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으로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집 《기재기이(企齋記異)》 1553년 간행된 《기재기이》는 신숙주의 손자이자 조선 중기의 문인이었던 신광한이 지은 4편의 단편소설 〈안빙몽유록〉, 〈서재야회록〉, 〈최생우진기〉, 〈하생기우전〉을 수록하고 있는 한문 소설집이다. 중국의 《전등신화(剪燈新話)》와 약 80년의 시차를 두고 있으며, 일본 최초의 괴이소설로 알려진 《오토기보코(伽婢子)》보다는 무려 110여 년을 앞선다. 국내적으로는 15세기 김시습의 《금오신화(金鰲新話)》이후 임제(林悌), 권필(權?), 허균(許筠)의 등장 전까지 공백기로 인식되어 온 한국 고전소설사의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문학 유산이기도 하다. 또한 《기재기이》는 조선 중기 소설 발달사에 있어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신광한은 기존의 설화(說話)는 물론 전기(傳奇)와 가전(假傳), 몽유록 등 다양한 문학 양식을 고루 수용하는 한편, 이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각 작품마다 여러 양식을 혼합해 이색적인 구조를 성취했다. 《기재기이》가 본격적인 몽유록이 출현하는 발단적 계기이자, 17세기 전기소설의 흥성기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기재기이》의 환상, 신광한의 삶을 담다 《기재기이》에 수록된 작품들은 환상계를 다루는 듯하지만, 모두 신광한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접맥되어 있다. 〈최생우진기〉는 37세에 삼척부사로 나갔던 신광한의 풍류 체험을 담고 있다. 강릉에 사는 최생(崔生)이 삼척 두타산 무주암에서 증공이라는 선사(禪師)와 함께 지내다가 용추동에 있는 용궁(龍宮)을 다녀온 이야기다. 〈서재야회록〉은 달산촌에 사는 한 사부(士夫)가 뱀띠 해 8월 보름 이틀 전에 꿈속에서 붓, 벼루, 종이, 먹의 물괴(物怪)들과 만나 시회(詩會)를 열고 놀았다는 이야기다. 신광한 자신이 여주 원형리에 서재를 짓고 15년간 서책을 벗 삼아 두문불출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오래 쓰고 버려진 문방사우는 파직되어 원형리에 칩거한 기재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안빙몽유록〉은 진사 시험에 누차 낙방한 안빙(安憑)이라는 서생이 꿈에 화왕(花王)의 나라를 다녀온 이야기다. 파랑새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꽃의 나라에서 안빙은 여러 화초들의 정령과 대화를 나눈다. 실의해 울적한 안빙의 이야기에는 두 번의 사화에 휘말리며 입었던 상처와 관직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담겨 있다.〈하생기우전〉은 고려 때에 원주에 사는 하생(何生)이 무덤 속에서 시중의 죽은 딸의 혼령과 사랑을 나누고 이승에 다시 돌아와 부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에 나오는 고려 때 아무개 시중의 집안 이야기는 조선 때에 세조를 도와 단종을 몰아냈던 정치 세력을 연상시킨다. 신광한의 조부 신숙주 때에 세조반정과 단종 복위운동 등의 사건으로 사육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세조를 도운 사람들은 높은 벼슬자리에 앉았고 그들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신광한은 기묘사림이 제거되는 모습을 당대에 직접 보았다. 〈하생기우전〉에는 과거 조부의 처신에 대한 해명과 기묘명현들에 대한 미안함 등이 담담하게 담겨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기재기이》의 결론에 해당한다.
책속에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둥소리가 꽝 하고 땅이 갈라지는 듯이 나서, 정신이 번쩍 들어서 보니, 곧 한바탕 꿈이었다.
술기운이 몸에 있고 꽃향기가 옷에 배어 있었다. 멍한 정신으로 일어나 앉으니, 부슬비가 회화나무에 내리고 천둥 여운이 은은했다. 안생은 조금 전의 꿈이 역시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구나 했다. 나무 주위를 돌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이에 곧바로 정원에 나가 보았다. 모란 한 떨기는 비바람에 헤집어져 꽃잎이 땅에 다 떨어졌고, 그 뒤로는 복숭아와 오얏이 나란히 서 있는데 가지 사이에는 파랑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대나무와 매화가 각기 한 둔덕씩을 차지하고 있는데, 매화는 새로 옮겨 심은 것이어서 울타리를 둘러 보호하고 있었다. 정원 안에 연꽃 연못이 하나 있는데 둥글둥글한 연잎이 물 위에 떠 있었다. 울 밑에는 국화가 이제 막 싹이 돋았고, 적작약이 활짝 피어서 뜰 위에 떨기를 이루고 있었다. 안석류(安石榴) 몇 그루가 화분에 심겨져 있었다. 담 안에는 수양버들이 늘어져 땅을 쓸고, 담 밖에는 늙은 소나무가 담을 내리덮고 있었다. 그 나머지 잡꽃들이 붉고 푸르렀고 날아다니는 벌과 나비들이 기녀들처럼 보였다. 안생은 이에 이것들의 변신이었구나 했다.
- <안빙몽유록(安憑夢遊錄)> 중에서
《기이(記異)》 한 질(帙)은 곧 지금의 찬성사(贊成事) 기재(企齋) 상공(相公)께서 지으신 것이다. 일찍이 장난삼아 쓴 것이 기이(奇異)하게 할 뜻이 없었는데도 절로 기이하게 되었는데,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사람을 흐뭇하게 하기도 하고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하며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한 것도 있고 세상을 경계시킬 만한 것도 있어, 민이(民彛)를 붙들어 세워 명교(名敎)에 공을 이룬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저 보통의 소설(小說)들과는 같이 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으니, 세상에 성행하는 것이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