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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광기초. 1-10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0003159071 812.34 -25-2 v.1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072 812.34 -25-2 v.1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073 812.34 -25-2 v.10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074 812.34 -25-2 v.10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265 812.34 -25-2 v.2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266 812.34 -25-2 v.2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267 812.34 -25-2 v.3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268 812.34 -25-2 v.3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269 812.34 -25-2 v.4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270 812.34 -25-2 v.4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271 812.34 -25-2 v.5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272 812.34 -25-2 v.5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273 812.34 -25-2 v.6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274 812.34 -25-2 v.6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275 812.34 -25-2 v.7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276 812.34 -25-2 v.7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277 812.34 -25-2 v.8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278 812.34 -25-2 v.8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279 812.34 -25-2 v.9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59280 812.34 -25-2 v.9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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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광기초(太平廣記鈔)》는 중국 명나라 문학자 풍몽룡(馮夢龍)이 북송 초에 이방(李昉) 등이 편찬한 고대 소설 모음집인 《태평광기》를 산정(刪定)한 것이다. 원전이 되는 《태평광기》는 송나라 이방이 한대(漢代)부터 북송 초에 이르는 소설 · 필기 · 야사 등의 전적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광범위하게 채록해, 총 500권에 6965조로 정리한 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춰 보이는 이야기 거울’이라는 부제가 말해 주는 것처럼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다 담고 있다. 이 때문에 《태평광기》는 이후 역사서에 인용되기도 하고 후대의 문학 작품에도 영향을 주어 많은 파생 작품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 방대한 분량은 몇 가지 문제를 낳았다. 분량이 너무 많다 보니 인쇄도 쉽지 않고, 교정도 쉽지 않아 판본에 많은 오류가 발생했다. 더해서 독자들이 읽기에도 부담스러웠다. 풍몽룡은 《태평광기초》의 머리말인 〈소인(小引)〉에서 “옛사람은 고사를 인용할 때 출처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출처를 묻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큰 소리로 ‘《태평광기》에 나온다’라고 말했다. 그 권질이 방대해서 사람들이 열람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사람들을 속였던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풍몽룡은 당시 부실한 《태평광기》 출판 상황을 개탄하면서 이대로 방치할 경우 독자들의 외면을 받아 결국 폐기될 것을 우려해, 보다 체계적이고 엄정하게 편집한 《태평광기》 선본을 간행하고자 했다. 이에 500권 92류(類)에 총 6965조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던 《태평광기》 중 번잡하고 중복 수록된 고사를 삭제하고, 배치가 잘못된 것들을 정리해 전체 80권 82부(部)에 총 2584조의 고사로 편찬했다. 《태평광기》에 분리되어 수록되었던 고사를 《태평광기초》에서 병합한 고사가 400여 조이므로 실제로는 약 3000여 조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는 셈이다.

《태평광기초》의 가장 큰 특징은 비주(批注)와 평어(評語)다. 비주는 지면의 상단 여백에 기록하는 미비(眉批), 고사의 원문 사이에 기록하는 협비(夾批)와 협주(夾注)가 있는데, 《태평광기초》에 기록된 미비는 1842개이고 협비와 협주는 269개다. 평어는 고사의 중간이나 말미에 해당 고사에 대한 풍몽룡 자신의 견해를 기록하거나 해당 고사와 관련된 다른 고사를 인용해 논평한 것으로 218개에 달한다. 미비는 특정한 대목에 풍몽룡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밖에 부류를 설명하거나 어려운 글자에 대한 독음과 뜻을 설명한 경우도 있다. 협비와 협주는 고사의 중간중간에 풍몽룡의 즉흥적인 느낌을 기록한 경우가 가장 많으며, 그 밖에 특정한 인물·명물·사건에 대해 설명한 경우도 있다. 평어는 풍몽룡의 이성적 사고, 도덕적 가치관, 역사 인식, 인정세태에 대한 감회 등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비주와 평어는 풍몽룡의 사상과 가치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해당 고사를 읽는 독자들의 보다 흥미로운 감상과 보다 정확한 이해를 돕는 아주 유용한 장치라고 하겠다.

이렇듯 《태평광기초》는 문학적으로는 물론이고 역사, 민속학적으로도 문헌적 가치가 무척 높은 필기 문헌이나,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아직 번역 성과가 없는 형편이다. 필기 문헌 전문 연구가인 연세대 김장환 교수는 세계 최초로 《태평광기초》를 번역, 교감, 주석해 완역 출간한다. 《태평광기초》의 원전 텍스트에 대한 보다 쉽고 정확한 이해를 토대로 삼아 이후 더욱 활발한 연구 성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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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0032) 갈현(葛玄)
갈현은 자가 효선(孝先)이다. 좌원방(左元放 : 좌자)에게서 《구단금액선경(九丹金液仙經)》을 받았으나 미처 단약을 만들지는 못했으며, 늘 창출(蒼朮)을 복용했다. 특히 병을 치료하는 데 능했으며, 귀신이나 도깨비 등이 모두 정체를 드러내면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는 곡식을 끊고서도 몇 년간 배고프지 않을 수 있었으며, 장작더미를 쌓아 불을 피우고서 그 위에 앉아 있을 수도 있었는데 장작이 다 타도록 옷이나 관(冠)이 그을리지 않았다. 어떤 때는 술을 한 곡(斛)이나 마시고 깊은 산골짜기 샘물 속에 들어가 자다가 술이 깨면 나오기도 했는데, 몸이 전혀 젖지 않았다.
