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무오사화 이 ‘사초’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7 이극돈, 유자광을 찾아가다 유자광, 김일손 사초 연산군에게 고하다 연산군, 사초를 보다 ‘조의제문’이 단종과 무슨 상관인가 드디어 사림파 선비들을 죽이다
2장 갑자사화 “우리 임금이 달라졌어요!” 연산군은 누구인가 “내 옷에 술잔 엎지른 자 국문하라” 연산군, 장녹수의 치마폭에 푹 빠지다 임사홍, 폐비 사건 전말을 고하다 “세좌의 죄는 반역보다도 심하다” 왕을 갈아치워 잘못을 바로잡다
3장 기묘사화 훈구파, 허수아비 왕을 세우다 중종, 사림파 조광조를 등용하다 구언 상소가 사림파의 위상을 높이다 왕비 간택령 내리다 사림파, 개혁에 적극 나서다 가짜 공훈자 가려내 퇴출하다 ‘주초위왕’ 새긴 나뭇잎 발견되다 중종, 밀지를 내리다 신무문의 난이 일어나다 “그렇다면 내 죽음은 틀림없소!” 개혁은 전광석화처럼 해야 성공한다
4장 을사사화 남곤도 가고, 심정도 가고 김안로, 권력의 핵으로 떠오르다 중종, 김안로 처단 밀지를 내리다 세자, 즉위하여 인종이 되다 인종, 7개월 만에 죽다 문정왕후, 을사사화를 일으키다 벽서사건으로 을사사화 완결되다
후기: 정치 보복의 역사를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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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적 말살사 : 폭군, 수구, 기득권을 위한 당파와 폭력의 역사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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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지금도 되풀이되는 정적 죽이기, 조선 시대 선비들은 어떻게 정적을 제거해 갔을까? 소설처럼 읽는 조선 사화 이야기!
“죽임과 죽임이 쌓이고 쌓여 이룬 퇴적층이다.”
저자는 이 정의를 통해 역사의 시간 흐름에서 단 한순간도 ‘죽임’이 없었던 적이 없었음을 웅변한다. 그럼 누가 누구를 죽이는 걸까. 힘 있는 자가 자기에게 대드는 사람을 죽인다. 이들 사이에는 ‘권력’이나 ‘이권’이 작동한다. 이걸 ‘정적 죽이기’란 말로 표현해도 된다. 저자는 왜 정적 죽이기의 핏빛 흑역사를 굳이 이 시점에 다시 소환할까. 반복된다는 역사 법칙이 여전히 작동하기에 지금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기 때문이란다. 저자는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현대사를 보라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김구 임시정부 주석을 제거하려고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을 쥐도 새도 모르게 현해탄에 수장까지 하려 하지 않았던가. 이뿐이 아니다. 그럼, 지금은 또 어떤가. 저자는 바로 이런 문제의식으로 4대 사화를 자세하게 들여다본다. 4대 사화의 본질은 권력을 잡은 훈구파와 이를 비판하는 사림파의 핏빛 대결이다. 하지만 저자는 사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물망처럼 얽히고 얽힌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관계에서부터 조상과 가문, 외척, 소신, 학문, 당파, 정치적 입장, 여느 가문과 관계까지 망라해야 한단다. 그래서 이 책은 이런 관점에서 사화를 들여다보았다.
무오년 선비 살해 사건
조선의 최초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연산군 4년)에 일어났다.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실록청 당상이었던 좌찬성 이극돈(李克墩, 1435~1503)이 사초 더미에서 자신의 비위를 기록한 사관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 쓴 사초를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전라도 관찰사 시절 이극돈이 세조 비인 정희왕후의 장례 때 빈소가 있는 한양을 향해 향을 바치지 않은 데다, 기생까지 끼고 놓았다는 내용이었다. 삭제해 달라고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사초를 없애야 했던 이극돈은 간신 유자광을 찾아가면서 사건은 일파만파 커진다. 여기엔 김일손의 장원급제를 막은 이극돈과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현판을 떼어낸 김종직과의 개인적 악연까지 그 행간에 흐르고 있었다. 아무튼 이 일은 세조의 궁금비사(세조가 며느리를 불렀다는 얘기, 단종비 소릉 문제)까지 들춰지고, 급기야 김일손의 스승이자 사림의 상징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조의제문(弔義帝文)>까지 소환된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중국 초나라 의제가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걸 비유해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계유정난을 비판한 시다. 이 상황에 분노한 연산군이 결국 해서는 안 되는, 사초를 가져오라고 해서 직접 본다. 그러고 나서 관련된 자들은 물론 김종직의 제자들까지 마구 잡아들여 목숨을 빼앗는다.
