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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저자사항
카멜(camel)이 바늘귀를 통과한 까닭 : 한영숙 시집 / 지은이: 한영숙 인기도
발행사항
서울 : 여우난골, 2024
청구기호
811.15 -24-312
자료실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도서위치안내(서울관)
형태사항
136 p. ; 20 cm
총서사항
시인수첩 시인선 ; 083
표준번호/부호
ISBN: 9791192651231
제어번호
MONO12024000005382

목차보기더보기

시인의 말

[1부]

성냥불·15
접시 깨기·16
여름철엔 헐벗은 복근남들만 설친다·18
막혀 있는 것들은 오프너로 따 주자·20
어느 유곽에서·22
카멜(camel)이 바늘귀를 통과한 까닭·24
복날·27
피즈올라(pizola)·28
아, 쉐지곤 파고다에는·30
아카다시에게·31
Winner·34
빈방·36
운현궁 앞에는·38
그 남자·39
인생은 코미디·40


[2부]

무인도·45
비와 비 사이에는·46
바닥論·48
집으로·50
독처(獨處)·52
Gap·54
충동구매·56
부부·58
불발탄·59
겨울비 속에서 돌아오다·60
입마개는 감기 걸렸을 때만 하는 건가·62
폐계(廢鷄)·64
안녕·66
E-5·68
홍옥을 깎다·70


[3부]

방백·73
헐거움에 대하여·74
늦은 오찬·76
간다마빤으로 피어나다·78
당수(黨首)·80
Mezar·81
폭설·82
발·83
사육·84
짝·86
닭·87
고라니 장비를 해체해 간 놈이 도대체 누구지?·88
춘화도·90
연(緣) 날리기·92
회화나무·93


[4부]

수박·97
순이·98
몸이 기억하는 길·100
하늘을 날다·102
내막·103
자화상 2·104
비둘기아파트에는·106
연꽃·108
나는 누구의 갈비뼈일까·109
인레호수에서 1·110
인레호수에서 2·112
수술을 앞두고·114
고추밭 언저리·116
민들레꽃·117

해설 | 임지훈(문학평론가)
“지상과 천상 사이 시인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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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066820 811.15 -24-312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066821 811.15 -24-312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 출판사 책소개 (알라딘 제공)

