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자키 준이치로는 1886년 도쿄에서 태어나 1965년 생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이 자신만의 예술을 추구하며 작품 활동을 한 일본 탐미주의의 대표적 작가입니다. 1910년 스물다섯 살에 단편 〈문신〉으로 화려하게 등단한 이후, 〈소년〉, 〈열쇠〉, 〈기린〉 등의 단편 소설, 《ㅤㅅㅠㄴ킨 이야기》, 《만(卍)》, 《세설》, 《치인의 사랑》, 《미친 노인의 사랑》 등의 장편 소설을 비롯해 희곡, 평론, 번역 등 여러 분야에서 지칠 줄 모르는 창작욕과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인어의 비탄〉과 〈마술사〉는 1917년 각각 잡지 《주오코론》과 《신소설》에 발표된 단편으로 다니자키가 서른두 살에 쓴 비교적 초기 작품입니다. 〈인어의 비탄〉은 같은 해 화가 혼마 구니오의 그림과 함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지만 삽화 문제로 판매 금지 처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인 1919년 슌요도에서 〈마술사〉와 함께 묶어 미즈시마 니오의 삽화로 새로 출간한 단편집이 《인어의 비탄・마술사》(이하 《인어의 비탄》)입니다. 화려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의 〈인어의 비탄〉, 기괴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의 〈마술사〉는 아름다움을 향한 다니자키의 한없는 동경이 과감하고 환상적으로 그려진 단편입니다. 아름다움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고 기꺼이 파멸해 가는 작품 속의 두 인물에게서 청년 다니자키의 흥분과 고뇌가 느껴지는 듯한 작품입니다. 물론 작품 자체만으로도 무척 흥미로웠지만, 제가 이 책을 출간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책 속에 실린 미즈시마의 그림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도쿄에서 열린 《묘한 그림》이라는 전시회에 관한 기사를 보다가 흑백의 인어 그림 몇 점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다니자키의 단편 〈인어의 비탄〉에 실린 그림이라는 것을 알고 바로 작품을 찾아서 읽었습니다. 스토리 자체가 흥미로운 작품은 아니지만 화려하고 환상적인 다니자키의 문장들은 금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그리고 미즈시마의 그림은 그런 다니자키의 문장을 더한층 선명한 이미지로 다가오게 해, 그림만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백 년 전의 작품이지만 일본에도 몇몇 출판사에서 초판 형태로 복간이 되어 있어 이 기회에 국내에도 초판 삽화와 함께 소개해 보고 싶었습니다. 문학과 미술은 오래전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이 번역서를 출간하게 된 계기도 그림인 만큼 이 작품의 삽화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이 작품집이 발표되었을 무렵의 일본은 대중문화가 번성하고 책과 잡지 등 출판물이 성행하던 다이쇼 시대 초기로, 문학계에서는 그때까지 일본 문단을 주도해 오던 자연주의에 대한 반발로 다양한 사조의 문학 작품이 등장하던 때였습니다. 그 무렵 문단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작가 중 하나가 영국의 탐미주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리시마 다케오 등 여러 일본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다니자키는 학창 시절에 와일드의 작품에 심취해 와일드의 번안 소설과 번역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인어의 비탄》이 출간되었을 때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와 비견되기도 했는데, 책 속의 삽화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와일드의 《살로메》는 1909년 모리 오가이의 번역으로 처음 일본에 소개된 이후로 여러 번역본이 나왔고, 1913년에는 도쿄에서 상연되기도 했습니다. 삽화를 그린 오브리 비어즐리 역시 그 무렵 일본 예술계에 큰 영향을 준 화가로, 잡지에서 특집으로 다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인어의 비탄》에도 《살로메》의 삽화가 언급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니자키에게도 강한 인상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살로메》의 삽화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어의 비탄》 속 삽화는 다니자키가 미즈시마 니오에게 직접 요청하여 그려진 그림입니다. 미즈시마는 도쿄미술학교에서 일본화를 전공한 화가로, 소설이나 희곡을 쓰는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1913년부터 오사카 아사히신문에 연재소설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아사히 신문과 잡지 등에 인어 삽화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아래의 인어 그림은 1915년 아사히 신문에 실린 그림으로, 4년 후에 그려진 《인어의 비탄》 속 인어와 조금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 후로도 그는 다니자키의 몇몇 소설에 삽화를 그렸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탄생한 그림은 그 당시 소설 삽화와는 꽤 다른 느낌입니다. 메이지 시대까지만 해도 삽화는 전통적인 우키요에 기법의 그림이 많아 서양화 화가들의 그림은 대중의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메이지 시대가 끝나갈 무렵부터 서서히 서양화 화가들의 삽화가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미즈시마의 그림과 함께 새롭게 출간된 《인어의 비탄》은 와일드의 《살로메》와 비견되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실제로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고금 이래로 이 책에 비견될 만한 것은 비어즐리가 삽화를 그린 와일드의 뛰어난 작품을 빼고는 하나도 없다” 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삽화를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보기보다 소설을 읽을 때 잠깐 즐기는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던 제가 우연히 접한 오래된 삽화에 끌려 그 그림이 실린 책을 찾아 읽고, 이렇게 번역서까지 내게 되었으니 개인적으로 의미 깊고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다니자키가 문장으로만 표현한, 실재하지 않는 환상 속의 세계를 미즈시마는 자신만의 이미지로 그려 냈습니다.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도 저마다 자신만의 상상 속 세계를 그리며 작품을 감상해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운 독서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책속에서
[P.11] 옛날 먼 옛날, 아직 애신각라 씨의 왕조가 유월의 모란처럼 빛나게 번영하던 시절, 중국의 대도시 남경에 맹세도라고 하는 젊디젊은 귀공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P. 29] 왠지 귀에 익지 않은 묘한 목소리를 내는 서양인의 입술에서 ‘인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귀공자는 자신의 가슴이 저도 모르게 두근두근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물론 태어나서 한 번도 인어라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P. 30] 인간은 진주를 사랑할 수는 없지만, 인어를 보게 되면 어느 누구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주에는 차가운 광택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인어는 요려 (妖麗) 한 자태 속에 뜨거운 눈물과 따스한 심장과 신비로운 지혜를 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