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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머리에

序 – 역사는 왜 요리와 요리사 이야기에 주목할까?
최고 통치자와 요리사는 어떤 인연이…| 최고의 정치는 요리하듯이 하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은?| 백성에게 밥은 하늘이다


1부 나라에서 왜 요리사를 찾았나?
● 태조가 이인수를 고집한 까닭은?
개국 한 달 만에 단행한 인사에 대신들이 반발하다| 태조가 이인수를 중추원에 붙잡아둔 이유는?| 최초의 궁궐 요리사가 탄생하다
●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한양으로 불러들여라
왜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갑자기 교체했나?| 얼마나 요리를 잘했기에…| 왕실을 대표하는 공식 요리사가 되다
● 궁궐 요리사는 요리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외교관 역할도 수행한 궁궐 요리사|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던 궁궐 요리사| 고기 요리를 위해서 예외 조항까지 두기도| 요리의 다양화에도 영향을 미치다
● 궁녀들에게 속성으로 반찬 만드는 법을 가르쳐라
집찬비는 왜 따라갔을까?| 궁궐에는 여자 요리사가 없는데 어찌하겠는가?| 궁궐에서 속성으로 요리를 가르쳐라| 명나라 황실에서도 그들의 존재를 몰랐다


2부 왕의 밥상과 대신들 길들이기
● 왕이 밥을 굶으면 어떻게 되나?
세종이 초강수를 둔 이유는?| 세조는 무리한 선언까지 하다| 경 등은 함부로 말하지 말라!
● 감선에 담긴 의미 읽기
밥상을 받기는 했지만…| 명분을 찾지 못하면 굶어야 한다?| 고도의 정치적 상징성까지 담기다
● 변화무쌍(?)했던 왕의 밥상
감선은 정국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열쇠였다| 감선에 감선을 더하기도…| 감선을 선언하며 대신들을 질타하기도
● 근대화의 물결이 밀려와도 감선이 이어지다
혼란한 국내외 정세까지 감선에 담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도 전통사회의 관례가 이어지다| 감선과 철선에도 변화가 생겨나다
● 살아서 못 먹거나 죽어서 못 먹거나
쑥갓과 거여목을 올리지 말라| 금기 사항도 지속적으로 생겨나다| 몸뚱이가 완전한 것이 온전한 것이거늘| 미나리와 조선 왕실의 악연(?)


3부 왕과 밥상 정치
● 밥상도 공(公)과 사(私)를 구별한 태종
왕을 굶긴 것인지 왕이 굶은 것인지…| 무엇이 태종의 심기를 건드렸나? | 태종과 재상들이 기싸움(?)을 벌이다| 나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말라
● 어린 나이에도 감선을 주도한 성종
다시 뒤에 오는 비를 기다려도 늦지 않다| 무엇을 경비에서 덜려고 또 다 감하십니까?| 음식이 입에 맞으면 될 뿐이다!| 백성들이 굶어 죽는데 왕만 혼자 살 수는 없다
● 대신들의 눈치를 본 명종
즉위하면서부터 감선을 고민하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명종| 재상들이 먼저 피전 감선을 권했지만…| 왕이 선언한 감선을 대신들이 거두어들이게 하다
● 밥상 정치의 진수를 보여준 영조
역대 왕 가운데 최고 기록을 보유하다| 연소한 젖내 나는 무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고 스스로 실천하라


4부 왕의 밥상에 아부와 사치가 담기기도…
● 아부와 충성심은 어떻게 구별하나?
왕의 밥상을 사적으로 이용한 유자광| 맛있는 것만 보면 임금님만 생각나니 어찌하옵니까?| 왕의 밥상에서 권력이 나오다
● 감선의 관행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린 연산군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게 왕의 권한이다!| 백성들의 농사는 왕이 알 바 아니다| 왕의 밥상이 부패한 관리의 먹잇감이 되다| 하늘을 경계하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대신들의 직언을 어린아이 놀이로 취급하다
● 사치의 대명사가 된 연산군과 잔칫상
진심 어린 충언을 조롱으로 답하다| 얼마나 소비했을까?| 잔치가 일상이 되고, 국고는 바닥나고…
● 이것이 태평성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궁궐에 기생은 넘쳐나고, 백성들은 도망가고…| 나라를 말아먹다| 왕의 유전자는 없다
● 최고의 배려이면서 최고의 사치를 상징했던 궁궐 요리사
궁궐 요리사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궁궐 요리사가 부와 권력을 상징하기도…| 단지 요리를 했을 뿐입니다