    시 본연의 회귀: 인간중심주의에서 ‘자연중심주의’로

    한영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카멜(camel)이 바늘귀를 통과한 까닭』이 시인수첩 시인선 83번째로 출간되었다.
    등단작부터 비유의 독특한 효과나 상상의 참신함으로 우리 시대의 소외와 결핍을 주목했던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좀 더 성숙한 세계를 우리에게 펼치고 있다. 요컨대, 씨감자를 매개로 ‘심신이 황폐해진 노숙자들의 엄혹한 정황’을 표현한 시인은, 첫 시집 『푸른 눈』에서 자연중심주의를 압축한 ‘자유’로 확장되었고, 이번 시집에서는 이를 세밀하게 그리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한영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은 오랜 시간 시에 대해 사유하고, 시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며, 시로부터 삶에 대해 성찰해 온 시간이 가득 녹아 있는 작품집이다. 그가 이 시집을 통해 시도하는 것은 ‘나’라는 가장 작은 세계로부터 나를 둘러싼 외부의 자극들을 향해, 더 큰 세상 속으로 한 걸음을 딛는 일이고, 그로부터 다시 바깥의 세계를 향해 한 걸음을 더 나아가보는 일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며 그 속에 새겨진 상흔을 어루만지는 것에서 시작해, 한 사회에 가득 찬 신음에 대해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가 행하는 시적 여정은 사람의 마음을 아우른다는 문학의 본령에 무척이나 충실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여정은 단지 자신의 고통이라는 한 사람의 관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다 거대하고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시 한 번 시도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단지 아름답다고도, 혹은 비참하다고도 말할 수 없을 지상의 풍경은 이처럼 지하와 천상의 대비와 어우러짐 속에서 독특한 미감을 자아낸다. 분명 지상을 수식하는 시어들로 인해, 슬프고도 외로운 심사가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음에도 지상의 풍경은 이를 뒤덮는 하늘에서 내려진 눈으로 인해 외려 고고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심미적 풍경으로 탈바꿈한다. 이를테면 “자동차”, “아파트”와 같은 시어들은 그 속세의 이미지로 인해 “돌멩이”와 같은 무채색의 풍경을 상상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눈이 자아내는 순백의 이미지는 그러한 풍경을 푹신하게 끌어안음으로써 독특한 미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독특한 미감이 있기에 시의 말미에 새겨진 화자의 존재론적 침몰은 지상의 세계를 감싸는 희고도 슬픈 메아리가 되어 오래도록 맴도는 여운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한영숙의 시는 시를 직조함에 있어 공간의 대비와 색채의 대비를 중심으로 자신의 의도를 입체적인 형태로 묘사한다. 때문에 시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감정도, 그것의 무대가 되는 지상의 공간도 평면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이분법적 대비와 그 여분을 통해 보다 정교한 형태로 구체화된다. 한 사람의 감정조차 언어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슬픔이나 기쁨조차 그 단어의 부피를 뛰어넘는 여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면, 이러한 대비를 통해 복잡한 감정과 심경을 구사해내는 것은 세계의 리얼리티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시인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인의 시선은 아래의 시를 통해 인간 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도한다.
    시인은 인간들의 사회 속 의복의 풍경을 바라보며, 인간에 의해 착취당하고 생명마저 수탈당한 비인간 존재의 생애를 읽어낸다. 잔인한 사육 환경 속에서 살다가 끝내는 “날 선 면도날에 슥슥 벗겨”지고, “아무렇게나 방치된 벌건 육신”으로 대지 위에 내버려진, 자연의 모습을 읽어낸다(「사육」). 더 이상 생존을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사치와 같은 욕망의 충족을 위해 자연은 인간에게 착취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다른 생명을 가차 없이 희생시키는 이기심이며, 오직 자신의 욕망이 세계의 전부라 믿는 어리석은 마음이다. 이처럼 시인은 자기 자신의 통증으로부터 자기 내면에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통증에 귀를 기울인다. 이는 동시에 인간을 비롯한 존재 일반에 대한 사유이며 동시에 ‘생’이라는 본래적 관념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시집에 관하여 나눈 이어진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내용이다

    [Q] 주제와 이야기의 방향은?
    [A] 저는 이번 시집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 사람들 관계의 거친 이면을 쓰고자 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회의 부조리를 외면한다면 시인으로써 나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주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대해 고민한 끝에 저는 하나의 선명한 알레고리가 만들고 그 건축물에 제 의도를 담아내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요컨대, 사회의 어두운 그늘과 부조리를 비판하는 시 쓰기 일종인 풍자와 우화의 형식으로 동물을 등장시키는, 오래되었지만 효과적인 방식인 거죠. 주제와 이야기를 한정하는 직접적인 비판보다는 우회적인 ‘말 건네기’를 통해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독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여지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일종의 여백과 확장, 대화입니다.

    [Q] 이번 시집의 특징은?
    [A] 저는 이번 시집을 통해 상당히 많은 동물-이미지를 차용했습니다. 감히 ‘동물적 상상력’이라 불러도 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그러면서도 저는 기억과 현실의 시차(視差)를 대상에서 이끌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기억이란 시간적 거리가 확보된 이미지고, 현실이란 지금-여기에라는 제가 살고 있는 생활입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충동구매나 쇼핑몰, 상품화된 일상용품들로 채워진 삶을 묘파함으로써 그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Q] 나는 어떤 시인인가?
    [A] 저는 뿌리가 튼실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우리 동네 제과점 앞을 지나칠 때면 언제나 빵 냄새가 입 안 곳곳 군침을 돌게 만듭니다. 그 빵 가게 말고도 두어 군데가 더 있었지만, 이처럼 향기롭지는 못합니다. 하나둘 문을 닫고 이제는 그 제과점만 남았습니다. 늘 빵처럼 부풀던 주인 여자의 미소는 더 이상 이스트를 첨가하지 않았고 나무토막같이 생긴 주인 남자는 점점 뱀눈을 닮아갔습니다. 전에는 물건 사기가 무섭게 10%를 적립시켜 주었지만 이제는 마지못해 포인트를 얹어주는 거죠.
    저는 향기 속에 감추어진 구린내 나는 일상을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쓰고자 하는 주제가 조금 빗나갔을지 모르지만 저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그런 시를 쓰고 싶습니다. 꼭 향기가 나지 않아도 좋습니다, 들판의 꽃들이 모두 다 향기를 낼 수는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당당하게 꽃을 피우는 들꽃처럼 뿌리 튼실한 그런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습니다. 시(詩)에게 제 전부를 걸기는 적잖은 망설임이 있겠지만, 후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 「저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지상과 천상 사이 시인의 자리”

