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일본여자 시라키 레이의 딸 제가 시라키 레이의 아들입니다 순정한 시간 그 아이 연희 비운의 국가대표 선수 오수도리 산장의 남자 주호와 연희의 〈마음산책〉 연어와 마가목 그해 크리스마스 선물 유강표와 시라키 레이의 화려한 연애 시절 주호가 몰랐던 연희 낯선 곳에서도 우리를 견디게 하는 것들 그리고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엔드리스(Endless) 시리즈는 도서출판 넥서스가 ‘문학의 영원함’을 캐치프레이즈로 삼아, 세대를 초월하는 탁월한 한국문학 작품을 엄선하여 독자들에게 널리 소개하고자 2024년 새롭게 시작한 재출간 프로젝트입니다.
Endless 6 ≪삿포로의 여인≫
황순원작가상과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국 스키의 역사와 함께 펼쳐지는 운명적인 사랑. 눈부신 설원 위에서 사랑의 이름을 부르다.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내요.” 이 외침과 함께 떠오르는 서로 다른 장르의 두 작품이 있다.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시의 설원을 배경으로 영화 《러브레터》와 바로 한국의 강원도 대관령을 배경으로 한 눈꽃 같은 소설, 바로 이순원의 《삿포로의 여인》이다. 소설 <은비령>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 이순원이 쓴 이 장편소설은 삿포로에서 태어나 대관령에 와서 살았던 백인혼혈 여성 시라키 레이와 대관령에 살다가 엄마인 시라키 레이가 사는 삿포로로 떠난 연희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이순원은 <작가의 말>에서 이 작품을 통해 “그들의 겨울눈 같은 사랑과 봄눈 같은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하며 “겨울눈은 무거워 운명적이고 봄눈은 미처 눈을 돌릴 사이 없이 녹아버려 안타깝다.”고 말한다. 눈의 고장인 삿포로와 대관령은 또한 겨울 스포츠의 꽃이라 불리는 ‘스키’로도 유명한 지역이다. 이 소설에서는 시라키 레이의 남편이자 연희의 아버지였던 스키 선수 유강표의 발자취와 함께 한국 스키의 역사가 소개된다. 1960년~1970년, 열악했던 한국 스키선수들의 경기 환경과 스키장의 시설 현황부터, 1970년 이후 신문 기사 자료로 엿보는 (유강표와 시라키 레이가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한) 삿포로 프레올림픽의 장면들, 한국 선수의 첫 경기였던 노르딕 30km에 관한 내용도 홍미롭다.
● 은빛 설원처럼 눈부시고, 눈보라처럼 격렬한, 그리고 폭설처럼 비극적이었던 한 스키 선수의 인생과 사랑
일간지 경제부 기자인 박주호에게 한 고등학교 체육 교사로부터 연락이 온다. 그는 잊을 수 없는 기억 속의 한 소녀, 유연희의 오빠였다. 그로부터 주호는 비운의 국가대표 선수였던 유강표와 일본여자 시라키 레이의 이야기, 그리고 불타버린 오수도리 산장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유강표는 1971년 삿포로 프레올림픽의 크로스컨트리에 출전했던 스키 선수였다. 이 무렵 한국 스키는 어재식과 고태복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처음 그들과 함께 활강 스키를 하던 유강표는 실력에 밀려 장거리 노르딕으로 종목을 바꾼다. 대관령 오수도리산장 주인의 도움으로 삿포로 프레올림픽에 참가하게 된 유강표는 거기서 백인 혼혈인 일본여자 시라키 레이를 만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일본어에 유창한 오수도리산장 주인의 도움으로 편지를 주고받다가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하지만 고태복, 어재식만큼 주목받지 못했던 유강표는 예전 동료들이 스키계에서 코치로 감독으로 또는 스키장 리조트회사 간부로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며 열등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한다. 연희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연희 엄마 시라키 레이는 남편의 폭력적 성향을 견디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유강표는 폐인처럼 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다. 유명한에게 전해 들은 연희 부모의 이야기는 설원처럼 아름답고, 눈보라처럼 격렬하며 한편, 폭설처럼 비극적이었다. 하지만 주호가 기억하는 그들의 딸, 연희의 모습은 달랐다.
