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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적 이성으로 전쟁을 보다 | 김진식

머리말: 새로운 폭력의 시대│브누아 샹트르
서론: 클라우제비츠 완성하기│르네 지라르

1장 극단으로 치닫기
2장 클라우제비츠와 헤겔
3장 결투와 상호성
4장 결투와 성스러움
5장 횔덜린의 슬픔
6장 클라우제비츠와 나폴레옹
7장 프랑스와 독일
8장 교황과 황제

에필로그: 위험 시대
브누아 샹트르에게 보낸 르네 지라르의 편지│그라세판 증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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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제비츠 전쟁론 완성하기 : 계몽주의 이성이 아닌 모방적 이성으로 본 전쟁론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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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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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력전과 테러리즘의 모습으로 드러난 새로운 폭력,
세계의 파멸을 예고하는 새 시대의 묵시록

■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완성한다는 것

클라우제비츠는 18~19세기에 살았던 프로이센의 군인이자 전략가, 사상가다. 프랑스가 프랑스혁명을 치른 뒤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 전역을 휩쓸던 시대에 프로이센은 이에 맞서서 싸웠다. 클라우제비츠는 직접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고 나폴레옹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30대 중반부터는 프로이센 육군사관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했다. 그때부터 전쟁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시작했지만 콜레라에 걸려 책을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유고를 아내 마리 폰 클라우제비츠가 출판한 것이 『전쟁론』이다. 전쟁철학, 국제정치학, 군사학을 아우르며 전법을 학문적으로 정리한 이 책은 『손자병법』과 함께 시대를 초월한 군사전략서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르네 지라르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미완이라고 본다. 전쟁의 속성에 대한 중요한 직감을 클라우제비츠가 끝까지 관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은 ‘극단으로 치닫기’라는 주장에서 돌아서면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는 주장으로 물러선 것을 말한다. 지라르는 그 이유를 ‘계몽주의 이성’ 때문이라고 본다. 지라르는 ‘모방적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교전국들이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 대규모 결투를 펼치는 것이 바로 전쟁이라는 사실을 전하려고 한다. 이 책은 클라우제비츠가 얼핏 본 것을 르네 지라르가 집요하게 파고들어 오늘날 세계의 비극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대담집이다.

■ 극단으로 치닫는 전쟁,
쌍둥이들의 인정사정없는 결투

인류가 화해하지 못하고 아직도 전쟁에 뛰어들고 있는 것을 계몽주의 이성으로는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다. 지라르는 ‘모방적 이성’으로 전쟁에 대해 고찰한다. 그에 따르면 인류의 동일성이 전쟁의 원인이다. 동일성 때문에 경쟁이 발생하고, 경쟁은 쟁점을 무화하면서 상대방을 이기는 것만 중시하게 한다. 전쟁은 “쌍둥이들의 인정사정없는 결투”가 되는 것이다.

“교전국들은 모두 상대방을 자신의 법으로 삼는다. 여기서 상호행위가 나오는데, 개념상으로 이 상호행위는 극단에까지 이르게 된다.”(59쪽)

르네 지라르의 욕망이론에 의하면, 모방적 경쟁은 상대방의 욕망을 소유해 자신의 존재를 상승시키도록 한다. 욕망은 전염성을 가지며 경쟁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모델이자 장애물이 된다. 한 쌍의 짝패가 된 이들은 스스로를 파괴할 때까지 경쟁적으로 결투한다. 클라우제비츠가 예상한 극단으로 치닫는 ‘절대전쟁’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모방적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클라우제비츠는 때로는 나폴레옹이라는 모델에 사로잡히지만 또 때로는 정반대로 나폴레옹을 증오하게 됩니다.”(332쪽)

지라르가 꼽은 짝패 갈등의 좋은 사례는 클라우제비츠와 나폴레옹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생각은 언제나 나폴레옹에 대응하는 것이었고, “클라우제비츠에게 나폴레옹은 모델-장애물”이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시기, 선망, 질투를 낳는 모방적 관계의 예시가 여럿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프리드리히 대왕과 볼테르의 관계가 있다. 제르멘 드 스탈 부인을 통해서는 프랑스와 독일의 모방적 관계에 대해 분석한다. 19세기 초 프랑스 고전주의와 독일 낭만주의 문학에 대한 대담에서는 모방에 대한 직관이 솟아난다.

■ 자멸할 위험에 처한
‘희생양 없는 문명’

르네 지라르는 사회 구성원들끼리의 갈등을 해소하거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인류가 취해온 방식이 ‘희생양’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희생제도는 폭력의 방향을 하나의 대상으로 돌려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려는 문화적 장치다. 이때 사람들은 희생을 정당화하면서도 희생물에게 사회통합의 임무를 부여하며 성화한다.

