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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왜 도시공동체를 말하는가? 황희숙

Ⅰ. 근대의 기획과 공동체
모더니티의 재조명
-불확실성의 퇴조와 재현 현상으로 본 근대 황희숙
모더니즘 건축의 승리와 환상-공동체의 부재 전병권

Ⅱ. 이데올로기로서의 근대화와 도시의 모습
라비린스의 교훈-근대 도시이념의 반성 전병권
도무스 복합체-도시 비극의 시작 박한선
번영하는 도시와 영양주의 최경숙
식민지 근대 도시와 시인의 초상 심재휘

Ⅲ. 도시공동체 - 삶과 생활양식의 변화
도시의 두 얼굴-기아와 비만의 영양학 최경숙
도시공동체의 그늘과 ‘도시시’ 심재휘
병든 도시의 냄새-혐오라는 이름의 미아즈마 박한선
인간종중심주의와 자연 지배의 기획
-<침묵의 봄>의 경고를 돌아보며 황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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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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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는 국가, 시장과 더불어 인류사회에 ‘세 번째의 기둥(third pillar)’ 역할을 한다고 흔히 말해진다. 전 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위기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안전판과 보호막을 찾고, 더욱 강력한 정부에 의지하려 한다. 그렇지만 그런 불안과 혼란의 시기를 헤쳐나갈 때 필요한 것은, ‘리바이어던’ 같이 견제받지 않는 권력보다는, 시민사회와 공동체의 역량 발휘를 통한 대응과 조정 역할일 것이다. 사회적·경제적 위기의 순간, 국가의 영역 확대도 중요하겠지만 동시에, 사회의 여러 단위와 수준에서 실재하는 공동체의 개입이 중요하다. 그래야 자칫 비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쉬운 국가권력을 견제할 수 있고, 시민이 전통과 규범에 억눌리지 않으면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국내에서는 ‘절망의 죽음’이라 불리는 자살이 증가하고 있고 자산의 양극화가 심해짐에 따라 부자는 더 부자로, 빈자는 더 빈자로 바뀌어 가고 있다. 경제적 약자의 고용불안과 소득감소와 같은 심각한 경제 현상과 더불어, 사회적 불안과 공포가 확산되고, 가족 공동체 내에서도 구성원 사이에 불화가 빚어지고 우울증을 겪는 사례가 증가했다고 보도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특정 인종과 종교 단체를 비롯한 사회 집단에 대한 편가르기 및 차별과 혐오 같은 사회현상이 여러 지역에서 심화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이 우리 시대가 직면한 공동체의 위기이다.

도시와 공동체는 분과학문 연구자들이 독립영역에서만 다루기에 너무나 복합적인 일이 벌어지는 공간이다. 이제까지 공동체 연구와 도시 연구는 융합되지 못했다. 공동체는 철학, 정치경제, 환경문제, 지역문제 또는 민속연구 등의 차원에서 논의되었고, 도시는 정치경제, 사회문제, 건축과 도시개발 맥락에서 각각 별도로 조명되어 왔다. 도시공동체의 현황 진단과 해결책 제시라는 과제를 융합학문적 시각에서 접근해 보고자, 몇 명의 연구자들이 모여 <미래의 도시공동체를 위한 인터싸이언스> 연구팀을 만들었다. 우리 연구진이 기획한 연구과제는 도시공동체 문제가 개별 분과의 학문적 접근법, 진단과 분석법, 방향과 대안 제시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도시공동체 구성원들이 겪는 양극화와 분열, 좌절과 분노는 어떤 한 전공 분야의 연구로 해결책을 모색하기 어렵기에 여섯 분야의 전공자들이 모인 것이다. 우리는 ‘도시공동체’의 문제를 기술하며 그 원인을 분석하고, 사회적 연대성이 회복되고 연결된 ‘열린 공동체’라는 대안과 그 구축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싶었다.

