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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7

회고 -페터 플람 175
페터 플람의 소설 『나?』에 대한 후기 -센투런 바라타라야 187

작품 해설 199
작가 연보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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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179706 833 -25-37 서울관 인문자연과학자료실(314호) 이용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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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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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100년 후 재발견된 강렬하고 매혹적인 소설!

죽은 자의 기묘한 귀환, 은밀한 상처를 헤집는 두 개의 비밀스러운 목소리
진지한 인류애에 대한 아름다운 증언, 지옥과 천국을 동시에 비추는 불빛

▶ 제목의 물음표는 격한 충격에 사로잡힌 한 인간을 시사한다. 한 생존자가 죽은 이로서 귀환한다. 두 개의 목소리로 어떤 상처에 관해 이야기한다. ─ 센투런 바라타라야

▶ 진정으로 놀라운 환상 속에서 우리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 보았던, 지옥과 천국을 동시에 비추는 불빛을 발견한다.―레오 그라이너, 《베를린 뵈르센-쿠리어》

페터 플람(Peter Flamm)의 소설 『나?(Ich?)』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다. 페터 플람의 본명은 에리히 모스(Erich Mosse)로 1891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데뷔 소설 『나?(Ich?)』를 발표한 이후 몇 해 동안 『너(Du)』, 『죽음을 향한 귀환(Heimfahrt zum Tode)』 등, 세 편의 소설을 더 발표하며 전문의 과정을 밟았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1933년 아내 마리안느와 함께 파리로 이주했고, 1934년에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 정신과 의사로 일하며 정착했다. 그의 환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윌리엄 포크너였다. 그 밖에 뉴욕의 저명인사들, 예컨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찰리 채플린 등이 그의 집에 오갔다고 한다.
1926년 독일의 S. 피셔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되어 “열정과 고통의 화산 같은 책, 숨이 멎을 듯, 단숨에 쓰인 빛나는 책”, “진지한 인류애에 대한 아름다운 증언” 등의 찬사 속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그의 첫 소설 『나?』는 약 한 세기가 흐른 2023년 한스 팔라다, 에리히 캐스트너,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등에 비견되며 새롭게 복간되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심리 스릴러의 고전적 문제를 던지며 전개되는 『나?』는 독특한 도플갱어 모티프를 가진 소설이다. 전통적인 도플갱어 소설들이 극단적으로 상반된 요소들의 길항을 한 인간 속에서 그려왔다면 이 소설에서는 완전히 다른 두 인간의 의식이 한 사람의 입을 통해 발화한다. 한 남자의 정체를 밝혀 가는 이 음산한 심리 드라마 안에 담긴 것은 참혹한 전쟁이 앗아 간 것들에 대한 차가운 증언이며, 동시에 한순간 삶의 의미와 존엄을 빼앗긴 인간의 슬픔에 대한 뜨거운 독백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한국에는 처음 번역 소개되는 『나?』에는 작품의 배경과 독특한 형식의 이해를 위한 페터 플람의 강연록 「회고」와 비평가 센투런 바라타라야의 서평 「그래, 나도 들었어, 나도 들었어」가 함께 실려 있다.

■ S. 피셔 출판사의 아카이브에서 100년 만에 재발굴된 문제작

페터 플람(Peter Flamm)―본명 에리히 모스(Erich Mosse)―의 첫 소설 『나?』는 1926년 S. 피셔 출판사에서 발간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옥과 천국을 동시에 비추는 불빛”, “우리의 고통에 대한 끔찍한 비유이자 윤리적인 경고의 외침”, “진정한 시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진실의 뜨거운 힘” 등의 찬사 속에 강렬하고 생생한 의식의 흐름, 광기어린 속도로 내달리는 문장으로 새로운 작가의 탄생을 알렸다.

『나?』는 재판장 앞에서 쏟아내는 단 한 번의 진술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진술은 단 한 장의 단절도, 단 한 줄의 공백도 두지 않은 채 대단히 빠른 호흡으로 흐른다. 전쟁에서 가까스로 생환한 한 사람의 독백인가 하면 전쟁에서 스러진 또 다른 사람의 속죄와 자백이 불쑥 등장한다. 두 영혼은 각각 타자의 삶을 살아내고, 타자의 죽음을 감당하며 하나의 입으로 두 삶의 뼈저린 슬픔을 발화한다.
소설의 첫 장면에서 ‘나’는 자신의 무덤에 누워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의 영혼을 심판할 재판관에게 토로하는 최후 변론처럼 들린다. ‘나’는 죽었다, 아니 어쩌면 살아 있다. 전쟁에 의해 무언가 뒤바뀐 남자. ‘나’는 전사한 전우의 웃옷에서 여권을 발견하고 그것을 취한다. ‘나’는 부유한 의사 한스 슈테른인가? 가난한 제빵사 빌헬름 베투흐인가?

