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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 진주팔경
발간사 | 경남문인협회 회장 민창홍 006
축 사 | 진주시장 조규일 008
축 사 | 진주시의회의장 백승흥 010
환영사 | 진주문인협회 회장 김성진 012

2024 찾아가는 경남문협 세미나

후문학파는 진주의 이경순… | 강희근
진주를 소재로 한 나의 시와… | 송희복

경남의 시

진주 인사동 | 김명희
진주 | 김무영
진주, 추억의 남강 함께 | 김미정
비상 | 김민영
8월의 경남수목원에는 | 김민철
진주에 가면 | 김병수
남가람별빛길 | 김새하
청동기로 떠난 여행 | 김성진
진주남강 물수제비 | 김우태
촉석루의 물빛 | 김정수
달 향 | 김판암
단목골 | 김홍선
우연과 필연 | 김흥년
위대한 진주의 역사 | 류재상
흐르지 않는 강 | 민영목
진양호에서 | 민창홍
남강대숲 | 박기원
월아산 휴양림 | 박서현
남강유정 | 박선해
농투산이 일지 | 박오철
진주남강 50번지 | 박우담
구국의 논개 정신 | 박일춘
논개 | 박태현
빛을 옮기는 사람들 | 서봉순
다시 대숲 | 성선경
비봉루 | 손국복
신의 저울은 한쪽으로 기운다 | 안창섭
남강, 진주 | 안화수
진주에서 | 양 곡
겨울, 남강산책기 | 오미경
진주 주약동 어느 산등성 | 윤홍렬
진주남강 | 이경연
진주를 진주같이 | 이기성
남강2 | 이루시
진주성에서 | 이명호
남강에 서면 | 이미순
노란 자전거 | 이미화
진양호 붉은 혀 | 이서린
영혼의 평거(平居) | 이소정
진주성에서 | 이영자
형평사 진주 | 이월춘
진주남강 또 남강 | 이점선
진주성 | 이진주
진주성에서 | 이창하
이별을 대하는 방식 | 이현수
영원의 극지 | 임창연
남강으로의 초대 | 장정희
유등놀이 기억 | 장효익
진양호 낙조 | 정삼희
돌아온 책 | 정이경
남강의 시간 | 조향옥
진주 새벼리의 봄 | 주강홍
내가 버린 가좌 | 주향숙
진주 남강다리 중간쯤에서… | 차영한
남강의 눈물 | 최인락
내가 진주 남강에 연등을… | 표성흠
금호지에서 | 하미애
그때 그 물빛 | 하 영
남강의 자라 | 허정란
내 고향 진주 | 허혜자
뒤벼리 | 황숙자
내 마음의 고향 진주 | 김금조

시편이 초청한 시인의 신작시와 대표시 Ⅱ

김 정 례_ 자정에 떨어지는 꽃잎소리 외 1편
김 호 성_ 도그마 외 1편
임 지 은_ 반려돌 외 1편
최 소 연_ 쓰리GO의 밤 외 1편
박 준 희_ 탕후루 외 1편
마 윤 지_ 여름방학 외 1편
이 하 윤_ 열 외 1편
맹 재 범_ 어떤 예보 외 1편
박 태 인_ 기분 외 1편
이 유 정_ 별이 지나가는 교차로 외 1편
이 주 송_ 소금 한 채 외 1편
김 육 수_ 저녁이라는 말들 외 1편



경남의 시조

개천예술제 | 강경주
남강 | 강병선
진주송 삼제 | 강호인
에나 | 김귀자
논개를 생각함 | 김민지
겨울 남강 2 | 김복근
원루에 홀로 앉아 | 김상철
남강은 알고 있다 | 김승봉
진삼선 | 김차순
남강 | 서일옥
뒤벼리2 | 이동배
신발 | 이정숙
남강 의암 | 이정홍
고운 아미 초승달 | 정강혜
진주성 촉석루 | 정현대
진주성 | 하순희
남강 물결 | 허상회

경남의 수필

나막신쟁이의 날 | 강미나
진주와의 인연 | 강수찬
시낭송 축제 | 김상환
진주 누님 | 김순철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 노갑선
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 박종현
시로 만나는 진주 | 박혜원
진주의 1950년 7월 31일과… | 배대균
아름다운 동행 | 배소희
일본을 얼마나 아십니까 | 서정욱
너우니 | 손정란
호수는 잠들지 않는다 | 신서영
강강술래와 논개 | 신애리
강주연못에서 다시읽는 역사 | 양미경
진주와의 인연 | 윤용수
마지막 여행 | 이승철
숲속의 진주 | 이희경
진주난봉가 | 정영선
선학산 만죽동 시절 | 조평래
부자의 삶 | 허숙영