● 눈꽃처럼 피어난 첫사랑,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
주호는 중학교 시절, 처음 연희를 보았다. 버스정류소에서 술을 마시고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던 과거의 스키 선수 유강표와 그를 바라보며 서 있던 모녀. 미묘하게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일본여자 시라키 레이와 그녀의 딸, 연희였다. 그리고 주호가 제대한 후 대관령 횡계에 있는 친척 집에서 머무르면서 아르바이트로 구판장 일을 돕던 때, 연희는 근처 ‘미라노패션’이라는 양장점에서 옷 수선 일을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연희가 일을 마친 후 조용히 책과 워크맨으로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을 때, 구판장의 주호도 실내등을 켜놓고 혼자 공부를 하곤 했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관령에 머물렀던 2년의 세월 동안 주호는 그곳에서 길 아저씨와 미옥이, 용래 등과 함께 추억을 쌓아간다. 무엇보다 비슷한 처지의 연희를 동생처럼 아꼈던 주호는, 연희와 함께 길 아저씨의 연어 낚시에 동행하기도 한다. 연희는 엄마가 사는 일본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주호에게 편지를 건넨다. 20년이 지난 후, 연희 오빠인 유명한의 도움으로 다시 편지를 주고받게 된 두 사람은 뒤늦게 그때의 눈꽃 같은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때의 시간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나날이었음을.
작가는 어느 가을, 방문한 삿포로에서 도로 가로에 심어진 마가목을 보고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대관령의 깊은 산속에서나 볼 수 있는 붉은 열매의 마가목이 놀랍게도 삿포로의 도로 가로수로 자생하고 있었다. 대관령에서 자란 아이가 나중에 이곳에 와 살아도 이 나무 때문에 외롭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연희가 주호에게 알려준 일본노래 ‘나나카마도(마가목)’의 노랫말이 여운처럼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하얗게 얼어붙은 아침 언덕에서 새빨간 보석을 찾아냈어요. 서리가 내린 마가목 열매를 입김을 불어 녹여주었지요. 손바닥 위의 빨간 열매를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당신이 떠올랐어요.
이렇게나 차가운 계절에도 당신은 여행을 하고 있는 건가요? 당신이 여행을 떠난 것은 아직 눈이 남아 있을 때였어요. 그로부터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제 키도 커졌어요. 천천히 천천히 자라나는 마가목은 생명의 나무
이 나무가 좀 더 자라서 새하얀 꽃을 피울 때쯤 한 번 더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러갔지만, 그 시간 또한 맑게 흘러 다시 서로 이름을 부르게 된다면 이번엔 자신이 먼저 그 시절 연희처럼 그곳이 삿포로든 어디든 찾아가겠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내가 가는 길 네가 좀 시간을 내어달라고……”_본문 중에서
책속에서
[P.112] 저마다 아버지들이 산에서 나무를 베어와 톱과 자귀와 대패로 아들의 스키를 만들어 주었다. 스키 앞머리는 불에 바짝 달구어 힘을 주어 휘었다. 스키에 신발을 끼우는 앞 바인딩은 깡통을 오려서 만들고 뒤축을 고정시키는 뒤 바인딩은 철사를 꼬아 앞뒤로 끈을 묶어 신발을 고정시켰다. 스키화는 눈 위에서 신는 고무장화를 사용했다. 검정 운동화보다 장화가 뒤축이 높고 든든해 나무스키를 발에 묶기가 좋았다. 양말도 두툼하게 신을 수 있었고, 신발 속에서 발목을 놀리기도 편했다. 스키 폴도 대나무로 만들었다.
[P. 124] 여기 산장뿐 아니라 대관령 마을의 집집마다 마당 한 귀퉁이거나 헛간 뒷벽에 가지런히 쌓아놓은 장작을 보면 그 장작들이 영락없이 그 집 아버지의 모습을 닮았다. 장작을 패 쌓아놓은 솜씨 하나에도 고태복의 집에는 고태복 아버지의 무늬가 있고, 그의 집엔 그의 아버지가 살아온 삶의 무늬가 배어 있었다. 장작 하나에도 그 나무와 그것을 팬 사람의 내력과 인품이 나타나고 삶의 결 같은 것이 드러났다.
[P. 176] 길 아저씨의 지론은 간단했다. “열심히 일만 하며 지나가는 시간이나 인생을 즐기며 지나가는 시간이나 다 똑같이 귀한 ‘그때의 시간’이지. 열심히 일하고 나중에 폼나게 즐기려 하면 ‘그때의 시간’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는 거야. 그건 청춘의 시간도 마찬가지고 장년과 노년의 시간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인생은 그때의 시간으로 즐겁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하는 거라고. 인생에서 다음이란 미래의 시간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 접근할 수 없는 과거나 마찬가지의 시간이지. 지금 할 수 없는 것을 다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다음에 가면 그건 또다시 그때의 시간으로 접근할 수 없는 다음이 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