시련 204 서정욱 단장 선경 품에 206 사활 건 PCS(Personal Communication Service) 논쟁 208 정보통신부의 망설임 211 세계 최초 CDMA 상용화 214 SK텔레콤의 탄생 218 이동전화 시장 싸움 최종라운드 219
제3부 글로벌 기업 SK
23. 선경인더스트리의 도전 223 선경, 인도네시아 진출 226 폴리우레탄 사업 확대 228 환경 친화 제품 개발 230 24. 세계적 필름메이커 SKC 232 이미지 필름 제조 성공 234 글로벌 생산 체제 구축 235 디지털미디어 분야 진출 237 25. 선경건설의 멕시코 대첩 240 세계 최고의 발파기술 ‘SUPEX-CUT’ 243 26. 선경의 금융업 진출 245 투자신탁운용 설립과 SK생명 출범 247 SUPEX 추구 (정신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 249 27. 재계의 총리 최종현 249 중 장쩌민(江澤民) 주석에게 시장 경제 설명 251 SUPEX 추구에 대한 자신감 253 전경련 회장 최종현 255 문민정부와 불화 257 문민정부하의 시련 259 최종현 전경련 회장 재추대 261 박계희 여사 별세 263 28. 최종현 회장 부부의 타계 263 투병 중에도 21세기 일등 국가를... 266 최종현 회장 영면 269 이대(梨大)에 핀 최종현 드림 272 유고(遺稿)를 정리한 두 권의 책 274 29. 파트너십(Partnership)체제 276 손길승(孫吉丞) 회장 취임 276 30. 최종현 회장이 남긴 것들 280 최종현 아카데미아(한국고등교육재단) 280 최종현의 숲(Forest) 283 31. 최종현, 그가 있어 행복했다 286 99인의 회포 289
제4부 새로운 도전과 응전
32. SK케미칼의 진화 297 한국 100년 제약사(史)의 쾌거. ‘선플라’ 시판 299 SK케미칼 해외진출 301 SK제약의 비약 303 33. SKC 위기와 타개 306 해외 생산 거점 구축 307 SK 에버텍 합병 309 SKC 2차 전지(電池, Battery) 사업 진출 311 34. 금융관계사의 도약 313 E-NNOVATION 비전리포트 314 SK투신운용과 악사로젠버그(Axa Rosenberg) 316 35. 국민 생활 패턴을 바꾼 SK텔레콤 318 20대 젊은 층을 잡아라 319 광(光) 전송로 망 구축 321 SK텔레콤, 신세기 통신 합병 323 SK신세기통신 326 일본에 CDMA 기술 수출 327 36. IMT-2000 사업권(범세계 이동통신) 획득 330 세계 최초 3세대 이동전화 333 휴대폰 하나로 뉴스, 영화까지 334 37. 세계의 SK텔레콤 338 SK텔레콤 베트남 진출 340 SK텔링크 설립 344 SK텔레텍 설립 345 38. 정보기술 컨설팅 SK C&C 348 보이스포털 시장 진출 351 SK C&C 선거 전자개표(선거 개표 혁명적 개선) 353 39. 체육, 문화, 환경 분야 공헌 355 청소년 장애에 대한 관심 359 범지구 환경 사랑(울산대공원 조성) 362 40. 외국 투기 자본의 비수(匕首) 364 소버린의 SK 주식 집중 매입 365 채권단 이기주의(SK글로벌 정상화) 368 소버린의 이중성 370 41. 최태원 뉴(New) SK호 출범 372 최태원 회장 투명 경영 선언 375 최태원 회장, 사퇴 결단 377
제5부 행복 날개 SK
42. SK, 행복한 대한미국을 위해 383 SK 자원봉사단 383 SK 자원봉사 활동 385 SK의 사회 기여 387 43. 중국 속의 SK 391 SK의 중국 진출 전략 394 44. SK텔레콤, 새 영역 개척(생활 혁명) 396 SK텔레콤 약진 399 45. 사이버 세계의 강자 SK커뮤니케이션 402 46. SK그룹의 월드베스트들(World Best) 407 SK주식회사(사외이사 비율 70%) 407 선대회장의 선견지명, 해외 유전 결실 408 리튬이온전지 핵심 소재 독자 개발 412 SK의 환경 인프라 구축 413 SK제약의 개가 415 47. 