갑자년 선비 살해 사건
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는 무오사화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무오사화는 전형적인 훈구파의 사림파에 대한 공격이었다면, 갑자사화는 순전히 연산군이 생모 때문에 벌인 개인적 복수극이다. 그래서 갑자사화에서는 사림파와 훈구파 모두 희생됐다. 발단은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제헌왕후)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임사홍으로부터 전해 들으면서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행장에 기록된 외할아버지의 이름이 ‘윤기견’이라 쓴 걸 본다. 의심스러워 혹시 ‘윤호’를 잘못 쓴 거 아니냐고 물었었다. 제대로 쓴 거라는 답변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었던 터다. 그날 술자리에서 이 얘기를 들은 연산군은 그길로 궁으로 달려가 생모 윤씨를 시기 질투하던 귀인 정씨와 엄씨를 때려죽이는가 하면 할머니 인수대비더러 “어찌하여 제 어머니를 죽였습니까”고 따지기에 이른다. 이 일은 일파만파 확대되면서 생모 윤씨의 사사와 관련한 인물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한다. 양로연에서 술을 받다 술잔을 엎질러 연산군의 옷을 적시는 일로 처벌까지 받았던 이세좌는 윤씨 사사 때 사약을 들고 갔던 인연으로 멸문지화를 당한다. 그러면서 연산군은 생모 사사와 관련한 윤필상과 한명회 등 열두 명의 관료인 ‘십이간’을 비롯하여 모두 230명을 처형했다고 한다.
기묘년 선비 살해 사건
기묘사화(己卯士禍)는 1519년에 패륜적 기행을 보이던 연산군을 폐위하고 강제로(?) 옹립된 중종이 훈구파와 손잡고 사림파를 대거 숙청한 사건이다. 연산군의 이복동생 중종은 자기도 모르는 얼떨결에 반정군에 의해 즉위했다. 반정군은 똑똑한 왕보다는 자신들이 쥐락펴락할 수 있는 허수아비 왕이 필요했다. 하지만 즉위하고 10여 년이 지나며 반정군의 핵심 리더들이 죽으면서 훈구파의 권력에 공백이 생겼다. 때마침 자기 정치를 하고 싶었던 중종은 훈구파의 견제 세력으로 조광조(趙光祖, 1482~1519년)를 비롯한 사림파들을 등용한다. 사림파는 여러 개혁 조치를 단행하기 시작했다. 도교의 잔재를 없앤다며 소격서를 철폐하고, 필요한 인재를 널리 등용한다며 ‘현량과’를 실시했다. 백성들을 위한다며 향약을 널리 보급하였다. 그리고 사림파는 여러 차례 의견 개진만 있었을 뿐 훈구파의 시퍼런 서슬에 눌려 쉬쉬하던 ‘위훈(僞勳, 가짜공훈)’ 문제를 물 위로 끄집어냈다. 중종반정에 공이 있는 자들을 공신으로 책봉한 ‘정국공신(靖國功臣)’은 모두 117명으로 역대 최대다. 공이 없는 가짜 공신이 다수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는 중종에게서 끝내 허락을 얻어 가짜 공신들을 가려내 공훈을 삭탈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사림파의 개혁 조치에 위기의식을 느끼던 훈구파가 반격에 나섰다. 남곤과 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가 밤에 몰래 중종을 찾아가 사림파를 잡아들이라고 한 것이다. 개혁 피로감이 시달리던 중종도 이들의 요구에 응한다. 이렇게 시작된 기묘사화는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개혁 세력들을 모조리 잡아들였고, 이들의 목숨을 빼앗거나 유배를 보냈다.