경남의 동시·동화

진주라 카모 하모아이가 | 강 숙
남강 유등축제 | 김용웅
어머니의 젓줄 | 김철민
남강 유등축제 | 김혜영
진주를 찾아서 | 손영순
촉석루 그 아이 | 임신행
박석과 진찬 | 정현수

경남의 소설

이 사람 내가 아오 | 박주원
『물의 영혼(靈魂)』 시놉시스 | 이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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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찾아가는 경남문협 세미나
- 진주 편

후문학파는 진주의 이경순, 이병주가
효시다
_ 강희근

세미나_ 강희근

후문학파는 진주의 이경순, 이병주가 효시다

강희근(시인, 경상국립대 명예교수)

1.
필자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시절에 제창한 ‘후문학파’는 문인들 중에서 〈선인생-후문학〉의 길에 들어선 늦깎이 문인들을 지칭하면서 나온 용어다. 말하자면 인생을 먼저 살면서 체험한 바를 이를 정리하여 문학으로 형상화하여 성공한 사례들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이런 경우가 희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로부터 생겨난 용어이고 그러다 보니 문단적 현실의 하나인 정년이후 등단하는 사례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노령화 현상까지 포괄하는 용어가 된 것이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 중 65세 이상이 대략 6할 이상으로 집계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노령국면에 대한 이해의 개념으로 평가할 수 있다.

2.
광복 이후 진주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인 이경순과 소설가 이병주는 맞춤형 후문학파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선인생의 문학적 예비기간이 20여년이나 길다는 점(이경순), 아니면 일제 말 일본 유학생으로 학병체험을 했다는 점과 5.16이후 옥중체험을 했다는 점(이병주) 등이 독특하고 유다르다는 점에서 그 논의는 깊이와 넓이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1
이경순을 보자. 아호는 동기(東騎, 동쪽 기사), 진양군 명석면 출생(1905) 작고는 1985년 3월 15일
1924년 4.1 동경 주계상업학교 졸업. 1927년 일본대학 전문과정 경제과 중퇴.
1942년 일본 포화시 京北치과의전 졸업
1946년 진주공립농림학교 교사
등단 1949년 45세 ‘백민’ 주간 김송
1947년 동인지 『등불』에 <여인에게>발표 1948년 경향신문 <盞>
1952년 『삼인집』(조진대,이경순,설창수) 시집 『생명부』 15편 영남문학회
1968년 시집 『태양이 미끄러진 빙판』 1976년 시집 『歷史』
1949년 영남예술제 발기(설창수 박세제 이경순, 이용준 박생광 오제봉)
1955년 남해창선중고등학교 교장
1962년 진주상고 교장
1962년 진주문협 회장
1963년 진주예총회장 잠시

『동기 이경순 전집』(1992, 진주신문사, 자유사상사)에 나오는 《그때 그 시잘》에서 발췌해 본다.

□조국과 문학
기미 3.1운동의 민족봉기를 계기로 해서 내 머리 위에 묶어 얹힌 상투를 깎아버리고 신학문을 배워야겠다고 동경에 있는 어느 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이민족의 지배하에 있던 우리로서는 자유를 위하여 차라리 반항을 택하는 것이 지당한 노릇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처신해야 할 이런 결론을 얻은 나는 하기방학에 귀향해서 진주에 있던 시인 김병호씨 소개로 어느, 일간지에 「백합화」란 제목으로 쓴 시편을 발표하고 다시 동경으로 들어가서 문학으로 살아가기보다는 문학을 할 수 있는 자유스런 정신상황을 이루어야 하겠다고 사상단체 ‘흑우회’ 동지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예비검속에 걸려 그를 피해 정태성과 동반하고 진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동경 농업대학에 재학 중인 홍두표와 합쳐 문산에 있는 청곡사에 체류하면서 시를 쓴다고 핑계하고 실은 아나키즘 연구로 허무조직과 환상 건축을 하게 된 것이니 진주경찰에 검거되어 홍은 면소되고 정과 나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5개월을 고생했다. 하옥한 이유는 치안유지법 제1조 제2항인 선동 조항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진주에서 대구로 이감되었을 때 대구에 있던 화가 김용준이 면회하러 왔다. 이것이 이른바 진주아나사건이다. 검사 항소와 증거불충분 등으로 무죄 판결이 났다.
‘흑우회는 –
“이상 사회 실현, 중앙집권 배격, 자주 자율 지방분산, 제국주의 독재 전제정체 반대, 약소민족 해방과 독립운동 동조”

□다다이스트와 對見
영문학자이자 소설가이고 다다이스트 쓰지준의 활동 분주, 그 제자가 고교신길이었다. 동기는 그 쓰지준과 한 술집에서 소주잔을 나누었다. 그가 휘파람으로 ’지고이네르바이젠‘(流浪의 民)을 불기에 나도 ’아리랑‘을 불렀더니 그가 말하기를 의미는 모르겠으나 곡이 역시 유랑민의 哀調라고 했을 때는 아연했다.