최종현과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416 48. 최태원 회장의 행복 날개, 스킨쉽 경영 420 스킨십 경영. 행복전도사 421 최태원 회장의 대외 행보 424 아시아 지역 공존 모색 428 두드러진 최태원 회장 민간 외교 431 신 성장동력 해외시장 433 49. SKC, 글로벌 그린(Green) 소재 컴퍼니로 435 50. 집단에너지 기업(LNG 부문 수직계열화) SK E&S 439 51. SK 해외유전, 가스전의 결실 442 SK 인천정유 인수 445 52. SK케미칼, SK가스 중국 법인 448 SK E&S와 SK가스 450 SKC, P1 필름 사업 확대 452 53. 세계 최초 ‘Take out TV’ 등장(이동 휴대 방송) 454 SK커뮤니케이션즈 MSN(Microsoft Network) 제압 457 통(通)(www.Tong.co.kr)의 선풍 459 54. 최태원 시대 월드베스트들 463 SK주식회사 463 SK케미칼(SK제약합병) 466 SKC 컬러 밀베이스 개발 성공 468 SK네트웍스, 관리종목 탈출 470 SK건설, 원전(原電) 건설 사업 진출 472 SK증권, 창립 50주년 475 55. 최태원 회장의 행복 날개 476 SK 뉴(New) 로고(Logo) 행복날개 478 비즈니스 스쿨 SK 아카데미 480 56. 최태원 회장의 승부수 하이닉스 인수 482 중국에 생산 기지 확보 486 최태원 회장의 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원증 489 57. 상의(商議) (KCCI) 회장 최태원 492 58. 에필로그(epilogue) 497
70년 전 수원에서 중소직물 공장으로 출발한 선경직물이 오늘날 글로벌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과정과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의문과 궁금증을 언론인 관점에서 그리고 긴 역사적 관점에서 실마리를 찾아 그 핵심을 그린 책이다.
저자는 SK그룹 성장사의 밑바탕에 면면히 흐르는 벼리를 2가지로 꼽았다. 하나는 ‘우애와 신임’이라는 후계 구도이며 또 하나는 ‘SKMS’라는 경영철학이다.
최종건 창업 회장이 남긴 ‘우애와 신임’이라는 아름다운 후계 구도는 최종현 선대회장 대에서도 지켜지고 대를 이어가면서 전문경영인과 대주주의 조화를 중시하는 SK 고유의 경영 원칙과 기업 문화를 창조하였다.
최종현 회장은 21세기에 선경이 서구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우위 요소는 서구기업들이 이미 우위 요소를 확보하고 있는 마케팅, 재무, R&D가 아니라 지난 300년 동안 서구의 경제학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 중 하나인 사람의 능력을 활용하는 문제라고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1979년 그동안의 경영이념과 경영기법을 집대성하여 SKMS(SK Management System)를 완성하고 이를 선경의 경영 관리지침으로 확정하였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1989년 최 회장은 SKMS를 통한 그동안의 성과를 평가하고 개념위주의 SKMS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구현하는 방안으로서 SUPEX(Super Excellent)’라는 도구를 제안하였다. 그리고 최태원 회장은 ‘이윤 극대화’를 넘어 ‘행복의 극대화’를 위한 경영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마침내 2005년 SUPEX추구협의회에서 SK의 ‘행복날개’가 탄생했다.