“지금 나는 그 다른 이이고, 그의 죽음을 끝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가 저 바깥 진흙 속에, 땅 밑에 누워 있는 동안 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그의 삶 속으로 들어섭니다, 마치 어떤 액자 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러나 나는 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 뒤에 한 명의 관객처럼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이이자 나 자신인 나를, 그의 형상 뒤에 있는 한 인간을 응시합니다.” (27쪽)

‘나’의 의식 속에 그 둘은 뒤섞여 있다. 만약 ‘나’가 빌헬름이라면 그는 한스의 몸을 발견하고, 그의 여권을 훔치고, 한스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기차의 일등석을 타고 귀향한다. 젊고 아름다운 아내 그레테가 눈물을 흘리며 맞아 준다. ‘나’의 생환을 반기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나’를 기다렸던 환자들이 진료를 독촉한다. 친구를 자처하는 스벤은 만남을 재촉하고, 불륜 상대였던 부쉬는 밀회부터 제안한다. 한스가 키우던 개 네로는 ‘나’를 경계하지만 ‘나’는 외과의사 한스의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민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곳곳에서 외과의사 한스의 의식이 사라지고 제빵사 빌헬름의 의식이 스쳐 가기도 한다. ‘나’는 빌헬름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는 집을 눈앞에 본 듯이 그린다. 스스로 의심에 휩싸인 채 불안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어느 살인 사건을 심리하는 법정에 법의학자로 불려 나간다. 자신의 고용주를 살해한 혐의로 한 여자가 서 있다. 그녀는 빌헬름의 여동생 에마다. 한스의 아내 그레테를 사랑한 스벤이 한스를 궁지에 빠뜨릴 의도로 난해한 사건의 심리에 부른 것이다. 에마는 고용주가 자신을 강간하려 했다고 주장하며, 그 순간 한 마리 개가 나타나 자신을 구하고 남자를 물어 죽였다고 진술한다. 이제 ‘나’의 증언은 그녀를 구원할 수도, 혹은 살인자로 영원히 낙인 찍을 수도 있다. ‘나’는 현장의 증거들에서 읽히는 대로 에마의 유죄를 증언하려 하는데, 그 순간 ‘나’의 입에서는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는 말들이 불쑥 튀어나오고, ‘나’의 앞길은 헤어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1959년 페터 플람은 25년 만에 돌아온 고국 독일에서 청중 앞에 섰다. 그 강연에서 플람은 “우리 모두는 무의식 속에서 어둡게 들끓고 있는 유령 같은 환영과 싸워야 할, 축복받은―혹은 저주받은―운명”이며 그 끊임없는 싸움을 등재하는 것이 작가의 운명임을 강조한다. 외부 세계를 평결하고, 고발하는 일보다 내면의 진동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일에 더 몰두할 것임을 선언한다. 손을 맞잡고 살아가기에는 전쟁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간 과거의 기억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그것을 계속 짊어지고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기억의 폐기물 더미를 헤집어 본다면, 그의 의식에 흐르게 될 빛바랜 추억의 영상에는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베르ㅤㄷㅚㅇ 전투에서 전사한 그의 형이 가장 먼저 등장할 것임을 인정한다. 가망 없는 정찰 임무에 제일 먼저 나섰다가 전사한 형에 대한 기억은 그의 첫 소설 『나?』에도 어른거린다.
한스 팔라다(Hans Fallada), 에리히 캐스트너(Erich Kastner),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 등, 전간기(戰間期, 1차 세계 대전 종결과 2차 세계 대전 발발 사이) 문학의 여러 대표작과도 연관 지을 수 있는 『나?』는 전쟁이라는 극단적 비극이 인간의 정체성에 남긴 상흔을 탐구한 비범한 심리소설로서, 1차 세계 대전 중 베르ㅤㄷㅚㅇ 전투에서 스러진 두 사람의 의식이 하나의 몸에서 교차하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한스로 귀환했으나 한스의 삶에 생경함을 느끼는 빌헬름의 의식, 빌헬름의 여동생과 어머니를 재회하는 순간 그들의 비루한 삶 앞에서 뒷걸음질을 치는 한스의 의식, 아내에 대한 사랑을 거듭 확인하면서도 아내를 의심하고 연적을 질투하고 스스로의 불륜에 혐오감을 느끼는 한스의 의식,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처절한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빌헬름의 의식. 무수한 쉼표로 이어지고 있는 그 의식의 연결과 단절 속에서 페터 플람은 ‘나’는 무엇인가, 극단적 경험을 겪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전쟁의 트라우마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가. 이것은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현실적인 주제다. 정체성 해체를 다루며 인간 내면의 소용돌이를 정면으로 마주한 『나?』는 인간의 의식을 집요하게 탐사하는 매우 강렬하고 시적인 사유와 문장으로 이 질문들에 대해 답하고 있다.