□강희근 「자유의지와 悟性의 미학」(월간문학 75년 10월호)-후문학의 면모
동기의 자유의지는 3가지 각도에서 형성
첫째 조국 상실의 비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둘째 아나키즘의 영향
셋째 데카당스의 영향.......총체적으로 모더니즘 지향의 시

쾅!
탄환이 달아났다

벽 넘엔/ 구멍난 밤이/ 질식한 역사를 흔들어 깨우고

책상엔
망명의 길을 잊은 /데카단티즘이/ 신음만 한다

이론이 끝난 도래상 벳바닥에/ 막걸리 방울 방울
눈물 흔적이 탁하고

盞조각이 흩어진 머리맡엔/기름 다 탄 호롱불/가물가물
臨終을 지킨다
-「盞」

□광복후 아나키즘 미 정리 상태에서 일으킨 갖가지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농림학교 교사시절 술, 장학사 린치
창선고교 교장 시잘 소풍에서 <백구야> 춤추기 등등
2-2
나림 이병주를 보자.
1921년 3,16일 하동군 북천면에서 태어남
1933년 양보공립보통학교 졸업
1940년 진주공립농업학교 졸업
1941-1943년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 문과, 별과
1944년 학병으로 동원되어 중국 소주(쑤저우)에서 지냄
1946년 2월 귀국
1948년 진주농과대학과 해인대학에서 영어 불어 철학을 강의
1955년 국제신보에 입사 편집국장 및 주필
1957년 부산일보에 소설 「내일 없는 그날」 연재
1961년 5.16에 필화사건으로 혁명재판소에서 10년 선고, 2년 7개월 복역
외극어대 이화여대 출강
1965년 중편 「알렉산드리아」를 《세대》지에 발표함으로써 등단
1966년 「마술사」를 현대문학에 발표(진주 장대동에서 집필, 신찬식 증언)
1968년 「관부연락선」 월간중앙에 연재
1977년 중편 「낙엽」과 「망명의 늪」으로 한국문학 작가상, 한국창작문학상
1985년 장편 「지리산」
1991년 인물평전 「대통령들의 초상」 「삼국지」
2006년 『이병주전집』 전30권 한길사
2009년 유작 장편 「별이 차가운 밤이면」

□이병주 글쓰기의 원점 김윤식
1944년 1월 20일 일제히 학도병 징집, 당시 재학생 5천여 명 중 4358명 입대.
이병주는 메이지대 전문부 문과를 大山으로 창씨한 그가 졸업한 것은 1943년 9월이었다. 그는 1944년 1월 20일 대구연대를 거쳐 중국 소주에 있는 일본군 60사단 치중대(수송부대)에 배치된 것은 2월 초순이었다.
1980년 이병주는 자전 단편 「8월의 사상」을 썼다. 그 무렵 그는 소주회 출신 모임에서 자천 회장이 된다. 소설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사자는 사자시대의 향수를 지니고 있다
독사는 독사시대의 향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너는 도대체 뭐냐?
용병을 자원한 사나이
제값도 모르고 스스로를 팔아버린
노예

그러나
너에겐 인간의 향수가 용인되지 않는다
지금 포기한 인간을 다시 찾을 수 없다
갸륵하다는 건 사람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말의 노예가 되겠다는
너의 자각이라고나 할까

먼 훗날
살아서 너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람으로서 행세할 생각은 말라
돼지를 배워 살을 찌우고
개를 배워 개처럼 짖어라
(후략)
-「8월의 사상」에서

이병주 글쓰기의 원점은 노예 신분의 자각에서 왔다. 노예는 물론 사람이다. 개나 돼지일 수 없다. 그러나 이 조선의 학병 이병주에 있어 노예의 자각은 사람은 아니다에서 연유되고 있었음에 주목할 것이다. 왜냐면 사람의 노예 되기보다는 말의 노예 되기의 자각이었던 까닭이다.