이러한 2가지 핵심 벼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SK그룹의 성장사는 뒤돌아 볼수록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책속에서
저자의 집필 의도
SK그룹은 한국 재계 서열 2위이고 2023년 창업 70주년을 맞는다. 한국 기업사(史)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장수 기업 집단이다. 70년 전 수원에서 중소직물 공장으로 출발한 선경직물이 오늘날 이런 거대 규모의 기업 집단으로 성장한 과정과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비상한 흥미를 자아내고 있다. SK그룹은 시대 변화에 따르는 산업 구조 변화에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변신에 성공했다. 변신은 거의 천재적이었다. 섬유산업으로 출발했지만, 섬유가 사양산업으로 접어들자 재빠르게 화학산업으로 전환했으며, 화학에서 에너지 산업으로, 그리고 정보통신‧
반도체 산업으로 변신을 거듭해왔다. SK의 성장사를 보면 SK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면서도 그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에서 모두 성공했다. 창업 회장 최종건, 선대 회장 최종현, 그리고 최태원 현 회장 모두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도전 정신을 갖추고 있는 분들이다. SK 성장사는 한편의 따뜻한 휴먼드라마를 보는 느낌을 받게 된다. 최종건 창업 회장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어떤 유훈이나 유언도 없이 친제인 최종현 선대 회장에게 ‘우애와 믿음’이라는 두 단어만을 남겨주었다. 재벌급 기업 집단의 기업 승계에 유례가 없는 형식을 선택했다. 최종현 선대 회장도 창업 회장이 바랐던 우애와 신임을 충실히 실행했으며 그 역시 세상을 떠날 때 후세들에게 기업 승계에 대해 어떤 형식의 문건도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최태원 회장을 비롯한 후세 5형제(윤원, 신원, 창원, 재원)는 선대들이 만들어준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어떤 잡음도 없이 기업 승계를 마무리했다. 오늘날 SK그룹의 성장 에너지 원천은 이런 전통에서 비롯되어 있다. 재벌 성장사를 연구하는 저자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도 SK그룹 오너 가문의 그런 가풍이 어디서 온 것인가였다. 저자는 책에서 이런 점을 부각시키려 노력했다. - 저자 서문에서
2 최종건, 최종현 형제
SK 그룹의 성장사는 선경직물부터 시작한다. 선경직물은 적산(敵産, Enemy Property) 기업이었다. 적산의 일반적인 의미는 적국이 국내 또는 점령지에 남긴 재산을 말한다. 한국에서 적산이라고 하면 해방 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떠난 재산을 뜻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맥아더 장군 산하 서울의 미 군정(美軍政)은 재 조선 일본인들을 쫓아냈고 그들의 조선 내 재산 반출을 불허했다. 최종건 SK그룹 창업 회장이 선경직물을 불하받아 SK그룹의 모태로 삼게 된 배경은 꽤나 우여곡절을 거쳤다. 1930년대 말에 설립된 선경직물은 일제가 경성(서울)과 만주 일대에 직물과 주단을 공급할 목적으로 세웠다. 선경직물은 1940년 10월 수원시 평동 4번지의 공장 부지 8000평을 매입하려고 했다. 지주는 마을 유지 차철순 씨였다. 차철순 씨는 일본 기업에게 땅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토지를 일본인에게 파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최종건 회장의 부친이신 최학배 공이 등장한다. 부농으로 신망이 두터운 최학배 공은 마을에 대형 직물 공장이 들어서는 것은 마을 발전에 이익이 많다는 점을 들어 차철순 씨를 설득했다. 차철순 씨는 땅을 사려거든 자신의 소유 1만 2천 평을 모두 매입하라고 요구했다. 최학배 공은 중재안으로 선경직물이 필요로 하는 8000평을 우선 매입하고 나머지 4000평은 5년 이내에 매입한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성립시켰다. 선경직물과 차철순 씨는 1만 2천 평을 분할하지 않고 공동명의로 소유권 등기를 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런 인연으로 인해 최학배 공은 최종건 회장의 선경직물 입사를 주선할 수 있었고 훗날 이 합의는 최종건 회장이 선경직물을 불하받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SK그룹 창업 회장 최종건은 1926년 1월 30일 수원시 평동 7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 최학배 공과 모친 전주 이씨(동대, 同大)의 4남 4녀 중 장남이었다. 부친 최학배 공이 이재에 밝아 가세가 부유해 최종건 회장은 유년기를 유복하게 보냈다. 최 회장은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기질이었다. 장난이 심했던 소년 최종건에게 부친이 회초리를 들라치면 조부는 사소한 일로 자주 매를 들면 어린아이들의 호연지기를 꺾는다며 손자의 기를 한껏 살려 주었다. 최종건 회장은 보스기질이 강해 또래들이 많이 따랐다. 조부의 뜻에 따라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열 살이 되던 해 부친 최학배 공의 간청을 조부가 받아들여 일본어를 배우는 소학교에 입학했다. 최종건은 유달리 일본인 학생과 자주 싸움을 벌였고 일본인 선생과 마찰이 심했다. 소년 최종건은 은연 중 지배계급인 일본인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강했다. 