우리 융복합연구팀은 1년차에 공동체의 쇠락과 붕괴 현상, 도시공동체 안에서 목도할 수 있는 분노와 혐오의 사회병리적 증상들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하고자 했다. 2년차에는 그 원인인, 통합과 번영이라는 근대성의 이데올로기를 사회학적으로 분석, 비판하려 했다. 이어서 3년차에는 바람직한 미래공동체 구축을 위해서, 문화기술학적 차원의 제안을 내놓을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 따라 우리 융복합연구팀에서 그동안 연구한 성과가 바로 이 <도시공동체 연구 총서>로서 출간된 세 권의 공저다.

2022년도의 연구 과제는 <도시 사회학적 고찰 – 통합과 번영의 환상>이다. 2022년 8월의 워크숍에서 연구자들은 환경위기에 대해 또 중국에서의 근대 사유에 대해 전문가의 초청 강연을 듣고 토론했다. 12월에 개최한 제2차 학술대회의 대주제는 <근대성과 도시공동체>다. 여기서 연구진은 모더니즘 건축, 도무스 복합체, 불확실성의 퇴조와 재현으로 본 모더니티, 식민지 근대도시와 시인의 초상, 기아와 비만의 영양학으로 본 도시의 두 얼굴, 공동체의 문화다양성과 억압의 양상 등을 주제로 한 논문들을 발표했다. 이 학술대회에서의 발표와 토론을 거쳐 연구자들은 두 번째 공저, <통합과 번영의 환상 – 도시 사회학>을 출간하게 되었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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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재조명

-불확실성의 퇴조와 재현 현상으로 본 근대

황희숙

1. 오래된 근대, 낯선 근대성

오래전 시인 황지우는 “끔찍한 모더니티”라는 표현을 쓴 바 있다. 서양의 지성사에서 ‘모더니티(modernity)’, 즉 ‘근대성’은 개인이 주체로서 해방된 것 특히 중세의 권위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의미하기에, “끔찍한 모더니티”라는 말이 당혹스럽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근대성을 이성적 주체의 자율성과 진보의 관점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근대는, 정치 차원에서는 국민국가의 등장, 경제 차원에서 자본주의와 근대산업의 등장, 또 사회적 측면에서 시민사회와 연관되어 있다. 그 각각의 차원에서 폭력과 통제의 메커니즘들도 작용했기에, 근대는 성장, 진보와 더불어 갈등과 위기의 양상을 드러냈다. 황지우가 말한 모더니티의 ‘끔찍함’도 “일제의 식민주의 모델과 그것을 정신역학적으로 계승한 60년대의 군사적인 근대화 프로젝트에 내포되어 있는 강제적인 힘”에 기인하는 것이다. “끔찍한 모더니티”란 외부에서 이식된 근대의 기제와 그 폭력성에 대한 시인의 절망적 경험을 표현한다.

근대는 전통사회의 족쇄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이성에 의한 계몽의 시대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모더니티는 진보와 극복의 개념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근대는 제국주의의 팽창, 식민주의(서구화, 지정학적 총체화)의 시대를 의미하고, 또 냉전 이후 근대화(론)(modernization)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시대로 기억된다. 발전과 성장을 궁극가치로 하는 서구중심의 근대적 전통을 붕괴시키고 대체할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탈근대(성)’의 논의는 이런 평가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근대성’은 단일한 유형이 아닌 것이다. 근대와 근대성이 진행되고 발생한 영역은 다층적이고, 지역과 국가에 따라 근대와 근대성의 경험과 확산의 시간도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지역과 사회마다 달리 구체화 되었겠으나 그 각각의 ‘모더니티’를 구성하는 본질적 특징, 근대에 의해 대변되는 ‘근대적인 가치’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모더니티에 대한 논의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몇 차례 일어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모더니티의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해 공동체의 문제와 관련해 다시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전통, 권위, 공동체의 쇠퇴를 불러온 근대가 언제 시작되었고, 또 근대성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물으려는 것이다. 근대와 근대성을 부정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고, ‘탈근대(탈근대성)’라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진보와 성장의 이상, 그리고 과학에 대한 신뢰는 잘못된 것인가? 근대의 기획, 근대성의 이념이 주체의 자율성을 내세움으로써, 개인의 이기심이 팽배해지고, 사(私)영역의 다툼으로 가득한 사회가 도래하고, 그로 인해서 공공성과 공동선이 소실되어 버린 것일까? 그렇다면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유지 또는 재건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말해야만 할까?

