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인문학 : 영웅의 길, 리더의 길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0003162582
812.34 -25-3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62583
812.34 -25-3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B000124259
812.34 -25-3
부산관 종합자료실(1층)
이용가능
출판사 책소개
『열국지』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제108회 마지막 부분을 언급한다. “자고이래로 나라의 흥망성쇠를 살펴보면, 간신과 충신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總觀千古興亡國 盡在朝中用佞賢) 한 나라의 흥망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간신과 충신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사가 만사다’라는 명언이 여전히 가슴속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인간과 인간의 만남’,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조심스럽게 『열국지』의 주제를 야망과 배신으로 분석한다. 초지일관 어그러진 관계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맹자는 ‘천시불여지리요,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 하였다. 이는 ‘하늘이 주는 시운도 지리적 이로움만 못하고, 지리적 이로움도 인간의 화합만 못하다’는 의미다. 즉, 때가 좋은 것보다 환경이 더 중요하고, 환경이 좋은 것보단 인화가 중요하다는 뜻으로, 대업을 이루려는 자에게는 힘의 원리가 아닌 인간적 매력에 바탕을 둔 리더십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리더의 자질과 품격이 준비된 자가 비로소 천하를 경영할 수 있는 것이다.
책속에서
[P.57] 대의멸친(大義滅親)이란,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친족도 죽인다는 뜻으로, 국가와 사회를 위하는 공적인 일이라면 부모 형제라도 엄정하게 처리한다는 의미이다. -p57
이후 마씨 부인은 여상이 제나라의 제후에 봉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재결합을 원하였다. 그러자 여상은 부인에게 물 한 그릇을 떠 오라고 하더니 그것을 땅에 엎었다. 그리고 지금 바닥의 물을 다시 담는다면 아내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여상은 “한 번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고(覆水不返盆), 한 번 떠난 아내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p71
포숙아의 위대한 점은 관중의 벼슬이 자신보다 높아도 개의치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오로지 대공무사 정신으로 자신의 나라와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하였다. 하지만 제 환공은 포숙아를 생명의 은인처럼 여겨, 어떻게든 포숙아에게 높은 벼슬을 하사하려 하였지만, 관중은 오히려 “포숙아와 주공의 관계가 두텁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기에, 굳이 포숙아에게 높은 벼슬자리와 실권을 주지 않아도 모든 관리들이 포숙아의 눈치를 볼 것입니다. 그러기에 포숙아는 주공 곁에서 관리들을 감찰하게 하는 직무를 주면 적합합니다.”라며 제 환공에게 직언하였다. 그러자 포숙아도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흔쾌히 관중의 의견에 찬동하였다고 할 정도로 그릇이 큰 인물이었다. -p80
우나라와 괵나라는 이와 입술 같은 사이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듯(순망치한: 脣亡齒寒) 괵나라가 무너지면 우나라도 위험하다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우나라 왕은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고 진나라의 제의에 허락하고 말았다. -p99
그러나 개자추는 나오지 않았다. 산이 전소된 후에 살펴보니 개자추는 어머니를 업은 채로 나무를 붙들고 생을 마감하였다. 그때서야 진 문공은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진 문공은 개자추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매년 그의 기일에는 뜨거운 음식을 먹지 않고 차가운 음식만 먹도록 하였다. 이날이 바로 한식(寒食)의 유래이다. - p111
그러나 초 영왕은 포기하지 않고 또 안영을 알현하는 자리에 제나라 출신의 도둑놈을 데리고 와서 “제나라 사람은 왜 그렇게 도둑질하는 자가 많은가?”라며 창피를 주었다. 그러자 안영은 “귤(橘)은 회수 이남에서는 귤이지만, 회수 이북에서는 탱자(枳)가 됩니다. 이는 토지와 풍토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제나라에서 도둑질을 안 하던 자가 초나라에 와서는 도둑질한다고 하니, 이는 필히 초나라의 풍토가 도둑질하게 만든 것으로 사료됩니다.”라고 반박하였다. -p172
이에 오 부차는 원수를 갚고자 절치부심하다가 기원전 494년에 드디어 월 구천을 물리치고 항복을 받았다. 그러나 월 구천은 다시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재기를 노리다가 결국 473년에 오 부차를 물리치고 재기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오나라가 멸망하고 월나라가 승리하면서 길고 길었던 두 나라 간의 오월쟁패(吳越爭霸
[P. 71] )는 종지부를 찍었다. 또 최후의 승자 월나라도 얼마 후 초나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 p215
일설에는 미인계로 서시와 정단이 오나라에 도착하자 그 아름다움을 구경나온 군중이 너무 몰려 성문이 부서졌다고 하며, 이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오자서는 정단을 보고는 “성을 기울게 할(傾城) 미인”이기는 하나 받아들여도 괜찮다고 했으나, 서시를 보고는 “나라를 기울게 할(傾國) 미인”이라며 받아들이면 안 된다며 반대하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 p226
소대는 조 혜문왕을 만나 말하길, “역수를 지나다가 문득 강변에서 조개가 햇볕을 쬐고 있었는데, 갑자기 도요새가 날아와 부리로 조갯살을 쪼았습니다. 깜짝 놀란 조개는 조가비를 굳게 닫고 부리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다급해진 도요새가 ‘비가 오지 않으면 너는 말라죽을 것이니 어서 놓아라.’라고 하자, 조개는 또 ‘내가 놓아주지 않으면 너는 굶어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서로 양보 없이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지나가던 어부가 둘 다 잡아갔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연나라를 치려고 합니다만, 연나라와 조나라 두 나라가 싸운다면 옆에 있는 진(秦)나라가 어부가 되어 모두를 차지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p284
쓰러져 가는 조국과 주군을 향한 일편단심, 그러나 자기의 뜻과 정반대로 가는 세상에 비관하여 결국 굴원이 선택한 것은 멱라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것이었다. 굴원이 멱라강에 투신하여 죽은 날이 바로 음력 5월 5일 단오날이다. -p290
[P. 80] 이후 마씨 부인은 여상이 제나라의 제후에 봉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재결합을 원하였다. 그러자 여상은 부인에게 물 한 그릇을 떠 오라고 하더니 그것을 땅에 엎었다. 그리고 지금 바닥의 물을 다시 담는다면 아내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여상은 “한 번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고(覆水不返盆), 한 번 떠난 아내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포숙아의 위대한 점은 관중의 벼슬이 자신보다 높아도 개의치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오로지 대공무사 정신으로 자신의 나라와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하였다. 하지만 제 환공은 포숙아를 생명의 은인처럼 여겨, 어떻게든 포숙아에게 높은 벼슬을 하사하려 하였지만, 관중은 오히려 “포숙아와 주공의 관계가 두텁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기에, 굳이 포숙아에게 높은 벼슬자리와 실권을 주지 않아도 모든 관리들이 포숙아의 눈치를 볼 것입니다. 그러기에 포숙아는 주공 곁에서 관리들을 감찰하게 하는 직무를 주면 적합합니다.”라며 제 환공에게 직언하였다. 그러자 포숙아도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흔쾌히 관중의 의견에 찬동하였다고 할 정도로 그릇이 큰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