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에서 관찰되는 음악의 동시대성 ‘악보들’의 출발점은 지금-여기의 음악이다. 현재 우리가 마주한 음악이 가진 동시대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모습인가. 예컨대 “동시대 음악 실험에서 ‘멜로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선이 사라지고, ‘음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덩어리가 그 자리를 대체한 현상”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악보들’은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서양 음악사에서 지속적으로 마주치는 두 경향의 운동, 즉 음악의 조건을 극복하려는 (보이려 하는) 움직임과, 반대로 먼 곳으로 향하는 (보이지 않으려 하는) 운동을 우리 신체와 맞닿은 ‘노래’라는 틀로 바라본다. “흥미롭게도 이 두 가지 운동성은 서로 충돌하면서도 협력한다. 때때로 간단히 분리해 내기 어려운 상태로 뒤얽힌다. 하지만 서양 음악사의 흐름에서 특정 경향이 더 강하게 또는 독특하게 운동하는 순간들이 도래했고, ‘악보들’은 그 순간들을 포착”한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며 움직이는 음악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 흔적이 구체적으로 담긴 악보를 통해 긴 여정을 이어 간다.
구성 베토벤의 대푸가 Op. 133은 원래 총 6악장으로 이루어진 현악사중주 13번에 속했던 곡이다. “서정적인 짧은 노래를 뜻하는 ‘카바티나’라는 별칭이 붙은 5악장에 이어지는 마지막 악장으로 쓰였지만, 노래의 관습에 기반하며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카바티나 악장에 바로 뒤따른 이 곡은 노래와 정반대 지점에서 구성적 아이디어를 펼치는 악장이었고, 혹독한 평가를 받은 이 곡은 결국 독립적인 곡으로 떨어져 나왔다. 이 악장이 나간 자리에는 활기찬 론도 소나타 형식의 알레그로 악장이 새로 들어왔고, 탈락된 이 곡은 추후 ‘대푸가’라는 별도의 이름을 얻었다.” 1826년 발표되었을 당시 “푸가 피날레의 의미는 감히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중국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평을 받았던 이 곡은, 그러나 오늘날 위대한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악보들’은 베토벤의 대푸가를 경유해 노래의 영역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구성’(composition)의 영역을 가늠한다.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 같았던 구성의 언어가 지금은 서양음악의 전통에서 모국어처럼 익숙한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면, 현재에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음악의 언어도 “후대의 공통 감각”이 될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책속에서
서양 음악사에서 형성되어 온 음악은 어느 순간 노래나 선율 중심의 구조에서 조금씩 멀어져 한층 더 크고 복잡한 구조체를 이뤘다. 서양 음악사의 전통에 기반한 작곡가들은 좋은 선율보다 좋은 구성을 만드는 일에 더 집중하는 것 같기도 했다. 탁월한 구성을 위해서는 선율과 리듬, 화성, 텍스처, 형식 등 전체를 조직하기 위해 필요한 각각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했고, 이는 서양 음악에서 형성되어 온 관습적 언어와 그 쓰임새에 대한 충분한 선이해를 요구했다.
카바티나 악장은 베토벤의 곡 중에서도 가장 안정적으로 노래하는 곡 중 하나고, 대푸가는 그의 모든 곡 중에서도 단연 가장 난해하다는 평을 받았던 곡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가 피날레의 의미는 감히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중국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토벤의 ‘대푸가’에 대해 널리 회자되는 익명의 비평은 이 곡을 중국어에 비유한다. 이것은 신랄한 혹평으로 여겨지지만, 한편으로는 이 음악에 대한 예리한 판단 같기도 하다. 이 곡을 그저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니라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을 뿐, 나름의 체계를 갖춘 ‘다른 언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구성을 듣는다는 일은 음악의 근본 조건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음악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 여겨지는 선형적 시간 위에서, 소리 난 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새로운 소리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지만, 구성을 바라보는 이들은 그 순간에 집중하는 동시에 사라진 소리를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개의 시간 축을 동시에 활성화하는 일은 청취를 단순한 청각적 경험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점과 점들로 연결된 어떤 상을 떠올리는 일로 확장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