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悲鳴·12 느리고 하염없는 슬픔·13 그 벽·14 언젠가 우리가 꿈을 꾸듯이·16 그리운 시절·18 산불·20 오징어 파티·22 초상화 시리즈·24 악마의 입술·26 죽음의 축제·28 비교하지 마·30 밤 1시 30분·32 정답이 없다·33
2부
냉혹한 사랑·36 첨단尖端을 위하여·37 저수지, 묵직한 그 흐름 속에는·40 힘이 세상을 누른다·42 한파·44 격노激怒·46 우두커니·48 난장판·50 격렬비열도·52 나는 그렇게 살다가·54 일장춘몽一場春夢·58 환락·60
3부
시계추에 기대어·62 퇴폐 속으로·67 사랑의 방식·68 죽음의 키스·70 산갈치·72 빈곤의 철학자·74 두 장의 얼굴·76 관점·78 흘러내리는 말들·80 바다가 있다·82 거기 주인처럼·84 세월·85
4부
방생放生·88 밤하늘에 새파란 별이 뜨고 지는데·89 두려운 밤·92 군무群舞·94 보란 듯이·96 고맙다·98 하얀 평화·100 옛날에 금잔디 동산·101 입이 없다·104 만화방창萬化方暢·105 개미에게·106 국경에 대하여·108 무덤이 그렇게 서 있는 이유·110
해설 | 유성호_사물과의 친화와 결속을 통한 ‘사랑’의 시학·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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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이수익 시인은 깊은 눈길로 세계를 응시하고 거기에 자신의 기억을 던져 넣는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타자들에 대해 한없이 따스한 말을 건네면서 자신을 향해서는 매우 중량감 있는 성찰의 언어를 부여해왔다. 이러한 사유와 감각이 그의 시로 하여금 우리 시대를 끌어가는 구심력으로 나아가게 하고, 우리에게 현실을 벗어나 꿈의 원심력을 가지게끔 하는 향원익청香遠益淸의 세계를 구성했던 것이다. 이때 우리는 ‘시인 이수익’의 양도할 수 없는 언어적 상징과 그만의 기원이자 브랜드를 선명하게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시인은 사물과의 친화와 결속을 통한 사랑의 시학을 담아왔다. 이제 우리는 이수익 시인이 이러한 그동안의 탁월한 성과를 딛고 품으며, 앞으로도 더욱 심미적 열정과 첨예한 미의식을 갖춘 진경進境으로 나아가기를, 온 마음으로 희원해본다.
사물과의 친화와 결속을 통한 ‘사랑’의 시학 -이수익의 시세계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 이수익 시인의 화려한 등장 1950년대 시가 전후(戰後)의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근대적 주체를 설정하는 일을 시급한 과제로 제기하였다면, 1960년대는 시가 지향해야 할 본원적 가치의 정립과 새로운 미학적 차원의 심화라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그만큼 이 시대는 전후로부터 이월된 주체의 상실감을 극복하고 새로운 주체를 구축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을 품고 있었다. 또한 1960년대 이후 착근된 자본주의적 삶의 원리에 대한 비판적 탐색과 근대적 주체의 내면 모색이라는 명제 역시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대두하였다. 한국 시는 이 시기에 이르러 현실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비로소 가능해졌고, 또 형식 미학에서도 이전 시기보다 한 걸음 나아간 성취를 이루게 된다. 그만큼 이 시기는 한국 시의 현대성 구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국 시단은 전대(前代)에 비해 볼 때 매우 이채로운 활황을 보인다. 그 가장 두드러진 지표가 각종 문예지 혹은 동인지들의 창간 및 지속적 발간이다. 예컨대 60년대사화집 현대시 시단 신춘시 돌과 사랑 신연대 여류시 등을 비롯해 사계 산문시대 영도 시와 시론 시학 등의 동인지가 잇따라 발간되었고, 창작과 비평 월간문학 현대시학 문학과 지성 등의 문예지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창간되었다. 이처럼 다양해진 매체를 통해 1960년대 시는 독자들과 폭넓게 소통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외적 지표는 200명 넘는 시인들이 대거 등단함으로써 시단의 세대교체와 창작 주체의 증가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전개된 1960년대 시는 4․19혁명의 경험과 그 한계를 두루 반영하면서 서정시 본래의 상상력과 미학을 개척하는 활발한 흐름을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련된 언어적 형상을 통한 언어 미학의 추구 경향이 나타나게 되는데 가령 김춘수, 전봉건, 김종삼 같은 전대로부터 창작을 꾸준히 이어온 시인들은 물론, 평균율의 마종기, 황동규, 김영태, 현대시의 김종해, 박의상, 오세영, 오탁번, 이건청, 이수익, 이승훈, 정진규 그리고 정현종, 오규원 등이 이러한 흐름의 주역들이다. 이들은 세련된 현대적 의장에 감각적 가상과 현대인의 실존적 관념을 실어 전후의 시에 새로운 기율과 호흡을 불어넣었다. 특별히 현대시 동인의 시사적 위치는 새겨둘 만하다. 이들은 근대화 초기의 배경 속에서 언어에 대한 천착과 개성적 실험으로 시의 방법을 세련되게 심화하였고, 저마다 완성도 높은 시편으로 내면 탐구에 임하였다. 이들에 의해 미학적 자의식의 변화라든가 내면 의식의 탐구가 한국 시에서 본격화되었으며, 세계의 본질에 대한 탐색과 세계 상실의 아우라가 수용되기도 했고, 합리성에 의해 가려져 있던 ‘또 다른 현실’에 대한 천착이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수익 시인의 화려한 등장도 이러한 흐름 속에 위치하게 된다.