□노예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3단계
첫 번째 단계는 교사되기 –
관부연락선
두 번째 단계는 언론계 뛰어들기-5.16 이후 2년 7개월 복역
세 번째 단계는 작가되기의 단계- 소설, 알렉산드리아

강희근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경남문협회장 역임, 진주문협회장 역임
조연현 문학상, 김삿갓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등
저서 『파주기행』 외 30여권
2024 찾아가는 경남문협 세미나
- 진주 편

진주를 소재로 한 나의 시와 소설
_ 송희복

세미나_ 송희복

진주를 소재로 한 나의 시와 소설

송희복(문학평론가, 진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1. 시작을 위한 한마디

한 개인의 삶은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아무리 긴 세월이라고 해도, 살고 나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잠깐이다. 나는 진주교육대학교 교수로서 24년을 재직하고 퇴임했다. 문인으로서, 학인으로서 적잖은 시간을 진주에서 보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진주와 관련되는 글들이 적지 않다.
지금은 사람들이 지역 소멸의 시기라고들 말을 하곤 한다. 모든 것이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좋은 것은 아니다. 나는 진주의 문화, 역사, 예술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온 것은 사실이다. 진주에 관한 산문과 비평문과 학술논문만을 모아 다시 편집해 단행본을 엮는다면 몇 권의 분량에 이른다. 내가 진주를 위해 기여한 것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께 내가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시와 소설에 관한 순수 창작문학에 관해서다. 특별히 의도한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진주에서 살다 보니 진주를 소재로 한 창작품을 매만지게 된 것이다. 내 시와 소설 중의 일부가 나의 진주에서의 삶이 있는 그대로 녹아져 있는 것 같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애착이 간다.

2. 동시와 서정시에 대하여

먼저 동시 및 서정시를 보자. 내가 그 동안에 동시집 한 권을 포함해 여섯 권의 시집을 상재했거니와, 적지 않은 시집들 속에, 진주와 관련된 시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비교적 오래된 것은 「청곡세류지」와 「꽃뱀길」이다. 전자는 청곡사 인근의 곱고도 앙증맞은 연못정원을 묘사한 시다. 후자는 진양호 전망대에서 능선 따라 상락원에 이르는 무명(無名)의 길이 마치 뱀처럼 꿈틀대는 것 같대서 이름을 붙인 시이다. 이 두 편의 시는 시의 제목이나 본문 속에 진주와 관련된 기호나 지명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소위 ‘진주 제재(題材 : 제목이나 소재)의 시’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진주를 제재로 했지만, 독자들은 알 수 없고, 다만 작자인 나만이 알고 있는 시들이 그보다 양적으로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쓴 동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한 편을 꼽으라고 한다면, 다음에 인용될 동시 「새들은 음표처럼」이다. 나는 한 동안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놓인, 무척 운치가 있는 숲길을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이 숲길 끄트머리의 아파트 담벼락에는 늘 참새들이 짹짹대면서 나무 위로, 나무와 마무 사이로, 늘 바쁘게 움직이면서 날아서 옮겨 다녔다. 이걸 보고 쓴 동시다.

1

새들은 팔분음표처럼

제 모습을 만든다.

하늘을 우러러보면

이런 모습

땅을 굽어볼 때는

저런 모습

2

새들은 십육분음표처럼

제 모습을 만든다.

하늘로 솟구치면

저런 모습

땅으로 내려올 때는

이런 모습

이 동시는 내가 이 시를 읽을 아이들에게 시각적인 부호인 음표를 제시하면서 이들이 읽지 않고 넘어가도록 유도한 것이다. 시가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눈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음표는 새의 오르내리는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빗대고 있는 일종의 기호, 즉 보조관념이다. 숲길 끄트머리의 아파트 담벼락 반대편에는 늘 난장이 서 있었다. 가난한 상인들이 상행위를 할 수 있도록 시에서 배려한 공간인 듯싶다. 아파트 주민들이 간단한 야채나 생선을 구하기 위해 들리지만 흥청망청하는 장거리는 아니었다. 하루는 저물녘의 퇴근길에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고,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던 고적한 장터에서 경험한 일이 있어서 한편의 시가 되기도 했다. 시는 산문시 형태로 쓰이었다. 제목은 「아름다운 할머니」였다.