최종건은 소학교 4학년 때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유급을 당했다. 1942년 수원 신풍소학교(新豊小學敎)를 졸업하고 같은 해 경성 직업학교 기계과에 입학했다. 경성 직업학교는 2년제 단기 직업학교였기 때문에 교과 과정이 실습 위주로 편성되었고 최종건은 이런 편제에 흥미를 느끼고 흠뻑 빠져들었다. 일본인 학생도 드물어 일본 학생과의 충돌도 없었다. 최종건 회장은 1944년 3월 경성 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기계 정비사 자격을 획득했다. 최종건 회장의 18세 때의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최 회장이 기계정비 분야에 기초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최 회장의 기계정비 지식은 추후 전화에 폐허가 된 선경직물의 직기(織機)를 재조립해 공장이 돌아갈 수 있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부친 최학배 공은 1944년 4월 최종건 회장을 선경직물에 입사하도록 주선했다. 최학배 공이 그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이야기한 수원시 평동 선경직물 공장 부지 8000평 매입에 도움을 주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최종건 회장의 선경직물 입사 최초 직급은 공무부 견습 기사였다. 최종건 회장의 유능함은 이때부터 빛나기 시작했다. 최 회장은 입사 반년 만에 직포반 제2조장이 되었다. 최 회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주로 여성으로 구성된 100여 명의 제직조(製織組) 직원들을 이끌면서 제직 기술(베를 짜는 방법)에 관한 기술과 경험을 쌓았다. 20대에 근접한 최 회장에게는 천금의 기회였다. 일생 중 가장 흡수성이 강한 시기였다. 훗날 최종건 회장이 부서진 공장에서 부품들을 찾아내어 직기 20대를 만들어 선경직물을 창업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에 얻은 지식과 경험이 절대적이었다.
선경 치안대 조직 1945년 8월 15일, 조국은 광복을 찾아 기쁨이 넘쳐 흘렀지만, 한편으로는 혼란과 파괴행위가 극심했다. 특히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주택이나 공장, 농장에 대한 파괴행위는 극심했다. 선경직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5년 8월 16일, 선경직물의 정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선경직물도 파괴 대상 1호일 수 있었다. 최종건 회장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록 일본인의 재산이지만 자신의 일터였고, 공장은 온전히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파괴되는 것을 막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판단했다. 최종건 회장은 선경직물 직원과 마을 청년들을 모아 선경 치안대를 조직하고 선경직물의 보호에 나섰다. 일부 청년들은 일본인 재산을 보호하는데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평소 최 회장의 신망과 따르는 사람이 많아 치안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최 회장 20세 때의 일이다. 선경직물은 미 군정이 들어서기까지 1개월 동안 고스란히 보전되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 38선 이남에 군정(軍政)을 선포하고 미 군정은 일본인 재산의 무분별한 거래로 야기되는 경제 혼란을 막기 위해 군정 법령 2호를 발동, 일본인의 재산 이양을 금지하고 이미 이양된 재산이라 할지라도 일본 정부가 포츠담 회담 선언을 수락하기로 내정한 1945년 8월 9일 이후 성립된 매매 행위에 대해서 효력을 박탈한다고 공포했다. 포츠담 회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이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독일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미국 트루먼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소련 스탈린) 회담에서 일본이 포츠담 회담 선언을 인정했기 때문에 한국(조선)은 1945년 8월 9일 독립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일본인 재산에 대한 거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퇴각하면서 한 푼이라도 건지려 했고 횡재를 꿈꾸는 조선인들 사이에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일부 한국인(조선인)들은 횡재를 하기도 했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일부 생산 공장에서는 조선인들의 자치 위원회가 복수로 조직되어 조선인들끼리 경영권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선경직물 역시 1945년 11월 11일 적산(일본인 재산)으로 지정되고 미 군정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그해 12월, 미 군정은 적산 관리요령에 의거 선경직물 관리인으로 황청하, 김덕유 두 사람을 관리인으로 위촉했다. 두 사람은 조선인으로 각각 1백 주의 주주였다. 두 사람은 서울 사람이었다. 최종건 회장은 선경직물의 정상적인 가동을 원했다. 그러나 공장을 가동하려면 두 관리인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최종건 회장은 서울로 올라와 두 관리인을 만나 공장을 정상가동 시킬 것을 요구했다. 