2. 견고한 지성과 낭만적 황홀의 변증 1960년대의 자장에서 우리는 이수익(李秀翼)의 등장과 그의 시가 펼쳐간 궤적을 상대적으로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이수익은 1942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여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1965년 서울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68년 부산MBC 프로듀서로 입사하였다. 1969년 첫 시집 우울한 샹송을 출간하였고, 이후 계속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작품 활동도 왕성하게 병행하였다. 1981년 KBS 라디오 차장, 1990년 KBS 편성운영국 부주간 등을 거쳐 1993년 KBS TV 편성주간, 1996년 KBS 라디오본부 편성주간, 1998년 KBS 라디오2국 국장, 1999년 KBS 라디오센터 제작위원을 역임하였다. 그는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한 이후 동인지 현대시에 들어가 본격적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우울한 샹송 야간열차 슬픔의 핵 단순한 기쁨 그리고 너를 위하여 아득한 봄 푸른 추억의 빵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꽃나무 아래의 키스 처음으로 사랑을 들었다 천년의 강 침묵의 여울 조용한 폭발 등을 펴냈으며, 시선집으로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불과 얼음의 콘서트 결빙의 아버지 그리운 악마 등을 출간하였다. 그동안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지훈문학상, 공초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등을 수상하는 관록을 보여준 현대시사의 대표적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수익의 등장은 이른바 ‘신서정’이라는 함의를 충족시키면서 우리 시단에 잔잔한 파문을 몰고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처음 문단에서 ‘비애와 우수의 시인’으로 평가되기 시작하였는데, 이후 정교한 미의식을 담은 세련된 언어에 집중하여 인간의 현실적 삶을 그려내는 방법을 발굴하였고, 시와 인간의 고뇌와 번민을 염두에 두면서 작업을 지속하였다. 이미지와 정서와 관념을 정갈한 언어로 묶는 방법론을 통해 그의 시는 낭만주의에서 시작하여 더욱 견고한 지성적 세계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그는 단정한 시어, 예민한 감각, 투명한 이미지의 결속을 통해 젊은 날에 대한 기억, 일상의 소소한 사물과 생명에 대한 사랑을 줄곧 노래해 왔다. 그의 시에서는 구조적 완결미와 우수 어린 아름다움이 느껴지는데, 이는 이미지즘과 미학주의의 통합을 통해 이루어진 결실일 것이다. 특히 그의 시에서 두드러진 것은 이미지의 선명성과 아름다움이다. 그의 시를 집성(集成)한 이수익 시전집(황금알, 2019)은 이수익 시의 이러한 경개(景槪)와 실질을 온전히 담고 있어 그의 시를 개관하고 평가하는 데 맞춤한 자료가 되어줄 것이다. 견고한 지성과 낭만적 황홀의 변증을 암시해주는 전집 수록 초기 습작 몇 편을 먼저 읽어보자.