내가 출근하는 아파트 샛길에 빈 장터가 늘 그렇게 있습니다. 퇴근을 할 때면, 장터에는 어김없이 난장이 서게 됩니다. 하지만 오가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에 붐비는 장거리라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난가게들이 좀 기다랗고 덩그렇게 줄지어 서 있는 한데의 난장일 뿐입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가을날 오후였지요. 행인은 아무도 없고 상인들만 길가의 난가게를 무료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채를 파는 한 할머니는 깨알 같은 글씨의 성경을 돋보기안경도 없이 열심히 읽고 있었습니다. 비를 막아주는 고정된 큰 우산아래에서 성경을 받쳐 든 두 손은, 마른 나무의 껍질 같은 거친 손입니다. 비 오는 날에 길거리 장터에서 성경을 읽는 행상 할머니만큼 아름다운 할머니를 난 결코 본 일이 없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불자(佛者)라고 할 수 있지요. 불자인 나의 마음속에서도 잔물결과 같은 것이 반짝이면서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장면이나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고, 또 이 받아들인 내 감정이 평이하게 쓰인 시다. 그래도 뜻은 곡진하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각 나라 문자로 표기된 성경의 말씀이 각 나라 사람들에게 영혼의 양식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말씀을 기록한 깨알 같은 문자들은 쌀알도, 한 그릇의 밥도, 어림 반 푼어치의 돈도 될 수 없지만,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믿는 사람들의 영혼을 깨끗이 맑힌다. 시 속의 할머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할머니를 품은 세상은 모순투성이다. 물질적 행복을 고루고루 베풀지 않아서다. 세상의 사회지도자 중에서 생선 가게를 맡은 고양이가 되는 경우들도 적지 않은데, 난장의 생선가게를 지키면서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가난한 행상들도 적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진주에서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참새들이 나뭇가지를 음표처럼 날아서 오르내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난가게가 즐비한, 진주 신안동에 소재한 아파트 마을의 작은 이면도로가 지금도 생각킨다.

낮게 웅크린
늙은 벚나무가

가지마다 피우다
어지럽게 지우는

조각난
분홍

이 짧은 시는 내가 재직했던 진주교육대학교 교정의 나무들을 소재로 한 연작시 중의 하나이다. 교정에는 일제강점기 진주사범학교 시절부터 있어온 나무들이 적지 않다. 부설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아주 오래된 것 같은 벚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늙어서 기우뚱해진 노목(老木)처럼 여겨진다. 그래도 때가 되면, 가지마다 화사한 벚꽃을 어김없이 피워낸다. 꽃잎 떨어뜨리는 것도 예술적이다. 이 조각난 순간을 포착한 시다. 나무는 아무리 늙어도 꽃을 피우고, 지운다. 자연의 힘과 아름다움이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3. 장편서사시 「새벼리의 아적붉새」

일제강점기에 속하는 1923년의 형평운동은 진주 지역의 역사에서 간과 할 수 없는 사건이다. 나는 이에 대한 장편서사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나의 시집 『스무 편의 서정시와 한 편의 서사시』(2020)에 장편서사시 「새벼리의 아적붉새」가 실려 있다. 일종의,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문인, 교수로서의 의무감 같은 것이 반영된 면도 없지 않았다.
저 ‘새벼리’는 진주 남강 변의 동쪽 벼랑이다. 시내에서 보면 아침마다 먼동이 트는 곳, 아침놀을 진주 방언으로 ‘아적붉새’라고 한다. 아침녘에 붉게 번져오는 모양새를 뜻한다. 진주의 형평운동이 이 땅의 백정 신분을 해방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다음에 인용한 내용은 형평사 창립의 전야에 백정 지도자들과 지사들이 모여 뜻을 함께 다지는 등의 하루 전 날의 심정을 극화한 것이다. 우리나라 인권사의 큰 발자취를 남긴 형평운동의 전야의 일이다.

내일에도 새벼리 위로 아적붉새가 벌겋게
물이 들리라. 진주 땅에 골골샅샅이 물들고
빛이 내리 비추리라. 내일이면 물들 새벼리의
아적붉새는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경축의
전조가 되리라……

