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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내일 따위는 없어요

1장 시칠리아 원주민과 페니키아인의 등장 _기원전 800년
2장 그리스 이주민의 정착과 참주의 시대 _기원전 734~212년
3장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시칠리아 _기원전 212~기원후 468년
4장 반달, 동고트, 비잔틴의 통치가 이어진 시칠리아 _468~902년
5장 사라센의 시칠리아 정복과 통치 _902~1072년
6장 프랑스 노르만의 시칠리아 통치 _1072~1191년
7장 독일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시칠리아 통치 _1191~1268년
8장 프랑스 카페 왕조의 시칠리아 통치 _1268~1302년
9장 스페인 아라곤 왕조의 시칠리아 통치 _1302~1713년
10장 사보이아, 합스부르크, 부르봉 왕조의 통치 _1713~1861년
11장 통일 이탈리아로 편입된 시칠리아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통치 _1861~1946년
12장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과 마피아의 등장 _1943년
13장 자치 구역으로 선포된 시칠리아와 오늘의 모습 _1946년

나가며: 시칠리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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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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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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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이 섬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수없이 짓밟힌 땅, 그 위에 남겨진 슬픔과 희망의 발자국
인문학자 김상근과 함께 시칠리아의 역사를 걷다

지중해의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고, 색깔도 맛도 아름다운 음식 위로 햇살이 부서진다. 그리스, 로마, 스페인, 이슬람 등 다양한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어 볼거리도 다채롭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이곳을 처음 찾아왔을 때 자연에 감탄하며 “모든 섬의 여왕”이라고 말했다. 아프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다리이자, 그리스인들이 지중해의 거대한 곡물 창고라고 불렀던 곳. 바로 이탈리아반도 아래쪽에 있는 삼각형 모양의 섬, 시칠리아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칠리아는 활화산의 열기와 바짝 마른 햇볕 아래 끊임없는 목마름에 시달리는 곳이자, 마피아가 탄생한 곳이며, 무려 열네 번에 걸친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절망의 역사를 품은 곳이다. 대륙 간 다리라는 것은 곧 수많은 사람이 밟고 건넜다는 뜻이고, 다양한 문명의 흔적이 남았다는 것은 여러 세력의 지배를 겪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와 삶을 연결하는 인문학자이자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시리즈의 저자 김상근 교수는 시칠리아 사람들의 얼굴에서 이러한 이중성을 목격하고, 시리즈의 네 번째 신간 《시칠리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를 썼다.

“뒷골목을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그 여행은 미완성이다”
낙원보다 아름다운 섬, 시칠리아의 이면

2,800년이라는 유구한 세월 동안 시칠리아는 단 한 번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거나 독자적인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기원전 800년경 시칠리아에 처음 식민지를 개척한 페니키아인들에 이어 그리스, 로마, 반달족, 이슬람, 프랑스 노르만, 호엔슈타우펜 왕조, 카페 왕조, 아라곤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부르봉 왕조 등이 차례로 찾아와 그 땅을 유린하고 약탈했다. 기원전 6세기에는 잔인한 참주가 공포 정치를 펼쳤고, 10세기에는 이슬람 문명의 지배로 새로운 종교에 적응해야 했다. 13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가 법치를 도입하고 근대 국가의 발판을 놓았지만, 곧 프랑스 카페 왕조가 달려와 중세 봉건 제도로 되돌려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연합국과 추축국의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각국의 군화가 발자국을 남기고 떠날 때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칠리아 주민들이 입을 뿐이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시칠리아의 다사다난한 역사를 통찰하는 한편, 그 섬의 ‘진짜 얼굴’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시칠리아의 어느 어촌에서 만난 어부의 사진을 표지로 택했다. 경계하는 눈동자와 가늘게 떨리는 입술, 그러나 깊게 팬 주름마다 서려 있는 용기와 강인함. 그의 얼굴은 곧 시칠리아의 모습이다. 2,800년 동안 체념과 희망 사이를 오갔던 시칠리아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상태일까? 일견 무심해 보이지만 눈동자에는 긴장과 경계심이 가득한 그들의 얼굴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고, 또 느껴야 하는가? 시칠리아는 슬픔의 땅이다. 수탈과 압제에 시달린 땅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 땅은 정치적, 경제적인 고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땅의 역사는 결국 그 땅에 사는 인간에게도 흔적을 남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에야 독자들은 시칠리아의 진정한 얼굴을 만날 것이다. 거친 파도와 바닷바람 속에 숨은 그 섬의 진짜 상처를.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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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11] 시칠리아 사람들이 사소한 일에도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부라리는 것은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원인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2,800년 동안 시칠리아 사람들은 한 번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거나 독자적인 문명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들 눈에 보이는 모든 과거의 기념비들은 그들의 땅에 침입했던 외부의 점령자들이 남긴 것이다. 기원전 800년경, 시칠리아에서 처음 식민지를 개척했던 페니키아인들부터 그리스, 로마, 반달 왕국, 동고트 왕국, 비잔틴 제국, 사라센 제국, 노르만 왕조, 독일 호엔슈타우펜 왕가, 프랑스 카페 왕조, 스페인 아라곤 왕조, 북이탈리아 사보이아 왕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 부르봉 왕조가 차례로 시칠리아를 수탈했다. 그래서 그들은 ‘외부의 것’이라면 무조건 경계하고 증오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들어가며

[P. 112] 시칠리아는 그리스인들의 도래와 더불어 문명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시켈로이를 비롯한 원주민들은 그리스의 신화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참주의 곤욕스러운 통치도 받아들여야만 했다. 기원전 735년 낙소스에 첫 그리스 이주민이 정착한 이래, 아그리젠토의 팔라리스부터 참주 정치의 서막이 올랐다. 겔론, 히에론 1세, 디오니시우스 1세, 디오니시우스 2세, 티몰레온, 아가토클레스, 그리고 에피루스의 피로스가 차례로 등장해 시칠리아에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안겨주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아가토클레스조차 시칠리아 사람들에게는 잔혹한 참주였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참주들은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카르타고로부터 큰 군사적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카르타고를 누르고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될 새로운 세력이 부상하고 있었으니, 바로 로마였다. ▶3장 |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시칠리아
[P. 221~222] 윌리엄 2세는 1189년에 임종했고, 그의 별명은 ‘선한 왕 윌리엄’이었다. 모든 인종과 종교를 존중하고 가문의 문화 융합 정책을 계승했던 그의 통치는 시칠리아 주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노르만 오트빌 가문의 시칠리아 통치가 종결되었다. 1040년 시라쿠사를 점령했던 ‘철권의 윌리엄’을 필두로, 로저 2세가 교황청으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았던 1130년을 거쳐, 2명의 로저와 2명의 윌리엄이 통치했던 시대가 마감된 것이다. (중략) 그리스, 로마, 비잔틴, 그리고 사라센이 시칠리아의 농촌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면, 노르만인들은 시칠리아의 도시들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라틴 그리스도교와 비잔틴 정교회, 그리고 이슬람 신앙을 융합했던 노르만의 개방성 덕분에 시칠리아는 지중해의 곡물 창고에서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었다. ▶6장 | 프랑스 노르만의 시칠리아 통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