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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서장 : ‘여승’과 서술자

1 만우절 개강
2 체리의 계절
3 천마를 찾아서
4 자하문 저쪽
5 모기와 마복자
6 매를 날리며
7 신라 종이, 계림지
8 토포필리아
9 크로노스의 초상
10 산골 물소리
11 문화 뒤의 가면
12 계림지를 찾아서
13 변신의 계절
14 아카디아 환상
15 첫눈, 불길과 물길

종장 : 유령의 시간

■ 미주
■ 평설 : 소설이라는 바람(風)에 실린 서사화된 바람(願) _ 호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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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바람 : 우한용 장편소설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0003164545 811.33 -25-269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0003164546 811.33 -25-269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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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려 하지 말고 상상과 느낌으로 접근하면
바람처럼 읽히는 다성적 소설의 독특한 매력


『그래도, 바람』은 소설가이자 소설 교육자로서 평생 문학을 고뇌하고 탐구해온 우한용 작가의 소설 창작 강의 현장을 기록한 형식을 빌린 장편소설이다. 소설의 본질에 대하여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저자는 새로운 소설적 도전을 통해서 다양한 세계를 탐구하고 그 속에서 진실을 추구한다. 소설이란 무엇인지, 좋은 소설은 어떤 것인지 숙고하며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은은하게 퍼지는 서사적 욕망의 바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소설창작 강의 현장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소설창작론을 강의하는 ‘천강월’과 수강생들이 주고받는 문학에 대한 문답, 소설 쓰기, 합평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일종의 ‘문학론 강의’처럼 읽힌다. 작가는 이 소설 속에서 여러 인물의 세계관을 엮어내고 교차하여 다채로운 세계로 재구성하고 있다. 창작을 경험하는 ‘남아진’의 세계, 소설과 문학에 대해 분투하는 ‘천강월’의 세계, 「자하문기」 속의 ‘석자명’의 세계, ‘천마’를 찾아 헤매는 ‘계환수’의 세계 등등으로 나아가며, 소설 쓰기의 본질에 대해 얽히고설킨 해답을 찾아간다.
소설가로서, 이야기꾼으로서, 강의자로서, 인간으로서 끊임없이 다양한 물음을 자아내는 저자는 소설 쓰기를 통하여 삶을 성찰하고 서사의 힘을 규명하고자 한다. 읽으려 하지 말고 상상과 느낌으로 이 소설에 접근하고자 하면 그제야 바람처럼 읽힐 것이다.

우한용 작가의 『그래도, 바람』은 소설을 공부하고 창작하는 독자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는 ‘문학론 강의’처럼 읽힌다. 어떤 개인의 핍진한 이야기와 진지한 소설 창작론 사이에서 작가가 선택한 방법은 철저히 ‘대화’로 회귀하는 것이다. 일찍이 바흐친(M. Bakhtin)은 소설을 두고서 ‘형식 창조적 이데올로기’의 속성을 지닌 양식으로 무수한 대화의 양상이자, 그 자체로 비종결의 장(場)이라 규정한 적이 있다. 그가 제시한 ‘대화적 서사’ 개념은 소설을 소통론적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굉장한 유혹으로 다가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듣는 이와 말하는 이 사이의 동시적 소통[對話] 행위로서 소설적 대화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규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과업이다. 바흐친 자신 역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만을 대화적 서사로 제시하지만, 지금의 독자에게 산문(散文)적 담론인 소설의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번 작품 속 천강월의 강의와 남아진의 상상적 대답 역시 바흐친이 찾던 대화적 서사의 한 양상일지도 모른다. 다성(多聲)적 소설을 찾고자 한 번이라도 고심을 해봤던 독자라면 이번 소설을 통하여 작가 ‘우공’이 시도하고자 한 근본 뜻을 어림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우공은 근래 끊임없는 서사적 변모를 꾀하였다. 소설의 몸을 바꾸는 시도에서도 소멸하지 않는 서사의 양태(『시인의 강』(2021))에 주목하였고, 읽음으로써 읽히는 것이 아닌 들음으로써 읽히는 소설 공간(『소리숲』(2022))을 마련하기도 했다. 한편, 전통의 맥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향한 시도(『왕의 손님』(2023))를 펼치기도 하였다. 이번 『그래도, 바람』은 소설 텍스트의 이중성에 대한 작가의 성찰을 매우 도전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소설가로서, 소설교육가로서 평생 고뇌하고 탐구한 그의 적나라한 기억을 가장 우공다운 소설 형식으로 제시하였다. 서사적 지속과 양식적 변화를 두루 갖춘 소설의 잡종성에 대한 물음, 즉 소설의 본질에 대하여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작가 우공은 ‘메타픽션의 메타화化’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독자는 『그래도, 바람』이라는 책에 실려 은은하게 퍼지는 서사적 욕망의 바람을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으리라. 텍스트가 만들어낸 소설적 바람을 읽으려 들지 말고 상상하며, 들으려 하지 말고 느껴보기를 권한다. 그러면, 그제야 이 소설이 바람처럼 읽힐 것이다.
― 호창수(서울대 강사, 문학평론가) 평설 중에서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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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5~56] “소설가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비평가입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인생의 비평입니다. 그리고 소설가는 자신의 내면에 비평가를 세워두고 있어야 합니다. 소설을 통해 의미를 창출하는 한편, 자신의 작품을 비판적 시각에서 검토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구체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였다.
나는 전에 읽은 어떤 글을 떠올렸다. ‘문학은 인생의 비평이다.’ 어떤 평론가가 자기 평론집에다가 인용한 F.R. 리비스의 말이었다. 1932년이던가… 거의 한 세기 전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셈이었다. 소설에서 새로운 추구가 가능할까. 소설이 새롭다는 걸 전제한다면서…
“비평가들 밥 빌어먹겠네,”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P. 172] 백석과 나타샤를 태우고 걸어가는 흰 당나귀 발자국마다, 맑은 바람이 다가와 소용돌이치다가 깨끗한 물이 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람을 기다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바람(風)을 기다리는 바람(소망), 두 바람은 동음이의어였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다’, 그 구절의 ‘바람’을 세속의 바람, 즉 세풍(世風) 혹은 외풍(外風)으로 읽는 것은 고식적 방법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바람, 위시(wish), 소망이 배반과 실망을 낳는 게 아닌가.
바람은 언덕으로만 불어 치올라간다. 바람은 언덕으로, 예배당 첨탑 끝으로만 불어 올라간다. 암 수술하는 그 불안과 고뇌의 시간을 서사로 풀어내는 것은 바람기, 그 말고 다른 말로 표현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존재의 내면이 바람으로, 소용돌이로 가득해서 존재가 휘돌아가는 이런 일은 가히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 사건을 견뎌낸 천강월은 생애에 가로놓인 거대한 강을 건넌 셈이었다. 병이 인간을 단련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P. 307] “우리는 독서를 간접체험이라 합니다. 경험과 체험을 갈라 쓰기도 하고, 바꾸어 쓰기도 합니다. 체험의 직접성과 간접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편이(便易)를 위한 것일 뿐입니다. 사는 과정이 모두 체험입니다. 아무튼, 잘못하다가는 내 별명이 ‘아무튼’ 되겠네, 아무튼 소설 읽기는, 한 인간의 성장에서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책을 사고 읽고 글 쓰고 하는 과정 자체가 체험(객관적 시간의 자기화)입니다. 소설은 언어적 삶을 다루지 않습니까. 소설가는 인간의 언어적 삶을 다루는 전문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