근대는 언제 시작되었고, 근대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역사적 시기로서의 서구의 ‘근대’는 16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구획되기도 한다. 더 좁게는 19세기 서구산업화 이후 현재까지의 시기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 ‘근대(적)(modern)’이란 단어는 5세기에도 사용되었고, 17세기에 ‘모더니티’는 ‘고대적’이란 단어와 대조되어 ‘현시대’를 의미하는 말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모더니티의 국면들은 그 용어를 사용하는 학자에 따라 16~18세기에 국한되기도 하고, 18세기말(1789~1794)의 프랑스 혁명 이후를 가리키기도 하고, 20세기부터 현재까지를 다 포섭하기도 하는 것 같다. 동어반복적이지만 ‘모더니티’는 근대 역사에서 두드러진 특정 전통, ‘근대적인 조건’, 근대 사회와 그 안의 삶이 갖는 독자적인 형태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객관적 과학, 보편적인 도덕과 법을 발전시키려 했고, 이로부터 모더니티는 진보의 원리, 과학과 기술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 이성에 대한 숭배와 인본주의의 틀 안에서의 자유의 이상과 관련된 계몽주의자의 기획을 가리키게 되었다. 기든스(A. Giddens)는 “‘근대성’이란 대략 17세기경부터 유럽에서 시작되어 점차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사회생활이나 조직의 양식을 의미한다.”라고 근대성의 시기를 특정한 후, 자본주의, 산업주의, 군사적인 힘, 감시라는 네 가지 제도적 차원과 그것들 사이의 상호연관성으로 근대성을 정의했다.

모더니티 논의는 사회적·사상적 국면과 문화·예술적 국면으로 나뉜다.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A. Rimbaud)가 “절대적으로 근대적(현재적)이어야 한다”라고 말했을 때, 그 근대성(현대성)이 정치 경제적 근대성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근대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합리주의(이성주의)와 과학주의, 진보적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19~20세기의 예술적 모더니즘은 그런 가치, 지향점을 거스르기도 한다. 즉 이성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예에서 보듯 ‘반근대적 충동’을 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사상적 모더니티를 옹호하면서도, 이 문화적 모더니즘과 미적인 모더니티를 배격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이 글에서 예술적, 미적 근대(성)은 다루지 않는다.

서양철학사에서 근대성에 대한 대표적 비판자는 하이데거(M. Heidegger) 그리고 그 이전의 니체(F. W. Nietzsche)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계승한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 같은 포스트 모더니스트를 비판하기 위해 하버마스(J. Habermas)는 모더니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공식화한 모더니티 프로젝트는 객관적 과학, 보편적 도덕과 법, 자율적 예술을 내면의 논리에 따라 발전시키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동시에 이 프로젝트는 난해한 형태에서 이러한 각 영역의 인지적 잠재력을 해방하는 것을 의도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전문화된 문화의 축적을 일상생활의 풍요로움, 즉 일상적인 사회생활의 합리적 조직화를 위해 활용하고자 했다.

하버마스는 근대성의 기본 이념인 사회의 합리화와 인간해방의 기치는 포기될 수 없고, 특정 형태의 유토피아, 특정한 형태의 합리성을 비판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하면서, 모더니티를 ‘미완의 기획’, 즉 실패한 기획이 아니라 오히려 완수되어야 할 과제로 규정한다. 모더니티가 실패했고 그것이 불러일으킨 유토피아적인 추동력은 진압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신)보수주의라고 비판했다. 하버마스를 좇는다면 우리가 거부해야 하는 것은 근대의 계몽주의적 기획이 아니라, 오히려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신)보수주의의 이데올로기다.