5부 왕의 밥상에서 권력이 나온다?
● 왕의 밥상으로 내시부가 부상하다
왕의 식생활과 권력의 관계는?| 사옹원에도 환관들이 진출하다| 내시부가 실질적으로 사옹원을 장악하다
● 내시부 설리들이 주목받은 이유는?
업무의 확장은 권력과 비례했다?| 때로는 목숨이 달려 있기도…| 세조가 반찬 투정을 했다?| 군사를 동원하고 말을 배정하는 특권까지
● 내관들을 대신들이 경계한 이유는?
세종은 왜 내관들의 교체를 검토했을까?| 집단으로 사직서까지 제출하며 반발하다| 문종과 대신들이 설전(?)을 벌였지만…| 공경대부도 이러지는 않습니다!
● 왕의 밥상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가?
책임과 의무를 권력으로 남용하다| 부정 비리의 정점에 도설리가 있었다|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을 정도로 관례화되다| 환관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아부하기도…| 임금이 사대부를 접촉하는 날이 적기 때문입니다| 폐해를 끼치는 환관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니…


6부 왕의 밥상이 무기가 되기도…
● 정적 제거에 이용된 왕의 밥상
기미상궁은 왜 인기가 있었나?| 조선에서 처음으로 독살을 우려했던 왕은?| 독살을 혼자 실행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누가 인조의 밥상에 독을 넣었을까?
● 수라간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라
외부 음식을 엄격하게 통제했지만…| 궁인의 출입은 반드시 승정원이 알게 하라| 사형을 당하기도…| 궁궐에서 길을 잃다
● 김씨 성의 수라간 나인을 찾아라
수라간에서 일하는 자들을 선별할 것을 건의하다| 김씨 성의 수라간 나인은 어디에…| 안 찾는 건지, 못 찾는 건지…| 경종과 영조는 왜 소극적이었을까?| 누가 그 책임을 담당해야 하겠는가?
● 수라간이 역모 사건으로 주목받은 이유는?
수라간에서 역모의 주모자까지 나오다| 역모 사건에서 수라간 관원이 주목받은 이유는?| 서양 요리사는 왜 고종의 독살을 시도했나?| 수라간 관계자들이 줄줄이 처벌받다


7부 왕의 밥상과 남성 요리사
● 다양한 의미가 담긴 왕의 밥상 읽기
밥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일을 하려면 밥은 먹여야 하지 않겠는가!| 궁궐에서는 누가 식사했나?
● 잔칫상에 왕의 존재감을 담다
세분화·분업화·전문화되다| 왕과 왕실에서 주기적으로 잔치를 베푼 이유는?| 왕권과 잔치 분위기는 비례했다| 나라 안의 잔치는 모두 왕이 주관했다| 다양한 용어들이 생겨나고 체계가 갖추어지다
● 남성 요리사들이 궁궐 주방을 장악(?)한 이유는?
수라간의 남녀 비율은 14 대 1| 궁궐 주방을 장악(?)한 남성 요리사들| 격무에 시달려 도망가고 도둑이 되기도…| 사람을 부리려면 마땅히 먹여야 하지 않겠는가!
● 숙수들의 역할을 대체한 여관(女官)들
여관들이 수라간을 왕래하기는 했으나…| 수라간 곳곳에 배치되다| 숙수들의 역할을 대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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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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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밥상에서부터 시작되는
조선의 정치 이야기


