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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명/저자명
2~4世紀 黃海道地域 古墳 分布 定型의 變化와 意義 / 鄭昌熙 인기도
발행사항
대구 : 嶺南考古學會, 2009.02.28
수록지명
嶺南考古學. 제48호 (2009년 2월), pp.5-50
자료실
[서울관] 정기간행물실(524호)  도서위치안내(서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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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어번호
KINX2009062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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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기 황해도지역 고분 분포 정형의 변화와 의의 / 鄭昌熙 1

〈요약문〉 1

I. 서론 2

1. 연구목적 2

2. 선행연구의 성과와 문제점 4

3. 연구방법과 분석대상 7

II. 단위지역의 설정과 대상 자료의 분포 8

1. 황해도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단위지역의 설정 8

2. 단위지역별 대상자료의 분포 11

III. 연대와 획기 21

1. 황해도지역 전실묘의 연대 21

2. 황해도지역 석실묘의 연대 24

3. 획기설정 27

IV. 각 획기의 고분 분포 정형의 변화와 의의 28

1. 제I기(2세기 후반~313년) 28

2. 제IIa기(313년~350년) 32

3. 제IIb기(350년이후) 38

V. 결론 42

Abstract 45

초록보기 더보기

본고에서는 대방군의 故地로 알려진 황해도 지역을 공간적 범위로 하여 2~4세기대에 걸친 古墳 分布 定型의 변화상을 통해 313년 전후 대방군 지배 세력의 정치적 동향을 검토해 보았다. 본고의 논지 전개는 전실묘가 분포하는 황해도 멸악산맥 이북 지역을 殷栗, 安岳, 信川, 鳳山, 銀波의 5개 단위지역으로 구분하고 각 단위지역의 기년명전을 포함한 전실묘의 분포상과 출현기 석실묘의 분포상을 검토하는 것으로 하였다. 고분 분포 정형의 변화상 검토를 위한 획기의 설정은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는 313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을Ⅰ期,그 이후를Ⅱ期로 하였다.Ⅱ期는 다시 석실묘가 출현하는 4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각각Ⅱa期와Ⅱb期로 구분하였다. 검토 결과 본고의Ⅰ期에는 황해도 전 지역에서 전실묘의 분포상이 고르게 확인된 반면, Ⅱa期가 되면 전실묘의 분포 범위는 안악과 신천지역으로 縮小되고,석실묘가 출현하는 Ⅱb期에 이르면 전실묘의 분포 범위는 급격히 축소되어 신천 일부지역으로 限定 된다. 이와 같은 전실묘의 분포 범위 축소와 더불어 Ⅱ期의 또 다른 특징은 앞 시기의 전실묘 밀집지와 배타적인 공간을 입지로 하여 새로운 묘제의 영향을 받은 대형 고분이 출현한다는 점이다. 張撫夷墓와 안악3호분은 각각 본고의 Ⅱa期와 Ⅱb期에 해당하는 고분으로 前者는 석실묘의 영향을 받은 전실묘이고 後者는 석실묘로 양자 모두 이전 단계의 전실묘와는 구분되는 구조적 특징을 지녔다. 두 고분 모두 당대 황해도 지역최고 위계의 인물을 피장자로 한다.이와 같이 본고에서 검토 대상으로 한 2∼4세기에 걸친 전실묘의 분포 범위 축소 및 前단계 전실묘와 배타적인 입지에 새로운 묘제가 출현하는 현상은 313年을 기점으로 고구려에 의해 이루어진 이 지역 정치 세력에 대한 統制와 再編의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대방군 지배 세력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한 후에도 일정한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며 고구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기존의 견해는 재고의 여지가 있음을 논증하였다.

This paper presents the data examining the change of distribution in brick-made and stone-made chamber tombs at Hwanghae-do from 2nd to 4th A.D.

In previous researches,i t has been noted that Hwanghae-do belongs to

Taebang’s territory in which has been influenced by Chinese culture until early

4th A.D. The brick-made chamber tombs in this area have been assumed as

burials of the governing class in Taebang. The previous researchers propose that the bricks engraved with Chinese chronological era on the tombs are one of the evidence representing the cultural and political identity of Taebang’s governing class. In addition,so me bricks and brick-made chamber tombs from 314 A.D. to early in the 407 A.D. show the independent political power of Taebang. It has been also noted that Taebang maintained its political independence until 427 A.D. at which the capital of Kogurye was moved from Kuknae to Pyungyang. However,t he previous researches just focused on the existence of the brick engraved with Chinese chronological era but overlooked the analyses of the context of archaeological data about Taebang.

