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보헤미안 소년 02 유배의 땅, 기회의 땅 베를린 03 나비가 된 파리의 집시 04 기회의 땅, 슬픔의 땅 스페인 05 최고의 전쟁사진가 06 D-day의 오마하 해변 07 전쟁의 막바지 08 실업자가 된 전쟁사진가와 여배우 09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남자 10 그의 손에는 카메라가 쥐어 있었다
epilogue 평화를 원했던 전쟁사진가
로버트 카파의 키워드 로버트 카파 생애의 결정적 장면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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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 : 전쟁 속 인간의 얼굴을 기록한 남자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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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129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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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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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129669
770.92 -24-1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36862
770.92 -24-1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36863
770.92 -24-1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B000111019
770.92 -24-1
부산관 주제자료실(2층)
이용가능
출판사 책소개
진실이 가장 훌륭한 사진이며 최고의 선동propaganda이다. -로버트 카파
20세기 최고의 전쟁 사진작가로 꼽히는 로버트 카파.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카파의 흔적을 기록한 김경훈 기자의 역작! 70주기를 맞아 사진으로 세상을 읽어낸 그의 예술 세계 조망
> 카파는 사진을 통해 우리에게 매우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전쟁 사진작가로 꼽히는 로버트 카파의 삶과 작품세계를 심도 있게 다룬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카파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 생애를 상세히 추적하며, 그의 작품이 20세기 역사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 있다. 저자인 김경훈 기자는 카파의 발자취를 따라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책은 카파의 유년기 헝가리에서부터 시작해 그가 전쟁 사진작가로 명성을 얻게 된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도차이나에서의 비극적인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여정을 따라간다.
앙드레 프리드먼에서 로버트 카파로 책은 카파가 어떻게 헝가리 출신의 가난한 유대인 소년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작가가 되었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1913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앙드레 프리드먼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반파시즘 운동에 참여하며 겪은 정치적 박해, 그리고 베를린과 파리로의 망명 과정을 다룬다. 특히 그의 연인이자 동료였던 게르다 타로와의 만남, 그리고 그들이 함께 ‘로버트 카파’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낸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카파의 정체성 형성 과정과 그의 예술관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카파의 첫 전쟁 취재였던 스페인 내전도 다루고 있다. 그의 유명한 <스페인 병사의 죽음> 사진에 얽힌 논란도 함께 조명한다. 저자는 이 사진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오랜 논쟁을 상세히 소개하며, 이 논란이 카파의 명성과 전쟁 사진의 본질에 대해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를 분석한다. 또한 스페인 내전 당시 카파와 타로의 활동을 통해, 그들의 사진이 어떻게 전쟁 보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는지도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또한 카파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노르망디 상륙작전 사진들의 배경과 그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약간 흐린(Slightly Out of Focus)’ 사진들이 탄생하게 된 극적인 상황과, 이 사진들이 어떻게 전쟁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는지를 분석한다. 또한 카파가 전쟁 중 겪었을 심리적 고통과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사랑과 상실 저자는 또한 게르다 타로의 비극적인 죽음, 그리고 할리우드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과의 열정적인 연애 등 카파의 사랑과 상실의 이야기도 다루고 있다. 