반면 근대성을 지배와 폭력으로 얼룩진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근대성의 탄생을 1492년으로 보는 엔리케 두셀(E. Dussel)은, 유럽중심적 근대성이 억압한 ‘타자의 해방’을 추구하고자 한다. 두셀의 관점에서 콜럼버스는 최초의 ‘근대인’이고 그와 더불어 근대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 관점은 이성에 의한 해방이라는 근대성의 ‘개념’이 다른 문화에 대한 지배와 폭력을 은폐한다는 ‘근대성 신화’를 폭로하고 있다. 근대성 신화에는 ‘유럽중심주의’가 깔려있고, ‘발전주의 오류’가 깔려 있다. 하지만 두셀의 해방철학의 관점에서도 긍정적인 의미의 ‘근대성’, 즉 이성에 의한 합리적 해방이 전면 부정되고 있지는 않다. 다만 부정적이고 신화적인 의미의 근대성, 즉 비이성적인 폭력의 실천을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 타자의 이성을 긍정하고, 근대성의 폭력을 비합리적인 것으로서 비판하고자 하는, 해방기획으로서의 ‘통근대성(transmodernidad)’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견 근대성의 극복을 말하지만, 그것은 부정된 타자성을 포함시키는 기획에 의거해 근대성 개념을 더 완전히 실현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근대성에 대한 입장들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겠다. 첫째는 근대성의 기획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이것은 근대성을 옹호하고 완수해나가고자 한다. 둘째는 통약불가능성을 지지하는 상대주의와 비합리주의, 낭만주의, 허무주의 등의 입장에서 근대성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이다. 셋째는 근대성의 기획을 수정, 또는 극복하자는 입장이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 세 번째 입장은, 첫 번째 입장에 포섭되거나, 첫 번째 입장을 수반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위 엔리케 두셀의 입장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세 번째 입장 중에는, 두 번째 입장인 탈근대의 노선 상에 자리잡으면서도 근대를 극복하기보다는 ‘수용하면서 심화’하고, 그럼으로써 넘어서고자 하는 조금 더 복잡한 변양이 있다. 이것은 ??근대성의 종말??에서 심화로서의 넘어서기, 즉 ‘심화적 극복(Verwindung)’을 말한 쟌니 바티모(G. Vattimo)의 입장이다.

다양한 주장들의 겹침 현상을 고려해 볼 때 우리가 근대성 자체에 대한 더 정밀한 분석에서 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탈근대(성)’도, 근대성의 ‘심화적 극복’이나 ‘통근대성’도 적절하게 근대성의 지형도에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성은 이성의 권위와 주체의 자유(자율성)이라는 이상으로 대변된다. 서양의 근, 현대를 특징짓는 것이 인간의 이성 중심적인, 비판적 시대정신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대성이 그렇게 단일한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가 혼재된 시대정신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근대성의 국면에 현재, 즉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단계가 포함될 수도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에서 근대적 지식과 근대사회의 삶을 확실성/불확실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조망하려 한다. 근대에 ‘확실한 지식’과 ‘표준화되고 제도화된 사회 생활’의 추구로 인해 불확실성이 퇴조하였다. 하지만 다시 (근대와 이어진) 현대에 불확실성의 고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필자는 본다. 불확실성의 썰물과 밀물(ebb and flood, 조수 간만) 현상으로 근대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밀물썰물 신화>와의 유비가 가능해진다. 여기서 바다 동굴로 드나들어 밀물과 썰물이라는 결과를 일으키는 메기는 근대의 표준화라는 이상, 즉 확실한 지식과 그리고 안전한 근대국가와 공동체를 표상하는 존재로 볼 수 있다. 불확실성의 수면이 낮아지는 썰물 때는 지식(과학적 지식)에 대한 신뢰, 공고한 국가의 기능이나 사회 공동체에 대한 복종이 세상에서 유통되고 작동하고 있을 때며, 불확실성의 수면이 상승하는 밀물 때는 지식에 대한 믿음과 공고한 공동체의 기능이 쇠퇴하고 침잠할 때라는 가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