(중략)
한번은 갈현이 손님과 마주 앉아 식사를 했는데, 식사를 마치고 양치질을 했더니 입 안에 있던 밥알들이 모두 커다란 벌 수백 마리로 변해 소리를 내며 날아다녔으며, 한참이 지나 다시 입을 벌리자 벌들이 도로 입 속으로 날아들어 갔다. 갈현이 그것을 씹으니 본래 밥알이었다. 또 갈현이 손으로 평상을 두드리면 두꺼비를 비롯한 각종 곤충·새·제비·참새·물고기·자라 등이 나왔고, 갈현이 춤을 추게 하면 모두 사람처럼 박자에 맞춰 춤을 추다가 갈현이 중지시키면 즉시 멈추었다. 갈현은 겨울에 싱싱한 참외를 차렸으며, 여름에 얼음과 눈을 대접했다. 또 수십 냥의 돈을 꺼내 사람들에게 우물 속으로 던져 넣게 했는데, 천천히 그 위에 그릇을 놓고 돈을 불러 나오게 하면 우물 속에서 하나하나 날아 나와 모두 그릇 속으로 들어갔다. 또 갈현이 손님을 위해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술잔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술잔이 저절로 그 사람 앞으로 갔으며, 간혹 다 마시지 않으면 술잔 역시 옮겨 가지 않았다.
(중략)
어느 날 갈현이 제자 장대언(張大言)에게 말했다.
“나는 단약을 만들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마땅히 시해(尸解)해야 하니, 8월 13일 정오에 떠날 것이다.”
기일이 되자 갈현은 의관을 갖추고 방에 들어가 누운 후에 숨을 거두었는데, 안색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미 : 시해한 것이다. 제자들이 향을 피우고 그의 시신을 사흘 동안 지켰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큰바람이 일어나 집이 들리고 나무가 꺾이며 천둥 같은 소리가 나더니 한참 후에 바람이 멎었다. 그사이에 갈현의 시신은 사라졌고, 침상 위에 남은 옷만 보였으며 허리띠도 풀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침에 이웃집에 물어보니, 이웃 사람은 간밤에 큰바람이 전혀 불지 않았다고 말했다. 바람은 그 집에서만 불었으며, 울타리와 나무가 모두 부러져 있었다.
3-5(0040) 곽문(郭文)
곽문은 자가 문거(文擧)이고 낙양(洛陽) 사람이다. 여항(餘杭)의 천주산(天柱山)에 은거하면서 간혹 커다란 절벽 바위에 기거하기도 했다. 태화진인(太和眞人)이 일찍이 그의 석실에 강림해 충진지도(?眞之道)를 전수해 주었다. 곽문은 종적을 감춘 채 은밀히 수련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 어느 날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석실 앞으로 왔는데, 마치 무언가 말할 게 있는 것 같았다. 곽문은 손으로 호랑이의 목구멍 속을 더듬어 뼈를 발견하고 뽑아 주었다. 이때부터 호랑이는 늘 곽문의 주위에서 유순하게 지냈고, 곽문이 산을 나갈 때면 호랑이도 반드시 따라갔다. 성읍의 시장에 있을 때도 호랑이는 머리를 숙인 채 따라다니면서 마치 양이나 개처럼 감히 난폭하게 굴지 않았다. 미 : 호랑이도 은혜를 갚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간혹 서책을 그 등에 올려놓아도 그대로 지고 다녔다. 곽문이 한번은 나무 열매와 대나무 잎을 따서 소금과 쌀로 바꾸려고 대광주리 안에 담았는데, 호랑이가 그것을 등에 지고 따라나섰다. 진(晉)나라 황제가 그 소문을 듣고 곽문을 대궐로 불러들여 물었다.
“선생은 호랑이를 길들이는 무슨 비법이라도 가지고 있소?”
곽문이 대답했다.
“저절로 그리되었습니다. 사람이 짐승을 해칠 마음이 없고 호랑이 역시 사람을 해칠 뜻이 없으니, 무슨 비법이 필요하겠습니까? 나를 어루만져 주면 임금이 되니 그때는 호랑이가 백성처럼 유순해지고, 나를 학대하면 원수가 되니 그때는 백성이 호랑이처럼 사나워집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호랑이를 길들이는 것에 또한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황제는 그의 말을 높이 사서 관직을 내렸으나 그는 나아가지 않고 오정산(鰲亭山)으로 돌아가 은거하다가 득도해 떠났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의 침상 자리 아래서 부들잎을 주워서 보았더니 그 위에 <금웅시(金雄詩)>와 <금자기(金雌記)>가 적혀 있었는데, 그 내용은 모두 당시의 일을 예언한 참언(讖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