특히 타로의 죽음이 카파에게 미친 영향, 그리고 이후 그의 삶과 작품 활동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분석한다. 버그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당시 언론 보도와 개인적인 편지들을 바탕으로 그들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저자는 또한 카파가 동료 사진작가들과 함께 설립한 매그넘 포토스의 창립 과정과 그 의의를 설명한다. 매그넘의 설립이 어떻게 사진작가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독립적인 포토저널리즘의 발전에 기여했는지를 분석하면서, 카파의 리더십과 비전이 매그넘의 성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카파는 소련을 방문하거나 이스라엘 건국 초기의 취재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저자는 냉전 시대 초기 카파의 정치적 입장과 그의 작품 활동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분석하면서 매카시즘 시대에 카파가 겪었던 어려움과 그의 대응도 함께 서술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카파의 마지막 취재였던 인도차이나 전쟁과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상세히 다루면서, 그가 왜 다시 전쟁터로 돌아갔는지, 그리고 그의 마지막 순간들이 어떠했는지 생생하게 묘사한다. 또한 카파의 죽음이 전쟁 보도와 사진 저널리즘 분야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카파 사후, 그의 동생 코넬 카파가 형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기울인 노력도 언급하고 있다. 국제사진센터(ICP) 설립과 ‘멕시칸 슈트케이스’ 전시회 등을 통해 로버트 카파의 작품이 어떻게 보존되고 재평가되었는지 설명하면서 현대 포토저널리즘에 미친 카파의 영향과, 그의 작품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지는 의미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카파의 생애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작품과 삶이 20세기의 주요 사건들과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카파의 사진들이 단순한 전쟁 기록을 넘어 인간의 고통과 희망, 그리고 전쟁의 무의미함을 어떻게 포착했는지 분석한다. 특히 카파의 대표작들을 상세히 분석하면서, 그의 사진 기법과 구도, 그리고 그가 포착한 순간들의 의미를 일반인들도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카파의 복잡한 성격과 내면세계도 탐구한다.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며 겪었을 트라우마, 알코올과 도박중독, 그리고 끊임없는 여성 편력 등 카파의 어두운 면도 솔직히 다룬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위대한 전쟁 사진작가’라는 신화 뒤에 숨겨진 인간 로버트 카파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사진의 역할과 사진가의 책임 저자는 카파의 작품을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 해석한다. 특히 20세기 전반기의 격동기를 살아간 유대인 예술가로서 카파가 겪었을 정체성의 혼란과 그것이 그의 작품에 미친 영향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또한 카파의 사진이 어떻게 전쟁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변화시켰는지, 그리고 현대 포토저널리즘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상세히 다룬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카파의 유산에 대해 고찰한다. 카파가 남긴 사진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그의 작품이 단순한 전쟁 기록을 넘어 평화에 대한 강력한 호소라고 평가한다. 또한 디지털 시대의 포토저널리즘이 직면한 도전과 기회를 카파의 유산과 연결 지어 분석한다.
이 책은 풍부한 사진 자료를 함께 실어 독자들이 카파의 작품을 직접 감상하며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또한 카파와 관련된 다양한 일화와 증언들을 수록해, 독자들이 그의 삶과 시대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저자는 로버트 카파라는 한 인물의 삶을 통해 20세기 전반기의 역사와 예술, 그리고 저널리즘의 발전 과정을 조망하면서 동시에 전쟁과 평화,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 그리고 사진의 힘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사진 애호가는 물론 현대사와 저널리즘에 관심 있는 독자들은 20세기의 격동기를 관통한 한 예술가의 삶을 통해 우리 시대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전쟁과 평화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다양한 갈등과 위기 상황에서, 카파의 삶과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책속에서