    임지훈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대지를 딛고 선 굵은 나무 한 그루에도 세계가 있다. 밑동과 뿌리에 기대어 살아가는 작은 초목들이 있고, 그 아래 지하에는 수많은 이름 모를 벌레들이 나무들과 공생하며 살아간다. 아직 껍질을 채 벗지 못한 매미 한 마리는 아직 오지 않은 여름에 대한 기억을 꿈으로 간직한 채 긴긴밤을 지새울 것이다. 무수한 나뭇잎과 그 아래 그늘에는 다시 이름 모를 풀과 벌레들이 제 나름의 세상을 꾸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어쩌면 그들 가운데에는 서로 시기 질투하며 살아가는 미물들도 있을 것이다. 여름이 가고 겨울이 다가와 나무가 헐벗을 즈음이면 낙엽 아래에는 다음 봄에 대한 기약들이 소리 없이 자라나갈 것이다.
    인간의 사회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커다란 나무 아래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미물들과 같이, 인간 또한 사회라는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삶을 꾸려가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때로는 돕고 때로는 서로를 미워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는 곧 사회라는 커다란 나무의 역사가 된다. 인간과 인간 사이 사소한 감정이 커다란 역사의 단초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거대한 사상과 이념의 차이가 사회라는 이름의 거대한 나무를 뿌리째 뒤흔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흔들림 속에서도 사회는 유지되고 지탱되어 온 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마치, 미물들의 소리 없는 다툼과 아우성에도 나무는 거대한 몸체를 미동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시간을 관조하듯 살아가는 것과 같이 말이다.
    나무 한 그루의 세계는 참으로 작아 보인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에 비교하자면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본원적으로 생각해보자면, 그리하여 인간이 기대어 살아가는 나무인 ‘사회’는 정녕 거대한가? 그 또한 창대한 우주의 규모에 빗대어 바라보자면 작은 나무 한 그루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이 속한 세계가 가장 거대한 것이라 착각하며 삶을 꾸려간다. 물론 그것을 단지 어리석을 뿐이라 칭할 수는 없다. 그 또한 세계이며, 그것 또한 한 생명의 이야기이기에, 어느 누구도 그것을 어리석다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정녕 자신을 둘러싼 세계 너머에도 세계가 있음을 감각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나의 작음과 내가 속한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전처럼 어리석음을 반복하며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오 육백 년 된 회화나무를 본 적이 있다. 그 둘레는 어른 몇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었다. 긴 세월 속에 담겨진 자기 삶을 관조하는 걸까. 나무는 묵묵히 제 발치만을 내려다보고 섰다. 고작 반세기를 살아온 나로서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정신적 깊이와 넓이를 지닌 나무였다. 또한 여름 한 철이면 매미들은 그 나무의 끝 간 데서 만언소(萬言疏)를 우렁차게 올리기도 했다.