조선시대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학(儒學)에서는 자연재해나 하늘에서 이상 징후가 발생하면 천견(天譴), 즉 하늘이 꾸짖으며 큰 벌을 내리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하늘의 명을 받아 인간 사회를 다스리는 왕이 직접 나서서 스스로 근신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강조했다. 철선(輟膳) · 감선(減膳) · 소선(素膳) 등은 왕의 밥상과 관련한 근신으로 모두 ‘나라에 큰 재앙이 발생했을 때 왕이 하늘의 경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두려워하고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반성한다’는 의미였다. 그중 철선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고 감선은 왕의 밥상에서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었으며 소선은 고기 먹는 것을 중지하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왕이 주도하고 통치력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정치 수단이기도 했다. 자연재해로 20회 이상 감선을 선언한 왕으로는 성종 21회, 중종 28회, 영조 89회, 정조 29회가 있다. 특히 영조는 감선을 선언하며 기간도 함께 공표했고 자연재해 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감선했는데 여기에는 대신들을 통제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더 나아가 백성들을 대상으로 왕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는 등 다양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역사는 어떻게 소비되는가?’의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교양 강의와 대중 역사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는 김진섭 작가가 역대 조선 왕들이 수라를 어떻게 정치에 이용했는지 주목하며 왕권을 중심으로 생겨난 대신들의 권력 다툼, 요리사와 환관들의 부정 비리 등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 역사 속 이야기들을 묶어 《왕의 밥상: 수라와 궁궐 요리사 그리고 조선의 정치》를 펴냈다.
이 책은 왕뿐만 아니라 왕과 요리사의 관계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조선 건국부터 이후 외교 문제까지 요리사는 정치에 빠질 수 없는 역할이었다. 태조의 조선 개국 공신이자 조선 최초의 공식 궁궐 요리사였던 이인수, 세종 대에 명나라와의 외교를 위한 요리를 맡았던 이교, 사신 접대에 특별히 파견됐던 고기 요리를 전담하는 별사옹(別司饔), 명나라의 요구로 공녀와 함께 떠난 집찬비(執饌婢) 등 수라와 잔칫상을 오간 요리사들이 남긴 발자취를 빼놓지 않았다.
반면, 사가에서 인기 있었던 궁궐 요리사들이 관리들에게 사적으로 불려 나가 논란이 되어 처벌받거나 역모와 같은 정치적 혐의에 휘말리게 된 이야기, 사옹원 제조 유자광이 왕에게 아부하여 정치적인 이익을 보려 했던 이야기, 도설리 박경례를 비롯한 환관들이 수라를 통해 부정 비리를 저지른 이야기와 러시아어 통역관이었던 김홍륙이 수라간에서 일했던 공홍식과 김종화를 시켜 고종을 독살하려 했던 사건 등 왕의 권력을 이용해 부정 비리와 역모를 꾀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잔칫상으로 역대 왕들의 왕권을 가늠해볼 수 있는 점도 눈여겨볼 만한 내용이다. 왕권이 강했던 영조의 경우 영조의 기로소(耆老所) 가입을 축하하는 내연과 외연 모두 성대하게 이루어졌고 준비 과정에서 각 부서의 역할 분담도 체계적이었던 반면, 왕권이 약했던 광해군은 부모의 제사였음에도 잔치를 준비하는 단계에서부터 요리사의 인원이 충분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으며 잔칫상 역시 왕실에서 준비했다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또한 왕이 주관하는 행사인 노주연(勞酒宴)임에도 예조판서가 참석하지 않는 등 왕권에 따른 대신들의 태도도 엿볼 수 있다.

