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세계의 자부심과 장식: 선사시대부터 A.D. 1000년까지 23 기원 23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27 로마 지배하의 히스파니아 31 로마 지배의 황혼기 38 비시고트(서고트) 왕국 40 스페인의 파괴 51 알 안달루스 57 우마이야 제국 60 ‘다른 스페인들’ 66 코르도바 칼리프령 74
제2장 기독교도 이베리아의 우위: A.D. 1000~1474 85 우마이야 칼리프국의 몰락 85 알모라비드파의 침입 93 기독교 이베리아반도의 ‘유럽화’ 98 레콩키스타와 십자군 102 알모하드 제국의 흥기와 몰락 108 팽창하는 사회 115 세 종교의 땅 123 이베리아의 정치, 1250~1350 129 왕권과 통치 135 문화적 발전 140 위기와 회복 145
제3장 보편 왕정: 1474~1700 153 가톨릭 공동왕 154 새로운 왕정? 156 재정복의 완결 161 제국으로 나아가다 163 종교적 통일의 탐색 169 합스부르크 왕조의 계승 173 카를 5세와 제국의 수호 177 스페인과 신세계 182 펠리페 2세: 스페인 권력의 정점 188 흑색 전설 197 제국의 피로 198 펠리페 3세와 팍스 히스파니카 200 펠리페 4세와 올리바레스: 위신의 수호 204 사회적·경제적 발전 210 문화적 추세 215 합스부르크 왕조의 최후 218
제4장 계몽 전제군주들: 1700~1833 221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221 펠리페 5세의 통치(1700~1746) 227 페르난도 6세(1746~1759) 232 카를로스 3세(1759~1788) 236 카를로스 4세와 앙시앵 레짐의 위기 245 부르봉 스페인의 사회와 경제 250 스페인과 계몽사상 260 스페인과 아메리카 제국 261 독립전쟁 266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독립 271 혁명과 반발 273
제5장 자유주의와 반동: 1833~1931 277 인구 변화 277 농촌 사회: 팽창과 침체 278 실패로 끝난 산업혁명? 281 문화의 발전 289 정치적 변화: 자유주의의 부상(liberal ascendancy) 292 장군들의 정치(Praetorian Politics) 297 온건파의 10년 299 ‘진보적 혁명’과 자유주의 연합 302 명예혁명과 제1공화국 304 복고 왕정 체제 309 쿠바 재난 312 체제에 대한 또 다른 비판자들 315 교회와 사회 320 자유주의적 스페인의 위기 323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 체제 328
제6장 현대시대: 1931~2000 335 제2공화국: 개혁의 시기 336 ‘암흑의 2년’ 344 내전으로 가는 길 348 스페인의 비극 352 국민군 점유 지역 357 공화 진영 지역 360 공화국의 붕괴 364 승리한 프랑코주의 365 스페인과 제2차 세계대전 371 서유럽의 초병(哨兵) 375 변화와 그 결과 378 민주주의로의 이행 384 중도파의 승리 392 새로운 스페인인들 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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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바튼의) 스페인사 : 선사시대부터 20세기까지 스페인 정체성 탐구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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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길고도 복잡한 역사의 용광로, 스페인을 이해하는 최적의 지름길
『사이먼 바튼의 스페인사』는 중세 이베리아 전문 역사가인 사이먼 바튼이 쓴 스페인 역사서로서, 일반 독자들에게 스페인의 역사 발전 과정에 관한 개관을 그 기원에서부터 오늘날에까지 명확하고 간결하게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스페인의 역사는 곧 ‘스페인’이라 불리는 하나의 지리적 영역 안에서 수많은 서로 다른 정치체가 공존해 온 역사이다. 이토록 풍부하고 다양한 역사에 대해 명확하고 균형 잡힌 설명을 제공하는 이 책은 곧 스페인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완벽한 출발점이 되어 준다.