내가 이 서사시를 쓴 것에 대한 동기가 있었다. 아마 2018년 무렵의 일이었던가 싶다. 진주는 지역적으로 좁지만 국립대학교가 셋이나 있었다. (지금은 두 학교가 통합이 되어 있다.) 친한 교수들끼리 몇몇이 모여 학문적인 정보도 교환하고 저녁식사나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때 다들 아는 누군가를 가리키면서 화제로 삼은 일이 있었다. 그 누구의 선대가 섬들이 무척 많은 항구도시에서 정치망을 운영해 부를 축적한 것을 두고, 나는 부러워했는데,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누구를 천출(賤出)인 것처럼 얘기하는 걸 두고 속으로 깜짝 놀란 일이 있다. 이 시대에 생선을 키워 부를 축적하는 것이 무슨 천한 직업이라고? 마치 소나 돼지를 잡는 도살업자를 과거의 백정처럼 천하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시대착오도 또 그런 시대착오도 없었다. 배워도 많이 배운 사람들이.
특히 그 누구를 천하다고 가장 강하게 주장한 이는 경남 지역의 도계와 붙어있는 타지에서 온 이였다.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생 시절에 아버지를 저세상으로 보낸 후의 막막함 속에서 공부를 하면서 사회적으로 입신한 이였다. 그 당시에 그의 형은 권력기관에 재직하다가 은퇴를 했고, 본인은 국립대학교 교수로 정년을 앞두고 있었다. 이 형제는 우리 현대사에서 신분상승을 성취한 흔치 않은 예에 해당한다. 자신은 계층적으로 수직 상승을 이룩했으면서도, 사회의 계급적인 수평을 인정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적이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민주화를 성취하는 데 가장 기여한, 김 씨 성을 가진 두 분의 대통령이 있다. 공교롭게도 두 분 다 섬 출신이다. 신라 망국을 앞둔 조신(朝臣)들이 그토록 아랫것으로 멸시한 해도인(섬사람)이다. 이 중에서 한 분은 어선주의 아들이었고, 또 한 분은 작은댁의 아들이었다. 우리 국민 중에서 이 분들을 두고, 누가 천출이니, 서출이니 함부로 입을 놀리면서 우습게 여기겠는가? 아무도 그런 막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없다고, 나는 단언한다. 우리 국민의 평균적인 생각 수준도 꽤 높아졌다.
나는 그때 다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말을 섞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날에 귀가해서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진주의 형평운동에 관해서 내가 지역의 지식인으로서 무언가 기여해야겠다는 다짐이었다. 2년 후에 내가 장편 서사시 「새벼리의 아적붉새」를 창작해 신간의 시집 속에 넣었다.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내가 20년 동안에 걸쳐 국립대 교수로 일을 해왔지만 국립대가 해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일본도 이미 오래 전에 국립대를 국립법인화로 전환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서울대학교가 스스로 국립법인화로 전환했다. 국립대 해체는 국립법인화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백 년 전의 지사들보다 못한 의식 수준의 국립대 교수들에게 국가가 국민의 혈세로 지원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본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백 년 전의 형평운동은 지금의 우리 시대에도 유효하다. 우리의 공동체는 분열상을 보이고 있다. 공동체 구성원의 화합을 저해하는 것은 분노의 적대감이다. 공동체를 완성하는 것은 공정이다. 이 공정이야말로 형평이다. 형평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제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서사시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새벼리의 아적붉새가 곱게 물들리라.
이 세상에서 차별을 받거나 버림받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꿈속에……

우리 사회는 그 동안 성장을 거듭해오면서 사회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인식의 발상전환을 이루어 왔다.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빈부 차이도 복지 제도에 의해 조금 개선되었고, 남녀차별도 여초(女超)와 미투(me-too)의 상징성에 의해 점차 극복해가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직업이 신분을 결정하고 있다고 여긴다. 의사 직이 아니면, 신의 직장을 찾는다. 자기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이 진짜 직업이다. 직분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직업적 신분, 직업윤리, 스스로 하고 싶은 일……. 의사의 인센티브나 사회적 자본보다, 노동의 가치와 자기 일의 보람, 자아실현이 더 중요하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나누어진 지역불균형을 극복하는 문제도 우리에게는 초미의 과제다. 지금 우리는 지역 소멸이라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절박한 느낌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서사시 「새벼리의 아적붉새」 본문은 유튜브 검색 창에 ‘새벼리’만 입력해도 낭독으로 들을 수 있다. 낭독 시간은 30분 30초이다.

4. 중편소설 「옥비랑, 한삼을 뿌리다」

나는 얼마 전에 소설 열 편을 모은 창작집을 냈다. 이 중에서 중편소설 「옥비랑, 한삼을 뿌리다」는 다산 정약용이 젊었을 때 진주에 와서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진주기생이 촉석루 마루에서 연행한 진주검무를 보면서 긴 시를 지은, 있었던 사실을 창작 동기로 삼아 허구적으로 꾸며내면서 부풀인 이야기다. 한삼은 무엇인가? 나비나 새의 날개를 상징하는 일종의 무구(巫具)로 춤을 추기 위한 속적삼이다. 소매 안에 감추어 놓았다가 춤의 절정에 이르면 꺼내어서 손목에 끼워 흔든다. 이 흔듦새의 아름다움을 반영한 게 소설 제목이다. 나는 이 무명 기생에게 ‘옥비랑’이라고 하는 이름을, 또 허구와 상상의 서사를 부여했다.

