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내 고향 상주 / 철없던 국민학교 시절 / 어머니에 대한 기억 / 외갓집과 나의 멘토 외삼촌 / 의지하던 형님과 생이별 / 서울로 이사, 기타를 만나다 / 경기도 광주대단지에서 목격한 투쟁 / 기계에 말린 내 손가락 / 퇴학당해 악명 높은 선인재단으로 편입 / 짧았던 인연, 첫사랑이었을까 / 대학 대신 공장으로 / 부산에서 임금 떼이고 다시 서울로 / 버스 타고 무작정 도망가다 내린 무주 / 또래들과 4H 구락부 활동 / 무선통신사 꿈꾸다 입대했는데… / 원호청 소개 거부하고 스스로 대한마루콘 입사 / ‘밴드’ 하며 비로소 즐거웠다 / 노동조합 활동과 노동운동에 눈 뜨다 / 노동자 통제·억압한 공장 새마을 교육 / 나의 첫 촛불집회, 1979년 전태일 추모제 / 현장에서 소모임 결성 / 결혼, 가족에게 미안함 뿐 / ‘서울의 봄’과 한국노총 점거 / 활동하는 민주노조를 향해 / 엄혹했던 시절 ‘이적표현물’ 노래책 제작 / 전두환의 정화 지침과 노동조합 업무조사 / 사회주의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다 / 문화패 조직해 활동가 양성 / 1987년 노동자 대투쟁 폭발 / 지노협 건설 후 노조 위원장 당선 / 노동자·민중 정치세력화에 나서다 / 싸워야만 기념할 수 있었던 광주민중항쟁 / 파업 투쟁으로 부쩍 성장한 조합원들
역사 속으로 첫 전국노동자대회, 피로 쓴 ‘노동해방’ / 현대그룹 식칼 테러에 맞선 연대투쟁 / ‘노동절’ 되찾자, 1박 2일 전투 / 1989년 전국노동자대회 ‘전국조직 건설’ 결의 / 민주당사 점거 투쟁에서 만난 선배 / ‘갑호 비상령’에 ‘성동격서’로 맞서 전노협 출범 / 원태조·박성호 열사 투쟁으로 수배 / ‘업무조사’로 노조 탄압, 선도투로 중단시켜 / 회의하러 가다 구미에서 연행돼 구속 / 감옥에서 동지들과 조우 / 옥중투쟁위 ‘민주방송’ 진행 / 법정투쟁 했더니 괘씸죄로 징역 2년 / 배려는 필요없다, 투쟁으로 원직복직하겠다 / 내부 투쟁 시작되다 / 소련 붕괴와 사회주의 세력의 혼란 / 1992년 대선에서 백기완선본 운동 / ‘전노협 중심성’ 둘러싼 치열한 사투 / 동지들 결의 모아 경기노련 의장으로 / 원칙보다 패권 앞세우는 사람들 / 해고노동자들의 아사 단식투쟁 / 전노협 첫 경선, 조직 발전전망 확인 / 당선은 됐지만 ‘전노대’ 둘러싼 동상이몽 / 전노협 사람들 / 핵심 공약사업 발목 잡히며 한계 실감 / 국제회의에서 기립박수 받은 ‘전노협’ / 전노협 지도위원 김문수의 민자당 입당 / 전국적 투쟁전선 구축하며 전노협 강화 / 절차 하자에도 ‘전노협’이라서 해고 / 전지협 투쟁에 ‘3자 개입’해 수배 / 체포된 동지만 남긴 채 / 좁혀오는 수사망 / 소산별이냐 대산별이냐 / 전국 투쟁전선 구축 실패 / 특별한 휴가 / 안전하지 않은 안전가옥 / 통닭구이 될 뻔하다 / 민주노총 출범을 둘러싼 논란 / 전노협 비판에 대하여 / 수배 중에 민주노총 출범 / 침통했던 전노협 해산대회 / 도처에 깔린 사복경찰을 뚫고 / 금속연맹 출범식 참가 못한 채 발길 돌려 / 수배 중, 세배 갔다가 대선배로부터 받은 질책 / 20개월 만에 가족과 만남 그리고 체포 / 서울구치소에서 마주친 민중학살 주범들 / 아버지와 영원한 이별
돌아보며, 다시 걷는다 굴뚝 청소 시작하다 / 동지 이상이었던 김종배가 죽었다 / 파란만장 종횡무진 권용목의 최후 / 목숨 건 투쟁에 정부 보상이 뜻하는 바 / 예상 못 했던, 느닷없는 법정구속 / 왜 노동운동을 하고 있나, 독방에서 곱씹어보니 /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자, 철폐연대 결성 / 최초로 부르는 비정규직 투쟁 노래 / 한경석 동지와 이별 / 열사 정국에 민주노총은 / 류기혁 열사 국면 민투위 집행부의 오류 / 유랑생활 끝낸 노동운동역사자료 / 새로운 정치조직 ‘노동자의 힘’ 출범 / 활동가조직으로 정치조직 토대 구축 / 정치세력화 그리고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고민 / ‘사회주의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향해 / NPA 창립총회 참여 / 용산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결국 이후 과제로 / 끝나지 않은 쌍용차 정리해고 반대투쟁 / 회원들 힘으로 ‘한내’ 공간 마련ㆍ유지 / 노래로 보는 근현대사 공연 / 인연의 시작과 끝 / 백기완 선생과의 인연 / 민주노조 운동의 숨결 이어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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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180371