■ 실존적 경험의 극단에서 파쇄되는 ‘나’의 잔해들 _<작품 해설>(이창남)에서

이야기는 1차 세계 대전의 유명한 베르ㅤㄷㅚㅇ 전투에 참여했던 군인들이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귀환하면서 시작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1차 세계 대전은 최초의 기술의 전쟁이라고 불린다. 이 전쟁에서 무기와 포격의 정확성이 높아지면서 예상 밖의 엄청난 희생자가 생겼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베르ㅤㄷㅚㅇ 전투에서만 피아간 약 8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서 귀환한 군인들은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닐 것이고, 죽어서도 죽은 자로 확인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한 사람은 베를린의 의사 한스 슈테른이며, 다른 한 사람은 프랑크푸르트의 제빵사 빌헬름 베투흐다. 귀환한 한스는 그러나 과거의 한스와 같지 않고, 종종 자신의 현실을 자신의 것으로 인지하지 못한다. 자기 현실에 대한 이러한 생경함은 전선에서 귀환한 자의 독특한 경험으로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바로 베투흐의 의식이 다른 한켠에서 한스의 의식을 차지하고, 그 안으로 틈입하기 때문이다. 베투흐 역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어머니의 죽음에 몹시 슬퍼하다가, 갑자기 한스의 의식으로 돌아와 한 타인의 죽음을 지켜보는 차가운 의사의 면모를 드러낸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베투흐의 현실도 의사 한스를 통해서 투영될 때 완전히 새롭고 낯선 모습으로 바뀐다.
작가가 마련한 이런 의도적인 혼동의 상황은 이중적 화자의 장치 속에서 구현되고 있다. 현실들을 타자의 의식을 통해 완전히 새롭고, 다른 의미로 투사시키는 것은 바로 현실과 자아의 관계로 구성되는 경험 자체에 대한 작가적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과연 ‘나’를 중심으로 엮이는 우리의 의식 속에 각인되는 기억과 경험은 나의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그리고 나를 구성하는 나라고 불리는 존재는 실상 누구인가? 그는 과연 단일하고 통일적인 자아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존재이기도 한 것인가? 작가는 나와 현실 사이의 이러한 부조화한 상황으로 독자들을 이끌어 들임으로써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해 온 나와 현실 사이의 필연적 연계성과 그 양자의 통일성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나와 현실의 부조화와 불일치는 이 작품의 배경으로 볼 때 일종의 전쟁의 트라우마로 볼 수 있다. 상당한 수의 전우들이 몸뚱이가 조각나서 흩어지고, 누구의 피인지도 알 수 없게 흘러 섞이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과연 나는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너는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죽어 간 동료들은 이제 어디에 있으며, 살아 있는 나는 그들과 다른가? 그리고 그 ‘나’를 기다리는 현실은 무엇인가? 일상적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이러한 전쟁의 트라우마가 쪼개진 이중의 의식으로 작품 속에서 분열되는 ‘나’를 지배하고, 그 나의 현실 속으로 들어선다.
‘나’는 한스이기도 하고 베투흐이기도 하다. 그들은 종종 전쟁의 기억을 현실 속에 소환하면서 자아와 현실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상 1차 세계 대전은 독일의 지성계에도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인간성의 완성이라는 전통적 의미의 이상도 무시무시한 현대 전쟁의 참화 속에서 가벼운 지적 농담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러한 역사적, 지적 배경 속에 이 작품은 전통적 철학과 사상의 기반이 되어 왔을 뿐 아니라, 법적 현실적 책임의 주체로 간주되어온 통일적 ‘자아’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드러낸다. 