아가야, 새로 이빨이 났네 금환金環의 둥근 고리를 물 수 있게 물고서 엄마 품을 드나들 수 있게
유연한 살점에서 부끄럽게 보인 그것은 눈을 뜨는 생명의 웃음소리 자극하는 애정의 그리운 발화發火
고단했던 잠결의 자락을 떠나 아가야, 너는 요람 속에 안온히 누워 가물대는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너는 혼자서도 웃는다, 거울을 보듯
그러나 아가야, 너는 모를 테지 떠나버린 사계四季의 음반 뒤에 남아 납빛 흐려지는 아버지의 우수를, 인간이 악무는 이빨 끝에서 유혈하는 인간의 살의 아픔을, 또한 그렇게 인간은 살아나감을 아마도 너는 모를 테지
아가야, 새로 이빨이 났네 영접迎接하는 생명의 프로필같이 보면 애틋한 네 이빨은 어두워라, 내 가슴에 파고들 때는 ― 「아가에게」 전문
‘아가’라는 소재 자체가 생명의 시작이요 무구(無垢)의 표상일 것이다. 새로 이빨이 나서 금환의 둥근 고리를 물고는 “엄마 품을 드나들” 아가는 이제 막 “눈을 뜨는 생명의 웃음소리”요 “자극하는 애정의 그리운 발화”를 암시한다. 안온함 속에서 거울을 보듯 혼자 웃는 아가의 모습은 그 자체로 “떠나버린 사계四季의 음반 뒤에 남아/ 납빛 흐려지는 아버지의 우수”나 “인간이 악무는 이빨 끝에서/ 유혈하는 인간의 살의/ 아픔”과는 대척적인 공간에 있다. 그러니 아가는 ‘모름’의 연속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나가고 어떻게 어두워지는지 모르는 아가는 그 특유의 순진(innocence) 속에서 숨을 쉰다. “새로 이빨”이 나듯, “생명의 프로필”처럼, 가슴으로 파고드는 아름다움의 원천으로 존재하는 ‘아가’는 근원적으로 생명의 황홀과 낭만적 칭송의 기원(origin)을 형성한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이 시편은 이수익 초기 명편 가운데 하나이다. 주지하듯 서정시의 발화는 독백적 성격을 띤다. 그것은 시인 스스로의 자기 확인이 일차적 발생 원인이 된다. 시인들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되새기고 나아가 그 시간에 대해 새롭고도 절실한 의미 부여를 해간다. 자연스럽게 시간이 남긴 무늬는 시인들의 직접적 삶의 형식이 되어주고 서정시의 가장 중요한 내질이 된다. 그 점에서 모든 서정시는 일종의 ‘시간예술’이 아닐 수 없겠는데, 이수익의 「아가에게」는 ‘아가’라는 표상을 통해 전형적 시간예술로서의 위의(威儀)를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다음 작품도 빼놓을 수 없는 초기작이 아닌가 한다.
어두운 데서 아이들을 밝은 곳으로 데려와서 눕히게, 아픈 상을 하면서도 입 밖에 아프다 하지 않는 이 아이들을 서늘한 등나무 의자 위에다 눕히게,
가장 지극한 평화와 안녕 속에서도 우리의 손은 떨리는 것이니 라일락꽃의 요동을 보아 알겠네
너무나 많은 설움이 한꺼번에 풀려와 아이들의 떨리는 손을 쥐어주게, 생환해 온 이 봄의 감격을 울어버리지 않게 꼬옥 쥐어주게, ― 「봄날의 비감悲感」 전문
여기서도 아이들이 출현한다. 아이들을 어두운 데서 밝은 곳으로 데려와 눕히듯이, 아이들을 서늘한 등나무 의자 위에다 눕히듯이, “가장 지극한 평화와 안녕”은 그렇게 온다. 그때 우리의 손이 느끼는 떨림과 라일락꽃의 요동은 그러한 아름다운 평화에 대한 자연스러운 상응(相應) 과정일 것이다. 그때 아이들의 떨리는 손도 우리에게 찾아온 설움과 감격을 한꺼번에 건넬 것이다. 그렇게 꼬옥 쥔 아이들의 손은 “봄날의 비감”처럼 다가오면서 불현듯 아름다운 봄날로 다가올 것 같은 예감을 동시에 건넨다. 이처럼 초기 이수익 시인은 시 한 편 한 편에 자신의 순결하고도 생성적인 이미지의 무게와 정서의 실감을 담아냈다. 이후 그의 시가 삶의 역동성을 이야기할 때도 매우 구체적인 경험을 담고 있고, 상처나 통증을 노래할 때도 선명한 삶의 생성적 흐름을 녹여낼 것을 예감케 해주기에 족한 성과라고 생각된다. 그 점에서 그는 개별성과 보편성을 결합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서정시가 개인 경험의 산물이자 보편적 삶의 이법을 노래하는 양식임을 깨닫게 해준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틈에서 시작하여 보편적 삶의 이법에 가닿는 그의 시적 상상력은, 그 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통해 그것들을 형상적으로 하나 하나 복원해가는 과정에 의해 완결된다. 그러한 초기 습작들을 딛고 다음의 초기 대표작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 되어 젖어 있는 비애(悲哀)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衣裳)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愛情)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 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 하면, 그 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 「우울한 샹송」 전문(우울한 샹송, 1969)