관리인 김덕유는 ‘일단 관망해 보자’는 소극적인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두 관리인들에게는 최종건 회장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광복 직후 혼란기에 최종건 회장이 선경 치안대를 조직, 그 리더로 공장을 지켜온 것이 고마운 것이 아니라 위압적인 존재로 보였다. 그러나 두 주주는 최 회장의 열의와 집념을 언제까지나 무시할 수 없어 결국 최종건 회장을 생산부장으로 임명해 공장 가동에 들어가게 했다. 1946년 초 최 회장이 만 20세 때 일이다. 1946년 2월 선경직물은 조업을 재개했고 최 회장은 방치되었던 직기들을 점검하고 수리했다. 두 주주는 공장장에 황철하(황청하 주주의 실제)와 총무부장에 표덕은(김덕유 주주 생질)을 임명했으나 두 사람은 직물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선경직물은 최종건 회장의 책임하에 운영되었다. 1947년 직물 업계는 호황기를 맞이했다. 미 군정이 해방을 맞이한 한국민들에게 생활의 기본이 되는 의류를 원활하게 지원해 준다는 정책과 업계의 자율적인 노력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선경직물은 급증하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작업반을 주야간으로 편성하고 24시간 가동했다. 북한은 1948년 5월 14일 예고 없이 남한에 전기 공급을 끊는 단전(斷電) 조치를 했다. 직물 업계 생산 활동은 위축되었다. 선경직물은 자가발전 시설이 완비되어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정상가동을 계속했다. 선경직물은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따라 미 군정청으로부터 대한민국 정부에 이관되어 국무총리 직속 기관인 관재청으로 넘어갔다. 1949년 3월, 만 23세가 된 최종건 회장은 교하 노(盧)씨 노순애 여사를 아내로 맞이한다. 최종건 회장은 그해 여름 선경직물 생산부장직을 사퇴했다. 사퇴의 사유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선경직물이 1947년 수준의 생산량을 보였던 것을 감안하면 의외의 선택이었다. 최종건 회장은 퇴직 후 원사(原絲) 도매업에 뛰어들었다. 여기서도 최종건 회장의 수완은 뛰어났다. 원사 도매업계 경쟁은 치열하다. 시장 흐름은 변화무쌍하다. 최 회장은 남다른 사교성과 신용을 바탕으로 외상 거래가 가능할 정도가 됐다. 최 회장은 원사의 비수기와 성수기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1950년 6월 최 회장은 원사 확보의 결정적인 시기라고 판단, 선경직물 퇴직 후 모은 자금을 총동원해 원사를 확보했다. 최 회장은 원사 열 한고리를 확보해 서울시 동대문구 창신동에 있는 창고에 보관했다. 원사 열한 고리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물량이었다. 그날이 6월 24일이었다. 다음날 6월 25일 북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고 최 회장의 원사 확보를 통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해 보겠다는 꿈은 깨지고 말았다. 최 회장은 일신의 안전이 시급한 문제였다. 최 회장은 수원 인근의 친척 집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수원이 북 인민군에게 점령당하자 어느 좌익 인사의 밀고로 최 회장은 1950년 8월 체포되어 수원시 팔달면 내무서로 압송되었다. 최 회장의 죄명은 ‘반동분자’였다. 유엔(UN)군의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은 최 회장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전세의 불리함을 느낀 인민군이 남한 우익인사들을 학살하기 시작하는 시점인 것이다. 최종건 회장은 대동청년단 총무 이성길 씨의 도움으로 수원 내무서를 탈출했다. 사지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최 회장의 탈출 후 행보가 눈길을 끈다. 처음 간 곳이 선경직물이었다. 공장은 9월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공장 골조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한편 최 회장은 서울 창신동 창고에 보관해 놓은 원사 열한 고리를 찾아 나섰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원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최종건 회장의 사업 생애 중 섬유 산업을 떠나 이종 사업에 손을 대고 방황하는 시기가 이때 시작되었다. 최 회장은 인견사 열한 고리를 동대문 시장에서 매각하고 꽤 큰돈을 쥐게 되었다. 그리고 전시에 유흥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고, 석유 판매, 비료 판매 사업도 했다. 전시 하의 석유나 비료는 암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초보자는 이 시장에서 성공하기가 쉽지 않았다. 최 회장은 자신이 모은 자금은 물론 부친이 도와준 자금까지 모두 잃고 말았다. 최 회장은 이 때문에 부친 최학배 공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부친의 신뢰를 상실했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최종건 회장이 여러 사업을 하는 중에도 그의 진정한 관심은 선경직물에 꽂혀있었다. 그가 청춘을 바쳤고 강한 애정을 느끼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거의 매일같이 시간을 내어 선경직물 공장을 둘러보았고, 잿더미를 헤치고 폭격으로 녹아내린 직기의 부품을 만져보기도 했다.