[P.12] 카파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좌파적 신념을 지지하기 위해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그곳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잃었다. 이후 보다 냉정한 포토 저널리스트로 변신하였고 2차 세계대전 중 노르망디의 핏빛 바다에 몸을 던지고, 낙하산을 타고 군인들과 함께 적지에 뛰어 내리며 전쟁터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카파가 훌륭했던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에 카메라를 향하고 셔터를 눌러 사진 속에 기록했던 것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존 스타인벡이 이야기한 것처럼 카파의 사진은 그의 정신 속에서 만들어졌고, 그의 카메라는 단순히 그것을 완성시킬 뿐이었다. 카파의 사진에는 전쟁에서 싸우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과 전쟁에 대한 뉴스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 속에서 인류가 겪었던 고통, 공포, 파렴치함, 그리고 상실의 슬픔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그런데 카파의 사진들을 단편적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그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진정한 메시지를 제대로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카파의 사진이 주는 진정한 의미는 그의 사진과 그의 인생을 함께 읽을 때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 prologue 전쟁의 시대에 되돌아보는 전쟁사진가 로버트 카파
[P. 31~32] 특히 까무잡잡한 피부, 짙은 눈썹과 두툼한 입술을 가진 소년 앙드레의 외모는 여느 유럽의 소년들과는 달랐으며 오히려 집시를 연상시키는 외모였다. 인도에서 기원한 집시(집시라는 단어가 역사적으로 이들 그룹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였기에 롬Rom인이라 불리기도 하나 여기서는 집시로 통일)들은 다뉴브강을 따라, 도시를 따라 유랑을 반복하며 살아갔으며 유대인처럼 그들 역시 이방인으로서 인종의 섬 ‘헝가리’에 자리를 잡았다. 훗날 로버트 카파는 자신에게 집시의 피가 섞여 있다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정말로 그의 선조들 중 집시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아마도 보헤미안의 기질이 농후했던 자신의 방랑벽을 빗대어 스스로를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혹은 떠돌이 유랑 민족이라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집시의 피가 유대인 프리드먼가의 가계도에 어떠한 공식적인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카파의 핏속에 섞였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집시를 연상시키는 소년 앙드레의 시커먼 얼굴과 짙은 눈썹은 성장과 함께 매력적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까무잡잡한 얼굴에 낭만적인 보헤미안 기질이 다분했던 소년 앙드레는 동네 소녀들에게 점점 인기를 끌었다. 사춘기가 되자 앙드레는 풋사랑의 상대가 되던 소녀들을 데리고 다뉴브강의 엘리자베스 교각의 어둠으로 데려가 키스를 나누고 사랑을 속삭였다. 친구들과 유대인 지구의 뒷골목을 쏘다녔으며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점점 체격과 생각이 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유년기가 끝나고 청소년기에 접어들며 그의 세계관은 엘리자베스의 교각과 페스트의 뒷골목을 넘어 더 큰 세상으로 확대되었다. - 01 보헤미안 소년
[P. 55~56] 1931년 7월 앙드레는 기차를 타고서 부다페스트를 떠났다. 공산당 세포조직책과의 짧은 만남으로 인해 조국에서 추방당한, 아직 18살도 되지 않은 어린 청년 앙드레가 향했던 곳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었다. 그가 수많은 유럽의 도시 중에서 베를린을 자신의 목적지로 정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부다페스트에서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오랜 소꿉친구 에바가 당시 베를린에서 유학 중이었기 때문이다. 앙드레보다 세 살 위였던 에바 베쉬아Eva Besnyo(1910~2003)는 카파의 어린 시절 풋사랑이자 친구이며 그를 사진의 길로 인도해 준 인물이기도 했다. 당시 두 사람은 헝가리의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10대 시절을 함께 보내면서 반파시스트주의와 좌파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앙드레가 반파시스트 데모의 행동대가 되어 길거리의 투석전에 참여하는 것을 자신의 투쟁방식으로 삼은 것과는 달리 부유한 은행가의 딸이었던 에바는 카메라를 들고서 노동자와 농민들의 삶을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기록하는 길을 자신의 투쟁방식으로 삼았다. 다큐멘터리와 포토저널리즘 사진이 태동기를 넘어 전성기로 향해 가던 당시의 여느 사진가들처럼 그녀 역시 사진은 진실을 기록하여 보여줄 수 있으며 이러한 사진의 능력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는 당시 유럽에서 사진 문화의 중심이 되고 있던 베를린으로 유학을 떠났던 것이다. 훗날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남긴 에바는 카파가 베를린을 택한 것은 자신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변에 이야기하곤 하였다. 고국에서 강제로 떠나야 했던 17살의 소년에게 유럽의 여러 나라 중 자신과 가까운 관계의 사람이 있는 곳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베를린으로 모여든 많은 유럽의 보헤미안들처럼 앙드레가 베를린행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독일이 한 때 가장 개방적인 국가 중 하나로 뽑히던 바이마르 공화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 02 유배의 땅, 기회의 땅 베를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