    회화나무와 매미-그들이 들려주는 저 무언의 설법을 나는 조용히 받아 적는다.
    ― 「회화나무」 전문

    한 그루의 고목을 바라보며 그에 대한 심상을 담담하게 밝히고 있는 위의 시에서 화자는 다만 나무를 바라보며 멈춰 서 있다. 그 시선 역시 고목에 고정되어 있기에 이 시에서 물리적인 운동성은 대체로 자제되어 있다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시가 여타의 다른 시들 못지않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더욱 큰 운동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정지되어 있는 화자의 육신과 시선과 달리 그의 내면은 고목으로부터 추동되는 여러 감정으로 인해 헤어나올 수 없이 요동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요동친다는 표현으로 인해 그 심리가 정리되지 않고 차분함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하여 그릇된 것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나, 이 요동은 외려 긍정적인 측면을 더욱 부각시키는 요동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화자의 시선을 멈춰 세운 고목의 자태가 혼란스러움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속세의 시간성을 초월한 깊이와 지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삶의 지향을 촉발시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내면의 요동은 외면의 부동성과 대비되면서 동시에 어우러지며 존재의 내면을 고양시킨다. 요동이 주체의 혼란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그로부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끄집어내는 것이 바로 이 요동의 실체인 셈이다. 그것을 화자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긴 세월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세계를 지탱해온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적 깊이와 넓이를 존재의 결여된 지점에 받아들이는 일이며, 이는 곧 “무언의 설법을 나는 조용히 받아 적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을 비롯한 지상의 세계가 단지 인간만으로 구성된 것도, 인간과 친연성을 가진 존재들로만 구성된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이며, 긴 시간과 공간의 변화 속에서 오래도록 지속되는 흐름으로서의 생의 맥동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멀리서 보면 나무들로 가득 차 있는 숲
    날리지 못하도록 새순을 돌돌 감으며
    원심기 페달을 밟아대는,
    가까이 가 보면 나무와 나무는
    서로의 팔과 팔이 겹치지 않는다
    동료의 팔이 길다면 다른 각도로 자신의 팔을 벌려
    신록 반 스푼 넣고
    헛둘 헛둘 여유롭게 페달을 돌리면
    푸른 솜사탕이 봉글봉글 가지마다 단내를 날린다
    땀내 나는 겨드랑이 한 귀퉁이
    지나가는 어린 새들에게도 통째로 내어준다
    편안히 새끼들에게 달콤한 하루를 내어주는 붙살이질도
    또한 소소한 재미다
    눈도 뜨지 않은 새 생명이
    솜사탕 입가에 묻혀가며 쉴 새 없이 재재재 뜯어먹는.
    빡빡이 조여진 새 나사처럼 사방이 콱 막혀 있다면
    새들도 더는 둥지를 틀지 않을 것이다
    조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참깨섶 같은 서울 환승역,
    어깨와 어깨들이 하루에도 수만 번 부딪치지만
    그가 산 몇 번지 누군지
    통 기억나지 않는 요즈음,
    녹음 우거진 숲을 바라보면서
    바람에 날려 온 솜사탕 몇 덩이 슬며시 뜯어먹는다
    ― 「헐거움에 대하여」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은 자연의 모습을 세심히 바라보며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사유한다. 멀리서 보기에는 다만 가득 차 있기만 한 것 같은 숲이지만, 실제로 그 양태를 관찰하게 되면 나무들은 서로를 배려하며 서 있고, 다른 존재를 위해 자신의 공간을 기꺼이 내어주며 살아간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 다투는 약육강식의 세계인 것처럼 묘사되는 자연이지만, 실제로 그 양태를 살펴보게 되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이다. 하나의 존재는 살아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다른 존재와 어울릴 수밖에 없으며, 그러하기에 자신의 존재를 다른 존재에게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다.
    인간이 지향할 수 있는 삶의 자세는 같은 종인 인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당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망각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생에 대한 지향은 다시금 속세의 욕망으로 매몰되고, 인간의 세계 바깥에도 세계가 존재함을 망각하고 만다. 물론 인간 가운데에도 그 지향에 있어 초월론적 시각을 담지할 수 있는 선인이 존재하곤 하나,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인간의 것이라는 한계로 인해 대상이 지닌 초월론적 시각은 다시 속세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만다. 그러나 이처럼 그 대상이 인간 존재 이외의 것이 될 때, 인간은 대상이 지닌 초월적인 속성을 인간 본연의 사회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의 개념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한 시간성이 인간의 상상력으로부터 기초하는 환원적 셈법을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자의 내적인 변화를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화자는 최초에 지상의 존재로서 존재의 부침을 경험하며, 이러한 내면의 통증으로부터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나 이 바라봄은 단지 자신의 고통에 매몰되는 성격의 것이 아닌, 존재의 무대인 지상과 그것을 둘러싼 천상과 지하로까지 확장되며 존재론적 통증의 보편성을 확인한다. 이러한 확인은 화자가 자신의 존재론적 통증에만 매몰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인간 일반으로, 그로부터 더 나아가 비인간 존재들에게까지 그 다정하고도 빛나는 예지가 가닿을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존재가 지닌 예지의 확장은 그로 하여금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삶의 지향으로 삶을 수 있는 초월론적 지혜에 가닿는데, 이는 인용한 「회화나무」와 같은 시에서부터 「헐거움에 대하여」와 같은 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표출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예지의 확장이 단지 앎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실천적 자세로 구체화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때문에 「헐거움에 대하여」에서 화자는 푸르른 신록의 어우러진 모습을 바라보며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화자의 이러한 깨달음이 독특한 구체성을 지니는 것은 이와 같은 실천적 자세로의 함양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여기에는 한 가지 사실이 부기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깨달음 이후에도 화자의 삶이 지속되리라는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바인데, 이는 그의 생에 계속해서 속세의 부침으로부터 비롯되는 존재론적 고통 또한 지속되리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즉, 깨달음은 그 순간으로부터 화자를 무한한 자유에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며, 화자는 그러한 깨달음의 순간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상의 고통을 경험하며 슬퍼하게 될 것이다. 이는 단지 슬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화자가 깨달음 이후에도 거듭 “회화나무”를 바라보며 삶의 자세를 닦아나가리라는 예감이다. 그리고 이 예감은 곧 한영숙이라는 시인의 시적 여정 역시 거듭나길 반복하리라는 문학적 예감이기도 하다. 그가 오래도록 지상에 머물며 다른 생명들과 교감하면서,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며 그 다정한 예지를 놓지 않고 아름다운 언어로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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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속에서 (알라딘 제공)