‘무척추의 스페인’, 여러 지역들의 끊임없는 갈등으로서 정체화된 국가
하나의 국가로서의 스페인이 언제 생겨났는가는 오랫동안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 전통적으로 1479년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2세에 의해 굳어진 왕조 간 결합을 그 시작으로 보지만, 역사가들에 따라 6세기 말, 7세기 초 비시고트 왕국에 의해 만들어진 단일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오히려 1707년에 시작된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이후처럼 근대 시대로 보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베리아반도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지역감정을 이유로, 한 국가로서의 스페인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스페인은 수 세기 동안 정치적 통일을 위해 노력했으나, ‘지리적 핸디캡’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지역주의 또는 분리주의 운동이 발전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강력한 통일국가로 발돋움하는 데에 어려움을 주었다.
이런 이유로 리처드 포드는 스페인을 ‘모래 끈에 의해 하나로 묶인 작은 몸들로 이루어진 다발’이라고 했고,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영향력 있는 에세이 『무척추의 에스파냐』(Espana Invertebrada)에서 스페인은 하나의 국가라기보다는 서로 침투할 수 없는 여러 지역들의 집합체라고 기술했다. 수많은 역사가들에게 스페인 역사는 무엇보다도 중앙부와 주변부 간의 끊임없는 갈등, 즉 지역적 파당주의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통일된 국가를 만들려는 중앙 정부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중앙 정부의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지역들의 그에 못지않은 끈질긴 노력 간의 투쟁으로 이해되었다. (13쪽)
“스페인이 문제라면 유럽이 답이다”? 스페인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균형 잡힌 관점
스페인은 오래전부터 ‘일반적인’ 유럽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나라로 여겨져 왔다. 즉 지리적으로 유럽에 속하지만 지형·기후·생태뿐만 아니라 문화·사고방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의 ‘궤적’에서 많이 다른 나라라는 것이다.
많은 관찰자들에게 스페인의 본질적 ‘다름’은 이베리아반도가 중세 서유럽에서 (시칠리아를 제외하면) 이슬람의 정복을 경험한 유일한 나라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로 인해 8세기부터 무슬림·기독교·유대교 문화의 상호영향 혹은 ‘공생’(symbiosis, 아메리코 카스트로의 표현)이 오랫동안 스페인과 스페인의 정신에 심대한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러나 다른 역사가들은 무슬림들이 기독교 스페인 영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을 강하게 부정하면서, 대신 기독교 국가들이 무슬림의 지배로부터 반도를 수복하기 위해 벌인 레콩키스타(Reconquista, 수 세기에 걸친 재정복 전쟁)가 한 국가로서의 스페인을 만들어 낸 용광로였다고 주장한다. (14~15쪽)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스페인이 문제라면 유럽은 답이다”라고 함으로써 스페인이 다른 유럽 국가들과 보조를 맞추어 안정된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키거나 사회, 경제적 개혁을 이루어 내는 데에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처럼 스페인이 유럽에서 얼마나 예외적인지 같은 이분법적 해석 또는 스페인이 얼마나 유럽화되어 있었는지 그 척도를 가늠하는 등의 방식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소개하며 다양한 시각을 제시한다. 현재의 스페인은 ‘스페인의 과거’에만 집착하여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달라져 있으며, 이처럼 역동적이고 개방된 과정으로서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비단 스페인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유럽 국가들에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란 과거와의 끝없는 힘겨루기
오늘날의 스페인은 몰라볼 정도로 산업화되었으며 군 장교들은 더 이상 쿠데타를 도모하지도 않는다. 국민들의 평균 수명이 이전보다 10년 가까이 늘어났으며 여성의 이혼과 낙태가 합법화되었다. 높아진 교육 수준으로 출산율이 하락하는 대신 스페인으로 들어오는 이민자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예술에 대한 국가의 지원과 투자가 크게 증가하여 주요 도시마다 박물관과 극장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스페인의 배우들은 할리우드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물론 높은 실업률, 범죄 증가와 마약 남용, 지역감정 등 아직도 스페인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스페인 내부의 상처와 정치적 분열은 계속해서 공론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에서 언제나 되풀이되듯, 그 구성원이 과거의 유산을 통해 배우고 끊임없이 현재를 합의해 나간다면 진정한 치유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지금 우리가 스페인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책속에서
[P.66] 8세기 초 무슬림 군대가 반도 내 비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려고 작정을 했다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저항 세력을 근절하지는 않았다. 8세기와 9세기에 반도 북쪽에서 일련의 신생 기독교 제후국들(principalities)이 생겨났고, 그것들은 후에 크고 강력한 왕국들로 발전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이슬람의 정치적 지배에 도전하게 된다. 1492년 무슬림들의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를 기독교도들이 정복하는 것으로 정점에 이르게 되는 이 길고도 복잡한 갈등과 팽창의 과정을 역사가들은 대개 레콩키스타(Reconquista), 혹은 재정복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용어는 그것이 두 라이벌 종교 간의 항구적인 적대와 갈등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잘못된 명칭이다. 사실 무슬림 영토의 재정복이 항상 기독교도들의 전략적 사고를 지배한 것만은 아니다. 기독교 국가들과 알 안달루스 간의 관계는 결코 항구적으로 적대적이지 않았고, 둘 간의 정치적 동맹도 자주 있는 일이었다.
