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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정지용님께 드리는 두 번째 서간(書簡) 4
Ⅰ. 돌아오는 길 15

절망과 상실 그리고 방랑 17
돌아오는 길 20
‘사립창명학교’ 입학 23
1925년 옥천에서 강연 27
고독과 「병」 31
녯니약이 구절 35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까닭 38
수식어와 위상 42
무거운 단어들이 꿈틀댈 때 46
옥천 강연에 나섰던 사람들 49
일제강점기, 유년의 경험 52
불우한 현실의 극복과 견딤의 詩作 55
홍사용이 사준 타고르 시집 59

Ⅱ.일본의 이불은 무겁다 63

‘프랑소와 카페’에 대한 기억 65
교토 로맨스 69
달도 보고 생각도 하고 72
친일도 배일도 못한 그 75
교토 하숙집 Ⅰ 78
교토 하숙집 Ⅱ 82
일본의 이불은 무겁다 86
시시한 이야기 90
궁금증을 풀며 92
조선인 노동자와 히에이산 케이블카 95
「향수」의 정본(定本) 97
「향수」의 정본(正本) 100
「향수」의 경험적 공간, 옥천 103

Ⅲ. 시는 동양에도 업읍데다 107

친일시를 쓰지 않고 버틴다는 것 109
희망 전령사 111
시는 동양에도 없읍데다 114
길진섭과 걸었던 그 길에 봄이 118
시(詩)에게 다가가는 지름길 121
시와 산문의 모순 충돌 125
역사의 한 장면 128
용아가 잃어버렸다던 「옥류동」 130
우리가 알고 싶은 『정지용시집』 Ⅰ 134
우리가 알고 싶은 『정지용시집』 Ⅱ 137
윤석중의 고백 140
지은이를 숨겨야했던 「호수」 143
사내대장부가야간 체조를 좀 했기로서니… 147

Ⅳ.내 마흔아홉이 벅차겠구나 151

일제시대에 내가 제일 깨끗하게 살았노라 153
윤동주와의 만남 156
시를 쓸 수도 절필할 수도 159
붓으로 견디기 162
그가 선택한 글쓰기, 시론(時論) 165
내 마흔아홉이 벅차겠구나 168
가람의 오른편에 앉을 이가 아즉 없다 172
경성 하숙집 174
굴곡진 삶의 표징 177
서러운 마흔아홉의 노래 181
하도 붓을 잡아 본 지 오래 되어 185
이루지 못한 소망 ‘침유루(枕流樓)’ 188

Ⅴ. 빨갱이 누명만 벗게해 달라 193

정지용과 박열 그리고 가네코의 ‘파랑새’ 195
돌아오지 않는 남편, 그를 기다리던 여인 198
산문이 열쇠 201
납본 필증 205
해금에 대한 진정 209
해금, 그의 고향사람들도 나섰다 212
어색한 자리, 복자(覆字) 표기 215
해금의 단계 218
해금의 의미 221
‘얼룩백이’와 ‘칡소’ 논란 225
빨갱이 누명만 벗게 해 달라 228
속절없이 세월은 가고 231
『산문』 호화장서판 발견 235

Ⅵ. 다시 정지용을 찾아 239

다시 정지용을 찾아 241
교토에서 조선인 정지용을 만나다 244
‘비과’를 찾아서 Ⅰ 250
‘비과’를 찾아서 Ⅱ 253
우산을 편 사내 256
후쿠오카에 부는 바람 259
최정희의 증언과 슬픈 단어들 264
오래된 길에서 새로운 길로 268
조선인 정지용과 「압천」 271
정지용 학술교류에 대한 눌언(訥言) 273
온수가 쏟아질 날을 기다리며 276

Ⅶ.지용제, 현대인에게 지급되는 특별수당 283

지용제, 현대인에게 지급되는 특별수당 285
나태주와 함께 간 정지용 고향집 288
정지용 문학의 정체성 확립과 세계화 292
「향수」 시비와 지용제 일화 296
해금 30주년을 맞으며 301
“齋골 막바지 山밋 조고만 초가집”을 찾아서 304

부록 309

정지용 생애 여정 지도 310
정지용 기행산문 여정 지도 313
정지용 연보 315
정지용 관련사진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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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지용을 찾아) 정지용 만나러 가는 길 : 두 번째 이야기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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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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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정지용의 기행 산문 여정을 따라 『정지용 만나러 가는 길』을 발간한 후, 다시 정지용을 찾아 『정지용 만나러 가는 길』 두 번째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시간 날 때마다 혹은 시간을 내서 뒤적거리던 책들. 그 속에 숨어 있던 정지용의 발자취.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뛰었습니다. 가슴 벅찬 마음으로 원고를 정리하던 많은 시간 속에서 해냈다는 성취감과 함께 어깨가 결리고 목이 마비되었습니다. 부족한 지식과 모자란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기에는, 많은 나이가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젊다고 하기에는 어중간한 늙은이가 되어 뚜벅뚜벅 자판을 두들겨 글자를 박아냅니다.
마냥 즐겁고 기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가끔은 지치고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운명처럼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정지용 선생님 고향에 살면서 꼭 해야만 하는 사명감 같은 것이 꿈틀거렸습니다.
가까이에서 구해지는 일화 또는 멀리까지 가야만 가능하였던 사실들 그리고 우연히 얻게 된 이야기도 이 책에 적어 놓았습니다.