“교전국들은 모두 ‘스스로가 희생양이라는 명분으로’ 숱한 희생양을 만들어내고 있다.”(52쪽)

그러나 오늘날은 희생양과 희생제도를 없앤 사회다. 지라르에 의하면 예수가 희생제도에 의해 무고한 죽음을 당하면서 희생제도 자체를 폭로하고 파괴했다. 그렇게 종교의 신비를 벗겨낸 것이 기독교다. 이 탈신비화는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상대적으론 나쁜 결과를 낳았다고 지라르는 말한다. 이제는 더 이상 제3자를 통해 화해할 수 없게 된 적대자들은 서로를 더욱 강력하게 비난한다. 언제나 그들보다 우리가 더 희생자라고 말함으로써 적을 섬멸할 권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지라르는 희생제도가 없어진 오늘날 문명은 폭력의 물결을 막는 둑을 허문 것처럼 가장 취약하고 자멸할 위험에 처해 있음을 지적한다.

“희생양을 갖는다는 것은 희생양을 가졌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희생양을 가졌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영원히 희생양을 갖지 못하고서 해결책도 없이 모방적 갈등에 노출되는 것이다.”(77쪽)

■ 총력전과 테러리즘,
현대전의 두 가지 모습

희생양이 없어진 시대의 전쟁은 온 국민을 동원하는 ‘총력전’이거나 전선이 따로 없는 ‘테러리즘’이다.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서로에게 점점 더 잔인하게 폭력을 가하다가 폭력 자체에 몰두하게 된다. 지라르는 이런 성격을 띤 현대전이 프랑스혁명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본다. 귀족정에서 민주정이 되면서 전쟁은 대중의 문제가 되었다. 또한 이념적으로 변한 전쟁은 다른 쪽이 파국에 이르러 완전히 패배했을 때만 끝날 수 있다. 이데올로기 전쟁은 고전적인 국가 사이의 전쟁을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절대 예측할 수 없는 ‘무차별적’ 폭력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예감한 테러의 징후를 바탕으로 지라르는 오늘날 자주 발발하는 테러의 의미가 무엇인지 파고든다. 테러리즘의 기원은 혁명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테러는 상대방 공격에 대한 방어라는 명분에서 힘을 얻는다. 언제나 자신이 벌이는 일은 공격에 대한 대응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지라르는 현재의 테러가 과거 서구 제국들이 행했던 정복의 재연인데, 중간에 미국을 만나면서 더 위험해졌다고 본다. 극단으로 치닫기가 과거에는 나폴레옹주의나 범게르만주의를 사용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이슬람주의를 사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 과도한 폭력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거리두기와 물러섬

지라르가 보기에 종교는 평화의 엔진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계몽주의적 편견은 인간의 종교성을 배제한다. 계몽주의가 아닌 새로운 이성을 강조하는 지라르는 오히려 공관복음과 서간문에 많이 들어 있는 묵시록에 집중한다. 폭력은 오늘날 모든 지역에서 분출되며 묵시록이 예고하는 재앙을 유발하고 있다고 말한다. 전쟁을 완전히 불법으로 낙인찍으면 역설적으로 전쟁이 도처로 번져나간다. 갈등을 지연하는 것은 갈등을 더 결정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호전주의와 평화주의가 모방적 짝패”인 것이다.

종말을 주장하는 지라르는 “위험이 커가는 곳에 우리를 구원하는 힘도 커가고 있다”며 역설적인 희망을 이야기한다. 전쟁과 결투의 또 다른 논리를 깊이 생각하게 되고,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저항의 윤리를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도를 비롯한 기독교 정신과 횔덜린을 비롯한 선인들을 통해 그 길을 제시한다. 지라르는 대상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권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신과 합당한 거리를 두게 했던 존재이며, 횔덜린은 그리스도에게서 물러섬을 모방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지라르에 의하면 우리는 거리를 둘 때 상호성과 동질성을 보게 된다. 이것이 상대와 나의 차이를 믿고 상대에게 더 강하게 대응하는 것, 즉 극단으로 치닫기를 멈추게 한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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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7] 지금 우리가 정치학보다는 인류학이 더 유효한 도구가 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해석을 근원적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계몽주의적인 합리적 인간은 더 생각해서는 안 되고, 결국 폭력의 근원을 고찰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합리성을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P. 123] 그러나 모든 의미에서 아주 사소한 차이로도 극단으로 치닫기가 촉발될 수 있습니다. ‘공격하는 사람은 항상 이미 공격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경쟁 관계를 한 번도 대칭적인 것으로 느끼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먼저 공격하고도 상대방이 먼저 공격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P. 148] 헤겔은 전쟁을 영웅적이고 이성적으로 사적 이익을 극복하는 자기희생으로 보는 데 반해, 클라우제비츠는 더 강력한 거래라고 보는 아주 냉정한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