동생 최종현의 아름다운 양보 최종건 회장은 53년 어느 날 우리 섬유 산업사에 남는 위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최 회장은 자신의 손으로 선경직물을 가동시켜 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청년 최종건에게는 자금도 적산인 선경직물을 장악할 수 있는 법적 지위도 없었다. 그러나 최종건 회장은 결심했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우선 법적 지위를 가져야 했다. 최 회장은 관제청으로부터 선경직물을 불하받는 것이 필수였다. 최 회장은 수원 일대에서 관제청 통으로 이름난 방구현 씨를 찾아 만났다. 선경직물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미 군정에서 대한민국 국무총리 산하로 이관되어 관제청이 관리하고 있었다. 관제청은 적산을 ‘귀속재산’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불하 업무를 다루는 정부기관이다. ‘귀속재산처리법’은 귀속재산의 임차인 또는 관리인에게 ‘그 재산을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서 보존하며 그 재산의 가치 또는 효용을 감소시키지 아니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6.25 직전 관리인이었던 황청하나 김덕유는 9.18 수복 이후 선경직물의 재산의 가치나 효용성을 보존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번도 선경직물 공장을 찾지도 않았다. 그들은 선경직물의 관리 책임을 포기한 상태였다. 관제청 통이었던 방구현 씨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방구현 씨는 선경직물을 차철순 씨의 명의로 불하받아 이를 최종건 회장에게 넘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차철순 씨는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인물이다. 선경직물이 1944년 수원의 공장 부지 8000평을 매입할 당시 1만 2천 평의 땅을 소유한 지주였고 나머지 4000평을 5년 이내 매입하기로 합의하고 공동명의로 소유권 등기를 한 바 있다. 방구현 씨는 차철순 씨로부터 최종건 회장이 나머지 4000평을 매입하는 조건이면 선경직물 불하를 승낙하겠다는 합의를 이끌어낸 상태였다. 차철순 씨는 4000평의 땅을 처분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최종건 회장은 선경직물 불하가 목표였기에 두 사람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문제는 4000평의 매입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최종건 회장은 연이은 사업 실패로 매입자금이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부친 최학배 공에게 지원을 바랬다. 최학배 공은 두 가지 이슈로 고민에 빠졌다. 하나는 차남 최종현의 유학자금을 마련해주는 것이고 둘째는 최종건 회장의 사업 자금을 지원해주는 것이었다. 둘 다 중요하다. 최종현은 1950년 3월 수원 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5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화학과에 입학했고, 1953년 초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젊은 엘리트들에게 미국 유학은 꿈이었고 이상이었다. 최종현은 학구적이었다. 학문의 선진국 미국 대학에서 좀 더 높은 수준의 공부를 꿈꾸고 있었다. 부친 최학배 공은 차남 유학을 도와주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장남에게는 이미 사업 자금을 지원해 준 바 있고 최근 사업 실패를 보면서 무언가 믿음이 덜 가는 것이었다. 차남 최종현은 아버지의 고민을 알아차렸다. 최종현은 어느 날 “아버님, 저의 유학은 1, 2년 늦어도 됩니다. 형의 사업 자금은 늦출 여유가 없습니다. 사업은 때를 놓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먼저 형의 사업 자금을 주시고 형의 사업이 잘되면 그때 유학가도 되겠습니다.” 라고 부친에게 간청했다. 