전국의 지방 교방에서 행해지는 칼춤 중에서 이른바 진주 검무는 춤추는 기녀의 한삼(汗衫 : 속젓삼) 뿌릴 사위가 특징적이다. 따로 떼어져 있는 한삼을 긴소매에 감추어두었다가 어느 국면에 이르면 팔목에 착용한다. 여인이 춤을 출 때 무구(舞具)로 사용하는 게 적지 않다. 전통 춤에서, 흔히 우리가 아는 무구로는 한삼과 쥘부채와 손수건이 대표적이다. 춤을 한자로 표현하면, 무(舞)와 용(踊)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무가 팔을 벌리고 흔드는 상체의 움직임이라면, 용은 발을 디디고 뛰는 하체의 움직임이다. 이 두 글자를 합치면 곧 무용이다. 무가 나비의 날갯짓이라면, 용은 새의 뜀박질이랄까? 그러니까 춤은 예제로 날아다니려고 하거나 하늘로 향해 솟구치거나 하는 인간의 꿈을 반영한 기예일 터. 한삼과 쥘부채와 손수건은 날개라는 모습의 징표다. 모습의 징표, 즉 상징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날개가 바로 춤추는 여인이 뿌리는 한삼이다.
옥비랑의 길게 늘어뜨리는 한삼 뿌림새는 남도에서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맑게도 텅 비어있는 허공으로 향해 날갯짓을 하는 요요(嫋

)함이란! 조선의 춤에서 특히 기녀의 춤은 요요함이 으뜸이다. 소리에 있어서의 요요함은 소리가 길고 간드러짐을 말하지만, 춤의 요요함이란 무희의 날씬한 태요, 춤 맵시요, 아름다운 움직임의 모양새를 가리킨다. 특히 옥비랑의 요요한 춤 맵시는 이를 바라보는 사내들의 넋을 빼앗는다. 나비의 날갯짓이나 새의 뜀박질 같은 신비한 움직임은 남도 사람들의 넋을 잃게 할 정도였다. (……) 한삼 뿌림의 춤사위는 곧바로 연풍대로 이어졌다. 연풍대란, 제비가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오를 것 같은 대목이다. 곡선의 우아함이 어느덧 직선의 힘으로 바뀐다. 그녀는 팔랑개비가 바람에 가볍게 나부끼는 모양새를 내다가 무대를 빙빙 돌면서 빠르게 위로 솟구쳤다.

이 소설을 통해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시대의 진주와 관련된 풍속사, 기녀 제도사, 예술사회사를 세세하게 복원해낸 셈이 된다. 나는 이 소설을 통해 역사 문화의 도시인 진주와 다산 정약용을 이어주는 절호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 비평가, 언론사가 이 소설을 철저하게 외면해도 지역사회에서 관심을 가져주면 하는 게, 작가로서의 솔직한 바람이다. 한때 동료였던 아무개 교수로부터 문자를 받고, 나는 힘을 얻었다. “옥비랑과 정약용에 관한 소설을 마치 사극을 보듯이 숨 가쁘게 읽었습니다. 시공간의 장대함 속에서 잠시 아름다운 서정에 잠겨봅니다. 선배 교수님의 강건함을 기원합니다.” 문학과 전혀 무관한 일을 하는, 진주가 고향인 분의 격려다. 정년퇴임을 한 내게, 이제는 작가인 내게 응원을 보낸 것이다.
이 소설의 창작동기가 된 정약용의 시 「칼춤 추는 미인에게」에 관한 내 강의 동영상이 유튜브에 등재되어 있다. 강의 시간은 27분이다. 유튜브 검색 창에 ‘정약용 미인에게’를 입력하면, 이 강의 동영상을 쉽게 접할 수가 있다. 많은 분들의 참고가 있기를 바란다.