[P. 188] 1556년 즉위 당시 펠리페 2세는 이미 1543년 이래 여러 번에 걸쳐 부왕(父王)을 대신해서 스페인의 여러 영역을 통치한 경험이 있었고, 1554년 잉글랜드의 여왕 메리 튜더와의 혼인 이후에는 ‘여왕의 배우자’로 활동한 바도 있는 경험 많은 지배자였다. 처음부터 스페인은 펠리페 2세의 지배 영역들 가운데 중심이었고, 펠리페 2세는 1559년 네덜란드에서 돌아오고 나서는 한 번도 반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밖으로 나돌며 정력적인 활동을 펼친 부왕과 달리 펠리페는 신중한 태도와 한곳에 머물러 있는 관료제적 통치 스타일로 유명했다. 1561년 그는 반도의 지리적 중심에 가까운 마드리드를 자신의 항구적 수도로 정하고, 2년 후부터는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48킬로미터 떨어진 곳, 과다라마산맥 남쪽 사면에 거대하고 음울한 엘 에스코리알궁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엘 에스코리알궁은 예로니모회 수도원이었고, 학문의 중심이었으며, 또 통치의 중심이기도 했다. 펠리페는 봄과 여름 동안 엘 에스코리알에 있는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가능한 한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고(그는 사람들을 쉽게 신뢰하지 않았다)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국정을 챙겼다. 그 결과 왕은 하루 종일 서류 더미에 묻히게 되었으며, 국왕의 개인비서 곤살로 페레스는 “정책 결정이 너무나 더디게 진행되어서 절름발이도 그것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다”라고 불평을 토로했다.
[P. 266~267] 프랑스인들이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점령하고, 1808년 5월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신 조셉 보나파르트를 옹립하려고 한 나폴레옹의 조치는 스페인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지배층은 뒤로 물러나 있었지만 민중들은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중략) 이 지방들의 봉기는 스페인인들이 ‘독립전쟁’이라고 부르는 6년에 걸친 야만적인 전쟁(영국인들은 이를 ‘반도 전쟁’으로, 프랑스인들은 단지 ‘스페인의 궤양’으로 불렀다)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애국자들의 봉기’는 결코 동질적인 운동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점령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선 사람들 중에는 장기적인 정치적·사회적 개혁에 헌신하고 있던 자유주의적 급진주의자, 플로리다블랑카나 호베야노스 같은 계몽주의적 절대왕정의 공복들, 그리고 구체제의 전통적 특권을 완강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이들에게 개혁 이념은 저주였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맨 나중 집단 중에는 호세 데 팔라폭스(Jose de Palafox)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1808년 봉기 직후 사라고사에서 개인 독재 체제라 할 만한 것을 수립했다. 이 운동에는 다수의 민중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운동에 대한 그들의 열렬한 지지는 신(神), 왕, 국가에 대한 충성심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전통적인 영주 체제에 억압당해 온 사회적 불만과 증오에 의해서도 추동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