부친 최학배 공은 차남의 아름다운 우애 어린 간청을 받아들여 최종건 회장에게 20만 환을 지원했다. 꽤 거금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최종현 회장이 자신의 유학을 지체시키면서도 형의 사업 자금을 지원케 해준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 아름다운 양보는 추후 SK그룹이 대재벌로 성장하면서 기업승계 과정이 아무런 다툼없이 이어져 온 계기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최종건 회장은 1953년 4월 8일 선경직물 공장 부지 1만 2천 평 중 4000평을 매입하고 차철순과 공동명의로 “귀속재산 선경직물(주) 우선 매수원”을 관제청에 제출했다. 1953년 7월 27일 최종건 회장은 관제청에서 나온 선경직물의 “귀속재산 매각통지서”를 받았다. 매각통지서에는 매각 대금을 130만 환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엄청난 거금이었다. 선경직물의 매각 대금이 그토록 거금인 것은 시가 감정이 잘못된 데다 그간 체납된 임대료가 가산되었기 때문이다. 매각 대금이 높게 책정되었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한번 결정된 매각 대금은 포기할 수는 있어도 이의 신청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 규정이었다. 매각 대금이 높게 책정됨에 따라 두 가지 어려운 문제가 생겨났다. 하나는 동업 조건으로 사업 자금을 지원하기로 한 방구현씨가 높은 매각 대금에 질려 약속을 파기한 것이다. 하나는 매각 대금 전체를 떠안게 된 최 회장의 대응 능력의 한계였다. 계약 체결까지는 3주일의 여유밖에 없었다. 그 기간을 넘기면 계약은 무효가 된다. 최종건 회장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매각 대금의 10%만 내면 매수 계약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130만 환의 10%, 13만 환도 만만찮은 돈이다. 당시 선경직물은 원사를 구입하는데도 급급한 형편이었다. 최종건 회장은 고민 끝에 재조립이 불가능한 직기를 고철로 처분하고 기관실의 보일러와 발전기를 팔기로 결정했다. 물론 그렇게 한다 해도 13만 환에는 어림도 없는 돈이었다. 그런데 직기나 발전기 등을 처분하는데도 문제가 있었다. 불하 전까지는 정부 재산이기 때문에 법률상으로 문제가 있었다. 고민에 빠져있는 최종건 회장에게 희소식이 왔다. 지주 차철순 씨로부터였다. 차철순 씨는 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지가증권(地價證券)으로 귀속재산 매수계약금을 우선 납부하고 최종건 회장이 1년 내에 전액을 반제해주는 내용이었다. 당시 관제청은 불하 대금 납부에 지가증권으로 대신 할 수 있도록 했고, 액면가대로 인정했다. 지가증권이란 1951년 농지개혁법에 따라 정부가 매수한 토지의 보상금으로 지주에게 발행한 유가증권이다. 당시 지가증권은 액면가의 50% 이하로 거래되는 곳이 허다했다. 차철순 씨는 지가증권을 액면가로 팔 수 있었고 최 회장은 매수 대금을 납부할 수 있어 두 사람에게 이익이 되었다. 1953년 8월 14일, 최종건 회장은 선경직물 매입 대금 130만 환의 10%인 13만 환을 지가증권으로 납부하고, 10년 분납 조건으로 선경직물 주식회사 주식 50만 주 중 200주(황청하, 김덕유 지분 각 100주)를 제외한 49만 9,800주를 차철순 씨와 공동명의로 매수한다는 내용의 귀속재산 매수 계약을 체결했다. 꿈이 현실로 실현되었다. 선경직물은 9월 들어 자리를 잡아갔다. 추석을 앞두고 최종건 회장은 그동안 비축해 둔 인조견 400필을 한꺼번에 출하했다. 당시 한 필당 가격은 900환, 일시에 36만 환의 거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최종건 회장은 밀린 노임부터 해결했다. 최 회장은 차철순 씨에게 지가증권으로 빌린 13만 환 전액을 갚았다. 그리고 차철순 씨로부터 선경직물 공동 매수인으로서의 권리 포기 각서를 받았다. 최종건 회장은 이로써 선경직물의 단독 소유자가 되었다. 한국 섬유산업 성장사(史)의 한 페이지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최종건 회장은 1953년 10월 1일을 선경직물 창립일로 선포했다. 현 SK그룹의 창립기념일은 4월 8일로 변경됐고, 2023년은 SK그룹 창업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