This paper examines the distribution of all burials and bricks engraved with

Chinese chronological era from 1st A.D. to early in the 4th A.D. at Hwanghae-do in North Korea. I find out that the spatial distributions of the burials in this

area are classified as the stages of,b rick-made and stone-made chamber burials, which has not been studied in the previous researches.

In conclusion,th e range of spatial distribution of brick-made chamber tombs

has gradually decreased from the fall of Taebang by Kogurye in 313 A.D. to

the appearance of stone-made chamber tombs in 350 A.D. It can be explained

that the distribution of the burials has been changed as a result of the

reorganization of Taebang’s political community which was forced by Kogur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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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世紀 黃海道地域 古墳 分布 定型의 變化와 意義 鄭昌熙 pp.5-50 원문보기 (음성지원) 보기
거창 정장리 구석기유적의 석기제작소 연구 장대훈 pp.51-80 원문보기 (음성지원) 보기
泗川 船津里 石室墳 金奎運 ;金俊植 pp.81-100 원문보기 (음성지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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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참고문헌 국회도서관 소장유무
1 權五榮, 「三韓의 「國」에 대한 硏究」, (서울大學校文學博士學位論文, 1996). 미소장
2 무덤에서 본 三韓社會의 構造 및 特徵 소장
3 李盛周, 「新羅·伽倻社會의 政治·經濟的 起源과 成長」, (서울大學校文學博士學位論文, 1998). 미소장
4 李熙濬, 「4∼5세기 新羅의 고고학적 연구」, (서울大學校文學博士學位論文, 1998). 미소장
5 金龍星, 『新羅의 高塚과 地域集團ᐨ大邱·慶山의 例』, (춘추각, 1989). 미소장
6 新羅國家形成期 大邱社會의 動向 소장
7 대구 지역 古代 政治體의 형성과 변천 소장
8 鄭昌熙, 「5∼6世紀 大邱 洛東江沿岸 政治體의 構造와 動向」, (慶北大學校碩士學位論文, 2004). 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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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4세기 고구려의 樂浪ㆍ帶方地域 경영 네이버 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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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김사봉, 「봉성리 벽화무덤에 대하여」, 력사과학2, (과학출판사, 1980). 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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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안병찬, 「고현리토성 발굴보고」, 조선고고연구1989-2, (사회과학출판사, 1989), pp.6∼10. 미소장
45 「고조선, 부여, 진국편」, 조선유물유적도감2, (편찬위원회, 1989), pp.180~181. 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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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전주농, 「신천에서 대방군 장잠경왕경의 무덤 발견」, 문화유산3, (과학출판사, 1962). 미소장
48 한인덕, 「평양일대 벽돌간무덤의 연대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4, (사회과학출판사, 1988) 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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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남일룡, 「평양지방의고대토성」, 조선고고연구1995-2, (사회과학출판사, 1995), pp.16∼20. 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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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한인덕, 「평양일대 벽돌무덤의 구조형식과 그 변천」, 조선고고연구1989-2, (사회과학출판사, 1989). 미소장
58 樂浪塼築墓에 대한 一考察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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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板元義種, 「朝鮮古代金石文小考」, 百濟史の硏究, (稿書房, 1978), p.378. 미소장
73 高久健二, 樂浪塼室墓デ-タベス, (琦玉大學敎養學部, 2007), pp.75∼111. 미소장
74 桃崎祐輔, 「高句麗太王陵出土瓦·馬具からみた太王陵說の平価」, 海と考古學2, (海交史硏究會, 2002). 미소장
75 集安地域 고구려 超大型積石墓의 전개과정과 被葬者 문제 소장
76 姜賢淑, 「고구려 고분 출토 와당의 변천 연구」, 韓國上古史學報64, (韓國上古史學會, 2007). 미소장
77 吉林省考古學硏究所, 「溝古古墳群禹山墓區JYM 3319發掘調査報告」, 東北史志6期, (吉林省社會科學院 2005), pp.19∼31. 미소장
78 谷井齊一, 「黃海道鳳山郡における漢種族の遺蹟」, 朝鮮古蹟調査略報告, (朝鮮總督府, 1914), p.46. 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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