5. 사족을 다는 한마디

내가 이번에 간행한 소설집 『자작나무숲으로 가다』에서 오늘의 주제로부터 빼놓을 수 없는 두 개별 작품이 있다. 하나는 소설집 표제로 삼은 중편소설 「자작나무숲으로 가다」이며, 다른 하나는 단편소설 「삶이 곧 눈멂이라는」이다. 앞엣것은 진주와 무관한 것이지만 소설집의 중추적인 작품이란 저에서, 뒤엣것은 진주와 다소와 관련이 있는 작품이다.
예술가 소설이면서 또한 연애소설인 「자작나무숲으로 가다」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30대 동료 교사인 남녀 주인공은 동 · 서 · 남해안을 돌아다니면서 세 차례 혼전의 성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결혼은 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약자인 예술, 여성과, 강자인 돈, 남근주의가 맞부딪친다. 소설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다. 대결 양상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소설의 성패가 결정된다. 며칠 전에, 나는 전설적인 비평가 김현의 일기를 우연히 읽었다. 한 문장을 보자. “왜 거의 모든 연애소설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을까?”(1987, 4, 10.) 비록 명료하지 않아도, 「자작나무숲으로 가다」가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응답을, 독자들이 얻을 수 있는 소설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한 여성소설가로부터 「자작나무숲으로 가다」가 보기 드물게 ‘진한 사랑’의 소설이라는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나는 정말 야한가, 하고 마음속으로 되새김질을 해 보았다. 이 문제를 놓고, 나는 정신분석가인 내 아내와 함께 잠깐 대화를 나누어 보기도 했다. 대화의 내용을 소설의 본문처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해보았다.

“자기도 교정을 보면서 「자작나무숲으로 가다」를 읽어 보았잖아? 이 소설이 정말 ‘야한 섹스’의 소설이라고 생각해?”
“난 야한 섹스라기보다 ‘아픈 섹스’의 소설이라고 봐.”
“아픈 섹스라니?”
“남녀 주인공들에게 마음의 상처가 뚜렷하잖아?”
“세상에, 마음의 상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자기의 그런 생각 때문인지, 자기 소설 모두가 ‘트라우마틱’해.”
“내 인생에 특히 상처가 많았겠지. 그래서 문학을 하는지도 몰라.”

창작집 속의 내 소설의 키 워드는 예술과 젠더이다. 예술적인 삶의 지향성을 보여도, 내 소설이 다 지선지미의 가치를 추구하는 게 아니다. 인간의 추악함이 곳곳에 깔려 있다. 선이 좋은 거지만, 절대적인 선이란 없다. 악 역시 반드시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정말 나쁜 것은 악과 악이 연대해서 번성한다는 사실이리라. 이게 분명하고도 반듯한 사실이라고, 나는 본다. 악들이 서로 연대하면서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게 원색적 인간의 욕동이요, 본색이다. 고대의 희생양 제의가 가장 원형적인 상징임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비롯된 집단무의식의 심리적 메커니즘은 지금까지도 사람 사는 곳 도처에서 산견(散見)된다.
단편소설 「삶이 곧 눈멂이라는」은 진주 출신의 시인인 이형기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그는 나의 대학원 시절의 은사라는 점에서, 자전적인 성격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역시 조직 사회에서의 희생양 메커니즘과 적잖이 관련이 된 것이라고 하겠다. 사람 사는 데 이 심리적 메커니즘은 어디라도, 언제라도 존재하게 마련이다. 악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다. 악이 사라지지 않는 한, 권력이 있고, 희생양이 있다. 청소년 사회에서의 이른바 ‘왕따’니 ‘학폭’이니 하는 것도 이 원색적인 악의 씨에서 비롯된다. 내가 오랫동안 인생을, 여기저기 세상을 살아보니, 말 한마디 인내하지 못하고, 물 한 모금 양보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수히 보아왔다. 내 인생 경험에 의하면, 이런 유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에 있어서 공익보다 사익을 탐하는 이들이었다. 나는 시집 『스무 편의 서정시와 한 편의 서사시』에 16편의 2행시를 싣기도 했는데 가장 필두(筆頭)에 놓이는 것이 「이무기와 악인」이다.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무기는 용이 되려고 용을 쓰고,
악인들은 악에 바치듯 악을 짓고.

내 소설에는 이런 은유, 저런 상징들이 예제 적잖이 드러나 있다. 혹은, 속속들이 숨겨져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소설은 인간 고통의 기록이다. 인간 고통의 은유적 내지 상징적 기록이다. 직설적으로 말하기보다 은유와 상징의 우회로를 만들어놓고 표현하는 게 문학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나라 근대소설의 흐름에는 그 동안 대놓고 말하는 게 미덕이란 생각이 굳어진 측면도 없지 않다. 어쨌든 내 소설의 독자 반응이 처참할 정도의 바닥을 헤매고 있어도, 이른바 ‘심미적 기대의 지평’에 있어선 무엇보다도 본격적이요, 어느 것 못지않게 품격적이다. 지평이란, 관점과 기준과 전망과 수준 등을 말하는 것인데, 이 대목에서의 지평은 수준이란 낱말이 가장 적확한 개념이다.

송희복

199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진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명예교수
저서 『그리움이 마음을 흔들 때』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