이 작품은 첫 시집 우울한 샹송의 표제작이 되었다. 왜 ‘샹송’일까? 아마도 저 1960년대 서구 문화가 밀려오면서 샹송은 가장 우울하고도 아름다운 매혹을 주는 음악 양식으로 그에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인은 사랑의 상실과 그로 인한 비애의 조건에서 시를 시작한다. 우체국에 가서 그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까, 그 비애 어린 사랑은 과연 잃어버리기 전의 의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하고 시인은 묻는다.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의 표정과 자신이 그것이 다름을 느낀 시인은 그네들처럼 자신도 웃고 싶은 순간을 가진다. 사랑과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를 보내는 그네들의 순간에서 “꽃불처럼 밝은 빛”을 발견한다. 그들이 전해준 “행복에 찬 글씨”를 자꾸만 어두워져 읽지 못하는 시인의 마음은 더욱 우울해진다.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을 만나 미소를 띠고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 자신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우울한 샹송’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애가(哀歌)이자 사랑을 향한 항구적 갈구를 포함한 송가(頌歌)이기도 할 것이다. 일찍이 카시러(E. Cassirer)가 인간은 언어가 형성해주는 현실만 알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어떤 의식도 형성될 수 없음을, 어떤 사물이나 관념도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의식 속에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가 사물의 질서를 의식 안에 구성하는 불가결한 매재(媒材)이고, 시인은 언어를 통해 사물의 질서와 근원적 실재에 가닿으려는 의식을 지닌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수익 시인의 언어는 사물이라는 거대한 랑그(langue)에서 고유의 질감과 소리를 추출함으로써 개성적 음역(音域)을 구축한 이의 파롤(parole)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시인의 남다른 감각과 결합하여 사물을 구성하는 편재적(遍在的) 원리로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초기 이수익 시인이 발화한 음역(音域)은 견고한 지성과 낭만적 황홀의 변증을 통해 나타난 것이었다. 오랜 기억 속에서 움직이는 시간에 대한 그만의 고고학적 감각이 그러한 성취를 가능케 하였을 것이다.
책속에서
1부
비명悲鳴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차마 날지 못하는 어린 새처럼
수직으로 낙하하는 흰 공포의 시간
마침내 땅바닥을 쳐서 붉게 물들인 피의,
내가 있다
느리고 하염없는 슬픔
장엄하고 느리고 슬픔에 빠져 있는 비극적 선율이 조금씩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최후의 길은 이렇게 차갑고 냉정하고 섬세한 구조로 짜여 있는 것일까 미쳐버린 새들은 둥지를 떠나 북쪽 하늘가를 날고 있고 귀를 닫아버린 아이들은 정처 없이 골목을 떠돌아다니는데 우리는 이제 입을 틀어막고, 가슴을 바짝 움켜쥐고, 처참한 애도를 드러내야 하나 장송곡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데, 우리는 외마디 비명처럼 하얗게 얼어붙은 몸으로 벌거숭이 된 채 서 있다
그 벽
사람의 혈관은 약 10만 킬로미터의 무한 협곡을 거쳐 처음 떠났던 심장으로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딱 23초
놀라운 압박을 수용하며 흡입과 분출을 자유롭게 감당하는 혈관이 당신과 나에게 있음으로서 평등하게 살아가는 그 이유가 되는 것인데
오, 거룩한 노동의 만찬이여 그리고 가혹한 피의 순결이여
오늘 아침 23초 피의 흐름을 끊고 자결한 성추행당한 여군 중사가 있다, 소름 끼치는 전율이 마구 흘러내리는
그때, 넘을 수 없었던
그 벽!
*2021년 5월, 모 공군부대에서 남성 상관에게 성추행당한 이예람 중사의 비극을 그린 시. 2024년 7월 20일 이 중사는 극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