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 14~15] 내 차례가 되어서 진료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탁 트인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하얀 가운을 입고 미소 지은 의사 선생님이 보였다. 선생님은 내가 작성한 진단표를 살펴보더니, 우울증과 불안증이 주된 증상이고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또한, 선생님이 건넨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선생님은 6개월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6개월 정도의 시간은 있어야 원인을 찾을 수 있고 나를 도와줄 수 있다고 하셨다. 그 외에 불편한 질문은 하지 않자, 내 마음이 점점 평온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선생님께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선생님은 수면제가 아닌 우울증과 불안증 약을 처방해 주었고, 집에 돌아온 나는 그 약들을 빠짐없이 잘 챙겨 먹었다.
그 후, 기적이 일어났다. 약을 복용하는 동안, 나는 잠을 자고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완벽히는 아니어도 자고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고마워서 나는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꼬박꼬박 병원을 찾았다. 그렇게 치료를 받은 지 어느새 6년 차가 지나고 있다. 그동안 나에게는 수많은 진단들이 주어졌다. 우울증, 불안증, 불면증, 과수면장애, 성인 ADHD, 기분부전증, 공황장애, 식이장애 등.
나는 아직도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았다. 치료를 받는 동안 한 번의 자살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치료를 시작한 지 4년이 넘어가면서 내 마음과 정신이 천천히 호전되기 시작했다. 누군가 “너 요즘 어떠니?”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많이 나았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다. 때때로 잠을 자지 못하거나 극단적으로 며칠 동안 잠만 자는 날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죽고 싶은 날보다 살고 싶은 날이 많아졌고, 과거에 잠식되어 우울 속에서 헤매는 날보다 미래를 꿈꾸며 행복하고 싶다는 생각에 잠기는 날이 더 많아졌다. 나는 더디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이 책은 우울증을 극복해 가는 내 개인적인 치료 과정을 담은 것이다.
[P. 31~32] 애인과 나는 그날을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부르며, 매해 그날이 되면 근교로 나들이를 간다.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애인이 준비한 깜짝 선물이란다. ‘다시 태어난 날’ 이후로 나는 생애 느껴보지 못했던 많은 감정들을 경험했다. 사소하고 평범하게만 보였던 일상들의 작은 자극을 느낄 수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이 끝나고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강아지와 산책하는 동네 산책로에서, 성실하게 살아낸 하루를 마치고 잠들기 전에도 나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더 나아가 잘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 인생에서 ‘다시 태어난 날’은 분명한 전환점이었다.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것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것도 있었다. 나는 우울증을 극복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님과 상담에서는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기 위해 애썼고, 적절한 약물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지겹게도 나를 힘들게 하는 가족과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사과를 주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내 삶을 돌보고 있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 과거에 방치했던 내 감정과 삶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고자 하는 강한 결심을 했다. 그러자 그 결심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가족, 애인, 친구들이 내 곁에 있음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