왕의 밥상을 이루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삶을 조명하다


수라와 왕이 베푸는 잔칫상 등 왕의 밥상에는 왕을 포함한 왕실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의미들이 담기게 된다. 그러나 왕의 밥상이 화려하고 풍성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평상시 왕과 왕실에서의 낭비는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고, 솔선수범해서 근검절약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다.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정치가 왕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정치이면서 왕과 왕실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태종이 사옹(司饔) · 사선(司膳)에서 잡물(雜物)을 실어 나르는 말의 등을 호랑이나 표범 가죽으로 덮는 것을 알게 되자 가죽의 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이를 금지했으며, 단종이 어선(御膳, 왕에게 올리는 음식)을 사냥하는 군인들의 식사 문제가 거론되자 “이제부터는 수라상을 위하여 사냥을 하지 말라”고 명한 일이 그 예다. 또한 현종은 백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진상품의 가짓수를 제한하고 값을 지불하라고 명했고, 정조는 초목이 무성하여 특별히 꿩을 사냥하는 어려움을 염려하여 “사옹원에서 매일 올리는 산 꿩을 다른 것으로 대신하여 바치라”라고 명한 일도 있었다.
특히, 작가는 궁궐에서 일하는 신하들을 배려한 왕들의 정치도 살폈다. 궁궐에서 제공되는 밥상은 왕에 대한 감사와 충성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백성을 위해서 나랏일을 제대로 하라’는 책임감과 격려 등 공적인 의미를 강조했고 이는 모든 정치의 시작은 밥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세종은 인덕궁 시녀들에게 마땅히 선반과 방자(房子)와 밥을 짓고 물 긷는 사람들을 붙이고, 환관을 정하여 고찰케 해야 한다고 명했으며, 예종 즉위년과 성종 즉위년을 거쳐 왕실에서는 어린 시절의 왕을 보살폈던 유모와 보모 그리고 이들을 시중들었던 여종 모두에게 왕실 가족에 준하는 예우를 갖췄다. 또한 예종 대에는 궁궐 출입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경계를 서던 말단 병사들과 당직자들에게도 식사를 제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종 대에는 대전을 비롯한 대비전 등의 말단 관원과 노비 등 정해진 일원들에게 지급되는 봄과 가을 의복, 봉급 등을 규정으로 정하면서 식사도 제공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러한 대우에서는 왕실의 존엄성 유지와 강화라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모두 7부로 구성된 이 책은 정치를 중심으로 한 통치자와 요리사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조선시대의 역대 왕들이 수라를 통해 정치를 어떻게 요리했는가를 살피고 있다. 왕의 밥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다양한 인물들의 일화와 사건들이 엮여 있다. 이러한 전개는 평소에 쉽게 접하지 못했던 조선시대 수라간 여관(女官)들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왕이 주관하되 주변의 대신들과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백성들의 노고도 담긴 왕의 밥상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듯하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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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 그러나 평상시 왕의 밥상은 반찬이 넘쳐날 정도로 가짓수가 많지도 않았지만, 화려하고 사치스럽기보다는 영양을 골고루 담은 균형 잡힌 밥상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건강을 고려하여 보양식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지만, 특이하거나 구하기 힘든 귀한 재료들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붕어찜이나 붕어구이 또는 소의 위(양)를 삶거나 찐 것 등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한 음식도 많았다. 여기에는 음식에 대한 왕의 절제된 태도가 담겨 있다. 왕의 밥상은 기본적으로 자기 관리이면서 도덕적인 문제이기도 했고, 왕의 밥상을 직접 본 사람은 드물었지만, 왕이 무엇을 먹는지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즉 왕의 식사는 절대 권력자가 누리는 특권의 상징이 아니라 밥상에 앉는 마음의 자세에서부터 밥상을 통해 왕이 먼저 근검절약하는 검소한 생활을 보여줌으로써 대신들을 통솔하고 백성들을 통치하는 행위와도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P. 27] 당시 궁궐을 중심으로 왕의 지휘를 직접 받는 병력은 도성 수비대인 의흥친군위와 세자가 거느린 사병 등 1천 명 정도였다. 따라서 궁궐과 개경의 경계는 물론 군대의 규율을 유지하며 통솔하기 위해 먹는 문제의 해결과 같은 기본적인 지원이 더욱 중요한 게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개국 초기에는 왕과 왕실을 비롯해 왕을 지원하는 관리들 그리고 병사 등,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별도의 독립된 조직이나 요리사를 두는 제도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모두 개별적으로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태조가 이인수를 왕의 식사를 전담하는 전속 요리사가 아니라 중추원에 임명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인수는 조선이 개국한 후 궁궐에서 요리를 책임졌던 최초의 공식 궁궐 요리사라 하겠다.
[P. 38] 요리사들은 사신들에게 요리를 통한 특별한 경험을 선물하여 조선에 대해 좋은 인상을 남기는 등 양국 사이의 우호적인 분위기 조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궁궐 요리사들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기 위해 사신들이 조선에 도착하기 전부터 바쁜 일정을 보냈다. 예를 들면 문종이 즉위한 해(1450) 7월 18일 “내옹인(內饔人)을 여러 도에 보내 사신이 구하는 물품을 준비하게 했다”고 하는데 내옹인에서 내(內)는 궐내(闕內)를 지칭하고, 옹인(饔人)은 음식 만드는 사람으로 사옹원에 소속되어 궐내의 음식을 담당한 요리사를 말한다. 문종 2년(1452) 3월 26일에도 문종이 환관을 통해 태평관에 음식물을 보내면서 요리사도 함께 파견했는데, 〈문종실록〉에는 “중국의 사신을 중하게 여기어 무릇 먹이는 음식물을 극진히 생각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라며 왕이 요리에 각별하게 신경 썼다는 기록으로 보아 요리사들의 노고 또한 컸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