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부부독립운동가 228 1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ㆍ김우락 229 2 임시정부 국무위원 조소앙ㆍ오영선 231 3 임시정부 의정원 이규갑ㆍ이애라 233 4 임시정부 대들보 최창식ㆍ김원경 235 5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동지 김관오ㆍ방순희 237 6 임시정부와 동고동락한 김재호ㆍ신정완 239 7 임시정부 살림을 도맡은 민영구ㆍ이국영 241 8 임시정부와 동고동락한 양우조ㆍ최선화 243 9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동지 김철ㆍ최혜순 245 10 임시정부 국무위원 오영선ㆍ이의순 247 11 임시정부 경호부장 유평파ㆍ송정헌 249 12 임시정부 외무차장 민필호ㆍ신창희 251 13 임시정부 선전부장 엄항섭ㆍ연미당 253 14 임시정부 재무차장 신건식ㆍ오건해 256 15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성숙ㆍ두쥔훼이 258 16 임시의정원 동지 조시원ㆍ이순승 260 17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김붕준ㆍ노영재 262 18 임시의정원 동지 문일민ㆍ안혜순 264 19 임시정부 비서장 차리석ㆍ홍매영 266 20 상해일본영사관에 폭탄 던진 김예진ㆍ한도신 268 21 중경 애국부인회서 활약한 안미생ㆍ김인 270 22 한국애국부인회서 활약한 강영파ㆍ유진동 272 23 한국혁명여성동맹에서 활약한 김병인ㆍ이준식 274 24 임시정부의 외교무대를 책임진 김규식ㆍ김순애 276
3장ㆍ미주지역에서 활약한 부부독립운동가 1 대한여자애국단에서 활약한 강원신ㆍ강영승 283 2 대한인국민회 창립 주역 강혜원ㆍ김성권 285 3 대한인국민회 동지 차경신ㆍ박재형 287 4 미주 한인단체 대부 김낙희ㆍ백일규 289 5 과일회사로 거둔 성공 독립자금에 부은 김덕세ㆍ김형순 295 6 대한인국민회 동지 김도연ㆍ윤응호 297 7 재미한족연합회 동지 박영숙ㆍ한시대 299 8 40년 식당으로 번돈 독립자금에 부은 양제현ㆍ양주은 301 9 대한인국민회 동지 이성례ㆍ이암 304 10 대한여자애국단의 이혜련ㆍ안창호 307 11 가구사업으로 거둔 성공 독립자금에 쏟아부은 이희경ㆍ권도인 313 12 윌로스 비행학교서 활약한 강영문ㆍ권영복 315 13 시카고 대한부인회 회장 임배세ㆍ김경 317 14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임메불ㆍ임정수 319 15 대한여자애국단 LA 단장 전그레이스ㆍ전득부 321 16 샌프란시스코 미주한인부인회 대표 김자혜ㆍ김은해 323 17 하와이 영남부인실업동맹회 회장 박금우ㆍ이정건 325 18 하와이 대한부인회 구제회장 안정송ㆍ안원규 328 19 대한여자애국단 서기 김석은ㆍ김홍균 330 20 식료품 상회로 번돈 독립자금에 부은 차인재·임치호 333 21 대한인국민회 동지 이화숙ㆍ정양필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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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불굴의 의지로 뛴 부부독립운동가 104쌍을 다룬 책이다. 지은이 이윤옥 작가는 그동안 ‘시와 역사로 읽는 여성독립운동가 열전’《서간도에 들꽃 피다》(전10권)을 비롯하여 19권에 이르는 여성독립운동가 책을 집필한 바 있으며 이번에 펴내는 책은 여성독립운동가 단독이 아니라 부부의 인연을 맺어 함께 동고동락한 분들을 중심으로 쓴 책이다. 독립운동의 혁혁한 공을 쌓고도 그들이 부부인지, 형제자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윤옥 작가는 특히 부부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담아내기 위해 수년 동안 이들에 대한 연구조사 및 현장 답사 등의 과정을 거쳐 이번에 <동고동락 부부독립운동가 104쌍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이 있다. 부부이기에 국난 극복의 대위업을 앞에 두고 서로가 더욱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이 책이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부부독립운동가의 삶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광복 78돌, 104쌍의 부부독립운동가를 마주하다
《동고동락 104쌍의 부부독립운동가 이야기》, 이윤옥
“당신은 나를 만남으로 편한 것보다 고(苦)가 많았고 즐거움보다 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속히 만날 마음도 간절하고 다시 만나서는 부부의 도를 극진히 해보겠다는 생각도 많습니다만 나의 몸은 이미 우리 국가와 민족에게 바치었으니 이 몸은 민족을 위하여 쓸 수밖에 없는 몸이라 당신에 대한 직분을 마음대로 못하옵니다.”- 1921년 7월 14일 당신의 남편 (안창호) -
이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쓴 편지글 일부다. 안창호·이혜련 부부는 혼인 생활 35년 가운데 함께 산 기간은 13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남편 안창호 선생이 집을 떠나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동안 부인 이혜련 여사는 다섯 자녀 양육과 동시에 가정의 경제는 물론 대한여자애국단 등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남편 못지않게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부인 이혜련 여사와 같은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숱한 부부독립운동가들이 안창호ㆍ이혜련 부부처럼 시련을 극복해나가면서 조국 광복의 찬란한 꽃봉오리를 피웠지만 이들을 다룬 변변한 책도 없다.