이러한 질문과 더불어 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일회적 사건을 훨씬 넘어서서, 인간 일반의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근본적 성찰로 나아간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법적, 도덕적 참조 지점으로, 책임의 당사자로 ‘나’를 절대화하고, 그 경험을 의심할 수 없는 사태로 확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비단 나를 넘어서서 ‘우리’ 혹은 ‘민족’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그리고 때때로 법적인 국가적인 사안에서 이러한 실체화는 불가피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내가 누구인지 말하기는 어렵고, 굳이 포스트모던적 탈주체적 제스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아’와 그 자아를 통해 구성되는 ‘경험’의 실체를 확증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작품에서는 두 개의 살인 사건이 등장한다. 베투흐의 여동생은 살인 혐의로 재판에 서지만 한스의 도움으로 무죄 방면된다. 의사 한스 역시 의료 사고와 간통 사건에 대한 도덕적 부담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시사되고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자신도 살인자로 법정에 서게 된다. 그는 자기 변론에서 ‘일을 저지른 건 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언급은 일견 책임의 회피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책임 회피의 수사로 본다면, 일상적인 독서의 틀 속에서 작품은 스스로 닫힌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통상적인 이해의 순환회로에서 벗어나면, 우리 현실의 보다 복합적인 지시 체계의 사슬들과 유희하고 실험하는 작품이 열리면서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현실은 죄가 있는 ‘나’를 구성하면서 동시에 죄가 없는 ‘나’도 함께 구성한다. 작품은 이러한 ‘나’의 통일적이고 일관된 경험이 가짜라고 주장하고 있다. 작품은 그처럼 모호한 경험의 지평을 향해 ‘나’와 ‘또 다른 나’를 통해서 접근해 가고 있다. 이것이 개개인들의 경험을 넘어서서 전쟁이라는 집단적 사건과 관련될 때 작품이 제기하는 문제의 함의는 더욱 커진다.
전쟁은 누가 구성하고, 누가 책임지는가? 전쟁에서 어쩌면 이미 죽었거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두 화자, 그들이 돌아와서 ‘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의 질문은 집단적으로밖에는 말해질 수 없는 역사적 경험의 어떤 ‘말’할 수 없는 지평에 닿아 있다. 언어가 성취하면서도, 좌절하는 작품의 불안정한 문장들은 그 지평에 닿아서 파쇄되는 ‘나’의 잔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은 바로 그러한 잔해들을 엮어서 실험하고 상상하면서 흔히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것보다 더 진실한 이야기를 한다.
이 작품에 인간의 실존에 관한 많은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사람들은 여전히 문학을 역사와 비슷하거나, 역사의 보충적인 소재로 읽는 경향이 있다. 문학 역시 일견 역사적 기록인 건 사실이지만, 단순히 가공된 것이라는 의미에서만 역사와 다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학은 지나간 사건에 대한 인과적인 설명 체계인 일반적인 역사 이해의 기본적인 지시적 틀과는 다른 의미의 지시적 틀을 실험적으로 구축하고, 무의식의 층위에까지 확대하고 심화한다. 이를 통해 문학은 통상적인 역사의 이해와는 상당히 다른 차원의 의미에서 ‘역사적’이 된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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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9] 내가 아닙니다, 재판장님, 죽은 이가 나의 입으로 말합니다. 여기 서 있는 건 내가 아니고, 들어 올려지는 팔은 나의 팔이 아니고, 하얗게 세어 버린 건 나의 머리카락이 아니며, 내가 저지른 일이,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P. 26~27] 아무도 없습니다, 방 안에는 나 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완전히 혼자입니다, 나는 고독합니다, 소름 끼치도록 혼자입니다, 나는 내 몸을 더듬습니다, 팔, 얼굴, 한 손이 다른 손을 쓰다듬습니다. 나, 나, 나, 그 다른 이가 나입니다, 나는 그 다른 이입니다, 지금 살아 있는 죽은 자, 다른 이의 얼굴, 몸, 근육, 살, 담, 뇌, 그리고 영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