    눈 코 입, 달린 사람 누구나
    한번쯤 거리를 후끈 설치고 다녔을
    털가죽 옷 한 벌,
    한파 거칠어질수록
    티브이 속 먼 나라 인공 사육장에는
    거꾸로 매달린 야생 너구리들.
    동료들이 훤히 지켜보는 쇠창살 너머에선
    제 마지막 남은 자존감마저 날 선 면도날에 슥슥 벗겨진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벌건 육신들은
    얼어붙은 흰 눈 위에서 더운 김을 가파르게 토해낸다.
    녹물 흐르는 비좁은 철창 속
    갓 태어난 새끼들이 천진난만 어미 젖 치댈 때
    혹한의 가죽들을 능숙하게 발라내는 공포들.
    쉴 새 없이 사육되고 있는
    철창과 철창 사이.

    윤기 번들한 부드러운 생목숨들이
    제 몸 안에서 평생을 붙박이로 살아가야 할
    희멀건 시간을
    모피 숍에서 원적지보다 수백 곱 웃돈 얹어 흔쾌히 지불한다.


    사육」
    전문
    늦은 밤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상갓집 근조 화환에 새겨진 화려한 글자들이 왠지 낯설다. 2년 전 아내를 암으로 잃고 둘째 아들네 얹혀살았다. 여든이 훌쩍 넘었지만 얼마 전까지 꽤 정정했었다. 그간 분신처럼 아끼던 집 판 돈을 반강제로 큰며느리한테 빼앗기고 엄동설한 내몰렸었다. 한 가닥 남은 그 명줄마저 갈취당하고 곡기를 끊었다 한다. 도대체 스무날을 링거 한번 꽂지 못한 채 물만 넘겼다니, 어디 막소금 찍지 않은 팍팍한 삶이 울대에 넘어가기라도 했을까.

    국화꽃에 쌓인 영정 속에서 난생처음 막다른 자유를 누리고 있는,

    부의금 통 누가 가져갈까 너 나 할 것 없이 졸린 눈 번갈아 지키고 있는
    이 야밤의 풍경들


    내막」
    전문
    구제역 쓰나미 전국을 휩쓸고
    무차별 생매장된 비명들이
    꽁꽁 언 대지를 깨고 튀어나온다

    몇 날 며칠 뜬눈으로 지새운 하느님.
    정성스레 한 땀 한 땀 기운
    품 넉넉한 수의(壽衣) 한 벌.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그들에게
    마지막 옷 한 벌 입혀주신다

    밤새
    문상 온 산짐승들
    방명록에 무수한 발자국을 남기고.


    폭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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