331.8092 -25-2
서울관 사회과학자료실(208호)
이용가능
0003180372
331.8092 -25-2
서울관 사회과학자료실(208호)
이용가능
책속에서
● 들어가며 어느새 나이에 둔감한 시기가 되었나 보다. 가끔 누가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물으면 솔직히 몇 살인지 선뜻 대답할 수가 없다. 그만큼 삶의 흔적이 덕지덕지 쌓였다는 얘기다. 노동조합운동을 시작한 시기도 손가락을 꼽아봐야 할 정도이니 삶의 기억은 끄집어낼 수 있는 것보다 지워진 부분이 훨씬 많은 게 당연하다. 자기 삶의 과정을 드러내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은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현재와는 다른 과거를 타인에게 적나라하게 공개한다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는다. 삶의 흔적이 부끄럽고 허접하다고 해도 내가 살아온 모습과 걸어온 길은 나의 역사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노동자 역사 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장본인으로서 내 기억을 하나씩 정리해 본다.
[P. 16] ● ‘철없던 초등학교 시절’ 중에서… 2학년 4월 어느 날, 1교시 시작 전이었는데 교실에 들어선 나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우리도 데모하자”라고 제안했다. 친구들이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묻는다. 나는 그냥 걸상 한 개씩 들고 운동장으로 뛰어가면서 “데모야”라고 하면 된다고 했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친구들이 그러자고 해서 6명 정도가 나무 걸상을 들고 운동장으로 뛰어가며 마냥 “데모야”만 외쳐댔다. 그 일로 교무실에 불려 가 야단맞고 꿇어앉아서 의자 들고 벌을 서야 했다. 라디오도 귀했고 유선방송이 전부였던 깡촌 시골에서 4·19 혁명 시기였던 당시 데모라는 뜻과 소식을 어디서 어떻게 접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요구도 쟁점도 없이 “데모야” 소리만 반복했던 내 인생에서 첫 번째 데모는 아무런 의미 없는 장난이었다.
[P. 134] ● ‘지노협 건설 후 노조 위원장 당선’ 중에서… 선거에서 대우전자부품노동조합 위원장에 당선되었고, 활동의 범위가 자연스럽게 넓혀졌다. 노조 위원장이 되면서 안양집 옥탑방에서 밤늦게까지 조합 간부들, 지역 동지들과 토론하고 회의를 하니까 아버지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신 모양이다. 아내를 불러서 “저놈이 요즘 뭘 하냐?”는 물으셨다고 한다. 아내가 노조 위원장 한다고 대답하자 아버지 눈초리는 그때부터 싸늘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서 매우 온화해지셨다는 것을 감각으로 느꼈다. 아버지가 생각이 바뀌신 걸까. 아니면 자식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신 걸까. 갸웃했었는데 금세 그 궁금증은 풀렸다. 그때 아버지는 나가시던 복덕방에서 오는 영감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으신 모양이다. “아들 하나 있는 게 평생 속을 썩인다.” 복덕방 노인들이 왜 그러냐고 묻자 그 아들이 노조 일을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옆에 있던 노인이 무릎을 치면서 “양 영감은 왜 그렇게 무식하냐?”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요즘 노조 위원장 하면 1년에 집이 3채 생기는 횡재를 하는 것이며 출세한 건데 그걸 걱정하면 어떡하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