어느 책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이 책도 저 혼자 써나간 것은 아닙니다. 글씨를 새겼다고 제가 오롯이 썼다는 것은 어리숙한 표현일 것입니다. 듣고 보고 읽기를 거듭한 결과이겠지만 그것만으로 책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제가 언어의 마술사도 아니고 언어의 천재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스마트하고 말쑥한 인격이나 외모를 지닌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니 저 혼자 정지용 선생님 곁에 가까이 가기에는 힘도 능력도 버거웠습니다. 이때 구술해 주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몇몇은 유명을 달리하시고 또 어떤 분은 노환으로 고생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계실 때 기록해 두어야만 하였습니다. 한 가지라도 더 들어야 하였고 한 줄이라도 더 읽어야만 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제 ‘사명을 제대로 하는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니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나 행동은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필요하였기에 남들과 어울릴 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그것은 외로움과 직결되기도 하였습니다. 철저히 혼자 공부하는 법을 깨달아야만 하였습니다. 외로움, 그것은 견디기 어렵다지만 그만그만 잘 지나가 주었습니다. 지극히 외롭다는 것. 그것은 또 다른 무엇인가에 몰두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는 지극히 평범한 법칙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 또한 고마운 일입니다.
정지용 선생님도 외로움에 면역이 좀 되셨던가요? 아니면 치유가 되셨나요? 일제강점기라는 다리를 건너고 좌우익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독한 고독을 견뎌내셨던 것 말입니다.

뭐 특별할 것도, 그렇다고 훌륭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을 것만 같은 글을 책으로 만든다니 좋기도 하지만, 떨리기도 하였습니다. 종잇값은 할는지, 누군가에게 읽히는 책은 될는지, 걱정이 많습니다.
『정지용 만나러 가는 길』 두 번째 이야기는 정지용의 생애나 문학 또는 그의 주변 이야기를 정리하여 신문에 실었던 것과, 틈틈이 써 모은 글입니다. 부족하겠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 생동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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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の蒲團は重い」(「일본의 이불은 무겁다」).
다소 생경하겠지만, 식민지 지식인의 애끓는 비애를 적은 정지용의 산문이다. 그는 1926년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잡지 『自由詩人』 4호에 「日本の蒲團は重い」를 발표한다.
당시 정지용은 한국어로 식민지 지식인의 비애나 조선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을 노래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원고를 원하는 곳에 메일로 보낼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우편으로 보내는 것도 상황이 여의치는 않았으리라.
즉 당시 정지용의 작품 활동 여건을 충족시키는 잡지가 만만치 않았으리라는 생각이다. 물론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도 글은 쓰여지고 발표되고 읽혀지고 있었다. 일제 말기 상황보다 1926년 문단상황은 양호한 편이었다. 그러하더라도 정지용의 일본 유학시절(그가 일본에서 정식시인으로 인정받기 이전), 그에게도 여전히 어려운 시간들이 지났으리라고 본다. 이는 「日本の蒲團は重い」에서도 쉽게 짐작해낼 수 있다.
정지용은 기타하라 하쿠슈가 주관한 『근대풍경』 1월호에 「海」를 실었다. 이후 기성시인 대우를 받게 된다. 여러 이견이 따르겠지만(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1927년을 정지용이 일본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시점으로 잡을 수 있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1927년을 그의 문학을 일본에서 인정받은 시점으로 보기로 한다.
한편, 정지용은 일본인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표시 나게 고발하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또 그의 비애를 형언할 수 없는 환경에 있었다. 그랬을 것이다. 그렇기에 일본어로 「日本の蒲團は重い」고 쓰고 있다. 그것도 “せんちめんたるなひとりしゃべり”(센티멘탈한 혼잣말)이라는 표제와 함께 발표한다. 이는 정지용의 식민지 지식인의 비애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은 아니었을까? 애써 “せんちめんたるなひとりしゃべり”라며 ‘혼잣말’이라는 위로를 한 것은 아니었는지. 애타게 조선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압천을 홀로 걸어 하숙집으로 향하였을 정지용의 모습이 그려진다.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