을사년 선비 살해 사건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는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와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의 친정 세력인 파평윤씨 가문이 서로 편을 갈라 일어난 권력다툼이다. 세자 ‘호’를 낳은 장경왕후가 죽으면서 호시탐탐 세자 자리를 뒤흔드는 일이 벌어진다. 특히 경빈 박씨가 낳은 중종의 맏아들이자 서자인 복성군 문제가 뜨거운 감자였다. 이런 데다 뒤늦게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생산하면서 중종의 후계 문제는 복잡해졌다. 1527년 ‘작서(灼鼠)의 변’(불에 탄 쥐를 매달아 놓은 사건)과 1533년 ‘가작인두(假作人頭)의 변’(사람 머리 인형 만든 사건)이 일어나면서 세자의 지위를 흔든다. 그러자 세자의 후견인인 김안로(장경왕후의 딸 호혜공주 시아버지)와 외삼촌인 윤임(‘대윤’이라 함)이 중심이 되어 세자를 보호했다. 이러는 사이 중종이 죽었고, 세자는 곧바로 인종으로 즉위한다. 이 상황이면 왕위를 둘러싼 암투는 멎어야 한다.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은 소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인종이 건강도 좋지 않고, 슬하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종이 즉위 7개월 만에 죽었다. 인종은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한다고 유언했다. 경원대군은 명종으로 즉위했다. 그럼 소윤 측에서는 바라던 바를 이루었으니 더 이상의 피비린내는 풍기지 말았음도 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경원대군의 나이가 어려 수렴첨정에 나선 문정왕후가 그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흔들며 동생들을 볼모로 치도곤을 했댔던 대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던 거다. 문정왕후는 윤원로와 윤원형 등 친정 오빠들에게 밀지를 내려 세를 규합하도록 하고는 역모 사건을 꾸민다. 윤임의 조카였던 계림군(성종의 셋째아들 계성군 양자)과 희빈 홍씨의 아들 봉성군이 그 대상이었다. 이리하여 관련자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여 처단한다. 그런데 이 을사사화는 여느 사화와 달리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문정왕후를 비난한 벽서)으로 또다시 대윤의 잔당이라며 사림파 세력을 일망타진하여 사화를 완성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사화는 과거에 박제된 죽은 역사가 아니라 여전히 지금의 우리를 비추는 ‘역사의 거울’이다. 치열함을 넘어 잔인하기까지 한 지금의 진영 간 반목을 보면 사화와 너무도 닮은꼴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지금도 되풀이되는 정적 죽이기!
자자는 말한다. 이 책을 시작할 때 ‘정적’이란 낱말을 쓸 것인가를 놓고 고심했단다. 결론적으로 이 말 말고는 사화를 비롯한 권력투쟁을 직접적이고 정직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단다. 이제 우리 역사에서 ‘정적 죽이기’나 ‘정치 보복’ 같은 낱말은 다시 등장하지 않았으면 바람에서 이 낱말을 쓴다는 저자는 고르디우스처럼 단칼에 얽히고설킨 매듭 끊어내는 것과 같은 결기와 지혜로 흑역사가 끝나길 바란다. 요즘 우리 사회에 ‘역사평가’나 ‘역사 심판’이란 낱말이 자주 소환된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뭔가 공정과 정의가 무너진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징조이다. 이런 혼란은 권력자의 경거망동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럴 때 ‘역사’는 함부로 날뛰지 말 것을 경고한다. 하지만 권력에 취하면 이런 경고쯤은 안중에도 없게 마련이다. 자신이 휘두르는 권력의 칼이 곧 역사 심판의 칼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의 칼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올바른 역사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책속에서
[P. 23] 이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은 연산군은 물론이거니와 걸출한 개혁가 조광조로 상징되는 중종 대에 이르러서도 중용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가만히 앉아서 당할 훈구파가 아니었다. 공격이 들어오면 나름의 논리로 맞장구를 치지만, 허물이 너무 많은 탓에 방어 논리의 함량이 크게 모자랐다. 그럼 어떻게 할까. 이럴 때 동원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인신공격이다. 그 인신공격도 먹히지 않으면 그들이 선택할 카드는 없다. 이들을 어떻게 해서든 정계에서 퇴출하는 것 말고는. 그리하여 훈구파는 왕도 어찌할 수 없는 구실을 만들어 그걸 빌미로 왕권을 등에 업고 공격에 나선다. 그게 ‘사화’였다.
[P. 29, 30] 악연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극돈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였다. 이조에서 전랑(銓郞)을 뽑아야 했다.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는 관례에 따라 전임자가 김일손을 추천했다. 보통 전랑은 5품의 하급 관리직이지만, 이조전랑은 달랐다. 관리에 대한 인사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각 부서의 당하관(堂下官)과 재야인사를 추천하는 핵심 요직이었던 이조전랑은 명망 있는 문신이 맡았고, 웬만해서는 탄핵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진급이 보장되는 자리였다. 김일손으로서는 큰 꿈을 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때도 이극돈이 김일손의 인물됨이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