그동안 여성독립운동가에 관한 책을 19권이나 집필한 이윤옥 작가는 한 권씩 책이 늘어가면서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고 했다. 그것은 여성독립운동가들 자신이 모두 미혼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이 아님에도 결혼한 여성들의 남편에 관한 정보가 너무 빈약했다는 지적이다. 그런 열악한 환경이기에 《동고동락 104쌍의 부부독립운동가 이야기》의 펴냄은 매우 의미가 깊다.
이윤옥 작가는 《동고동락 104쌍의 부부독립운동가 이야기》를 쓰기 위해 지난 수년 동안 마치 수수께끼를 풀 듯 ‘부부독립운동가’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104쌍의 부부독립운동가에 관한 책은 국내 처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윤옥 작가가 부부독립운동가를 쓰기로 결심한 까닭은 ‘국난의 시기에 부부가 일심동체로 어려움을 극복하여 광복의 위업을 이뤄냈음에도 이들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지 않고 각각의 모래알처럼 취급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불만때문이었다.
이윤옥 작가는 말한다.
“현재 국가보훈부의 공훈전자사료관에는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개인별로 소개하고 있다. 문제는 오광심ㆍ김학규 부부독립운동가의 경우에는 이들이 ‘부부’임을 밝히고 있으나 전창신ㆍ김기섭 , 정영순ㆍ이서룡 부부처럼 이들이 부부임을 밝혀주지 않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104쌍의 부부독립운동가를 찾아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힘겹게 찾아내어 책으로 펴낸 《동고동락 104쌍의 부부독립운동가 이야기》는 모두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는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부부독립운동가 23쌍이 소개되고 있는데 <핏덩이 남겨두고 독립의 길 걸은 박치은ㆍ곽치은> 부부를 비롯하여 23쌍의 부부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 있다. 2장에서는 중국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부부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다시 만주에서 뛴 부부독립운동가 13쌍, 광복군에서 활약한 23쌍, 임시정부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24쌍의 부부독립운동가를 소개했다. 3장에서는 미주에서 활약한 부부독립운동가들로 <식료품 상회로 번 돈 독립자금에 쏟아부은 차인재ㆍ임치호> 등 모두 21쌍을 소개하여 국내 처음으로 104쌍의 부부독립운동가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동고동락 104쌍의 부부독립운동가 이야기》의 특징은 부부 각각의 활동과 공훈을 기록한 점이고 더 나아가 국내를 비롯하여 미국본토, 하와이, 중국, 러시아, 일본 등지를 찾아다니며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취재한 기사 <더보기>와 부부 가운데 부인을 추모하는 시를 수록한 점은 다른 책에서는 보기 어려운 예로, 발로 뛰는 작가 이윤옥 특유의 공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해마다 삼월이면 / 제암리 만세 함성 속에 / 아련히 들려오는
김씨 부인의 애절한 목소리 / 제국주의 방아쇠 /교회 안에 당겨지던 날
어린 핏덩이 끌어안고 / 피 토하며 숨져간 여인이여
- 제암리 비극을 온몸으로 껴안은 ‘김씨 부인’ 시 가운데 -
일제수탈의 원흉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던진 / 나석규 투사를 목숨 걸고 도운 일
세상 사람 잘 몰라도 / 이름 내려 한 일 아니니 /애달파 마소
꿈에도 놓지 않던 광복 앞두고 / 동지 남편 고문 후유증으로 눈 감던 날
응어리진 한 위로 / 무서리만 저리 내렸네
- 역사학자 신채호의 동지이자 아내 ‘박자혜’ 시 가운데 -
몸은 가도 얼은 남는 것 / 의병장 피 흘려 지키던 조국의 광복
한목숨 다해 지켜 내리라 / 천지신명께 맹세한 인고의 세월
홀로 맞은 반쪽의 광복이지만 / 임 뵈올 그날 그리며 / 꿋꿋이 지켜온 절개
- 호남 의병장 남편과 함께 뛴 ‘양방매’ 시 가운데 -
부부독립운동가들이 찬란한 조국 독립의 불꽃을 피우기 위해 헌신했지만, 그 불꽃 꺼지지 않게 지킬 역량을 미처 키우지 못한 채 우리는 광복 78돌을 코앞에 두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국내 최초 104쌍의 부부독립운동가들의 동고동락(同苦同樂)의 기록을 통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부독립운동가 이야기를 광복절을 앞두고 마주했으면 한다.
