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도층(中道層)과 중용(中庸)”
2024년 4월 10일 치러진 대한민국 총선은 역대급 진흙탕이었고, 역대급 미궁(迷宮)이었다. 양극단으로 치달은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입에 담기 힘든 험악한 말들로 피아 구분 없이 공격하고 조롱하고 ‘핏빛 자오선’을 연출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이 공천 과정에서 보여준 행태는 그야말로 ‘서부의 묵시록’ 그 자체였다.
이런 무차별 활극 속에서 일부 국민들은 그들의 선전 선동에 휩쓸리기도 했고, 반면 많은 국민들은 혐오의 난장판 속에서도 균형감을 잃지 않고 중도의 노선을 택했다.
이렇게 어느 때보다도 두드러지게 중도층 민심이 확대되자, 각 정당들은 부랴부랴 중도층 민심을 잡으려 온갖 전략을 구사하며 난리 블루스를 췄다. 아예 중도층 민심을 기치로 내걸고 몇 개의 제3지대 정당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도의 민심은 동네북도 아니고, 싸구려로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햄버거도 아니었다.
무조건 이기고만 보겠다는 일념에 함몰되어 극단적인 공격과 투쟁으로 상대를 자상(刺傷)하고, 등에 칼을 꽂고, 쓰러진 상대의 선혈 위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면 승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 같은 민족, 다 같은 국민인 것을!…
확대된 중도층 민심을 잡기 위한 명확한 전략은 급조된 포퓰리즘으로 민심에 아부하거나, 품격 없는 구호성 신조어로 젊은 세대를 현혹하거나, 진영논리에 갇혀 자신밖에는 볼 줄 모르는 유튜브 방송을 충동질하여 스크럼을 짜는 식의 저질 전략이 아니다. 확실한 전략은 각 당 스스로 정도(正道)에 기반한 품위 있는 실용주의 정책을 개발해서 신뢰를 확보하고, 동시에 비전을 제시하는 동행의 길이다.
진영논리나 팬덤에 갇히면 중우(衆愚)의 미궁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검증되지 않은 지라시 제보를 특종인 양 민심을 교란하면 자신이 지라시가 된다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저잣거리 불량배 막말로 상대를 공격하면 스스로 양아치가 된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고 혐오하면 할수록,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악인의 올가미를 씌우면 씌울수록, 오히려 그릇된 자기 확신의 미궁에 갇히게 되고, 결국은 사필귀정의 바다에 빠져 익사하고 말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은 다이달로스의 말대로 바다와 태양의 중간지대, 극우와 극좌의 중간지대, 타협과 실용의 창공을 비행하는 것이다.
중용(中庸)은 극단 혹은 충돌하는 모든 결정(決定)에서 중간의 도(道)를 택하는 동양의 유교 지혜 중 하나이며, 서양의 아름다운 덕목 중 하나이다.
서양철학의 대부 플라톤은 절제와 중용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디에서 그치는지를 알아 거기서 머무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도를 초과하거나 미달하는 것은 악덕이며, 그 중간을 찾는 것은 참다운 덕이다.
이렇듯 중(中)은 양극(兩極)의 합일점이고, 용(庸)은 영원한 상용성(常用性), 즉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실용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용은 고전 속 잠자는 철학이 아니라, 현실 속 솔루션이자 내비게이션, 통합과 화합의 사회를 만드는 책략이다.
2020년대 중반을 지나가는 한국의 역사, 중용을 이탈하여 극단으로 급발진하고 있는 한국 정치의 여야 대결, 성능 좋은 브레이크 ‘중용(中庸)’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