책속에서
이 책은 【1】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부부독립운동가 【2】중국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부부독립운동가 <1> 만주지역에서 활약한 부부독립운동가 <2> 광복군으로 활약한 부부독립운동가 <3>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부부독립운동가 【3】미주지역에서 활약한 부부독립운동가 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제암리교회 만행 현장에서 순국한 김씨ㆍ강태성
해마다 삼월이면 제암리 만세 함성 속에 아련히 들려오는 김씨부인의 애절한 목소리
제국주의 방아쇠 교회 안에 당겨지던 날 어린 핏덩이 끌어안고 피 토하며 숨져간 여인이여 - 제암리 비극을 온몸으로 껴안은 ‘부인김씨’ 시 가운데-
성씨만 있고 이름도 없는 강태성 지사의 부인인 ‘김씨’(1899-1919.4.15.:애국지사 강태성 부인, 1991 애족장)’는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1919년 4월 5일(음력 3월 25일) 화성군 향남면 발안(鄕南面 發安)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씨는 이날 남편 강태성과 함께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인 발안 장터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시위대 가운데 3명이 다쳤다.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돌을 던지며 대항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일본인 거주자들이 상처를 입었다. 이 일로 수원에서 대규모의 일본 경찰과 헌병이 파견되어 보복을 위해 검거작업을 벌였고, 그 뒤에도 제암리 일대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 그러던 차에 4월 15일 낮 2시쯤 아리타 토시오(有田俊夫)라는 일본군 중위가 인솔한 2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민간인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30명을 제암리 기독교 교회당에 모이게 했다. 일본군 중위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여 그 자리에서 23명이 학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고 교회 밖에서 6명이 학살당했다. 일본군은 학살 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같은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W.Schofield, 1889-1970.: 1968 독립장)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냈으며 일부 양심 있는 일본인들조차 분노하게 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에서는 학살 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넣어 상세히 보도하였다. 일제의 제암리교회 만행 사건으로 김씨와 남편 강태성 지사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씨의 나이 겨우 17살이었다.
"일본 중위가 4월 15일 오후에 제암리 마을에 들어와 유시와 훈계를 한다고 기독교도들을 모두 교회에 집합시켰다. 교인 32명이 교회당에 모였으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때 그 중위의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이 예배당을 포위하고 창문과 출입문을 닫고는 일제히 총을 쏘기 시작했다. 예배당에 있던 한 부인은 갓난아이를 창밖으로 밀어내고 병사들에게 ‘나는 죽여도 좋지만, 이 아이만은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했으나 병사들은 내민 어린아이의 머리를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교회 안에서 모두 죽거나 다쳐 쓰러지자 병사들은 교회의 불을 질렀다. 부상한 채 교회 안에 있던 홍 아무개가 창문을 뛰어넘어 도망치려다 바로 그 자리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강 아무개의 아내는 불길이 오르는 것을 보고 이불로 몸을 싸고 담 아래 숨어 있었는데 병사들이 총검으로 난자해 죽이고 이불에 불을 질렀다.” -전동례 구술《두렁바위에 흐르는 눈물》가운데서 -
전동례 씨는 21살에 남편 안진순(1896-1919.4.15.: 1991 애국장)을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잃고 말 못 할 세월을 살아내면서《두렁바위에 흐르는 눈물》이란 책을 썼다. 여기에 나오는 ‘강 아무개 아내’는 필시 김씨가 아닐까 해서 나는 여러 번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왜냐하면 제암리교회의 희생자 가운데 강씨 성을 가진 사람은 강태성 지사 한 분이기 때문이다. 제암리교회의 만행은 선량한 주민들을 교회당에 불러 모아 석유를 뿌리고 불을 싸지른 사상 유례없는 일제의 잔학한 살상의 역사다. 그것도 부부가 함께 한날한시에 희생당했으니 그 비극의 역사를 어찌 잊으랴!
남편 강태성(모름-1919.4.15. : 1991 애국장) 지사는 향남면 제암리 출신으로 부인 ‘김씨’와 함께 발안장날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순국의 길을 걸었다. 1919년 수원지역(현재 화성시)에서는 3월 28일 송산면(松山面)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3월 31일 향남면 발안(發安) 장터 만세시위, 4월 3일 장안(長安), 우정면(雨汀面) 만세시위, 4월 5일 발안장날 만세시위 등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성난 시위군중들은 제압하는 일본인 경찰 2명을 처단하는 등 격렬한 저항을 했는데 이 일로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급파하여 이 일대의 마을에 대한 방화, 살상, 체포, 고문 등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고 급기야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은 아리타 토시오 중위를 앞세워 선량한 주민들을 제암리교회당에 모아 놓고 불을 지르고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