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자료 카테고리

전체 1
도서자료 1
학위논문 0
연속간행물·학술기사 0
멀티미디어 0
동영상 0
국회자료 0
특화자료 0

도서 앰블럼

전체 (1)
일반도서 (1)
E-BOOK (0)
고서 (0)
세미나자료 (0)
웹자료 (0)
전체 (0)
학위논문 (0)
전체 (0)
국내기사 (0)
국외기사 (0)
학술지·잡지 (0)
신문 (0)
전자저널 (0)
전체 (0)
오디오자료 (0)
전자매체 (0)
마이크로폼자료 (0)
지도/기타자료 (0)
전체 (0)
동영상자료 (0)
전체 (0)
외국법률번역DB (0)
국회회의록 (0)
국회의안정보 (0)
전체 (0)
표·그림DB (0)
지식공유 (0)

도서 앰블럼

전체 1
국내공공정책정보
국외공공정책정보
국회자료
전체 ()
정부기관 ()
지방자치단체 ()
공공기관 ()
싱크탱크 ()
국제기구 ()
전체 ()
정부기관 ()
의회기관 ()
싱크탱크 ()
국제기구 ()
전체 ()
국회의원정책자료 ()
입법기관자료 ()

검색결과

검색결과 (전체 1건)

검색결과제한

열기
자료명/저자사항
海外의 韓國獨立運動史料. 32, 中國篇 7 / 國家報勳處 인기도
발행사항
서울 : 國家報勳處, 2007
청구기호
951.61 ㄱ427ㅎ
자료실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형태사항
609 p. ; 26 cm
제어번호
MONO1200806609
주기사항
표제지표제: 李慈海自傳
원문
미리보기

목차보기더보기

[표제지 등]

[사진모음]

발간사

해제

범례

목차

1. 기미년 3월 1일 조선독립운동 49

2. 조선을 떠나기 전후의 사실 52

3. 중국에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에 참가 60

4. 정식으로 대한독립단에 참가 63

5. 장백현에 다녀온 경과 65

6. 학자파가 참가한 이후 총단부의 변화 75

7. 노령 훈련영에서의 대한독립단의 진상 79

8. 팔도강에 특파대를 편성 83

9. 팔도강 특파대가 국내에 들어가 유격전을 전개 87

10. 제2기 학자파가 온 이후 91

11. 총단부 간부임원 해체 96

12. 대한독립단의 분열 98

13. 한국광복군사령부를 설립 103

14. 야만적인 일본군, 참혹하게 동북의 조선인을 소탕 105

15. 일본군에 소탕된 이후 발생한 각종 정황 109

16. 성에 작은 병원을 개설 121

17. 3.1운동 이후 일본의 통치형식 변화 131

18. 산속에서 토비의 상처를 치료 136

19. 동북을 떠나 북경으로 이주 145

20. 해전(海甸) 거리에 병원을 설립 154

21. 북경에 진료소 설립 계획, 그리고 나의 혼인문제 166

22. 김우경과의 분열로 엄청난 피해를 조성 176

23. 풍옥상 부대에 참가한 경위 184

24. 서북군을 따라 서북으로 이동 192

25. 대동에서 진료소 개업 202

1) 또 하나의 전시경험 204

2) 태원(太原)행 첫 장거리 왕진 210

3) 동북에서 9.18사변 발생 214

4) 오태(五台)현 강변마을에 왕진을 다녀오다 218

5) 토비에 납치당할 뻔하다 223

6) 친구의 결혼식을 치르다 화재를 당하다 228

7) 마음이 상했던 일 230

8) 화신묘 거리로 이주, 부친의 사망 231

9) 토호열신들에게 사기를 당하다 234

10) 대동에서 공익사업과 항일공작에 중시 237

11) 일본군이 노구교 사변을 조작하여 중일전쟁을 일으키다 242

26. 항일전쟁시기 서북으로 도망가다 248

27. 하투(河套) 지구로 도망 250

28. 중국에서 두 번째 감옥생활 260

29. 새로 편성한 제5려의 군의주임에 임명 263

1) 전쟁지역의 공작에 참가 267

2) 고태량(高台梁)을 지키다 273

3) 명령을 받들고 하투지방으로 향하다 277

4) 제5려가 10개 사단으로 확충되어 잠 4군의 지휘를 받다 279

5) 하투 보위전 폭발 283

6) 사령부와 헤어져 후방으로 가다 290

7) 잠 10사 후방사령부에서 활동 297

8) 하투에서 좋은 성과를 이루고 다시 녕하로 돌아가다 306

9) 어둡고 부패한 내분은 이렇다 311

10) 우빙 모친의 중병으로 도구당에 돌아가다 313

11) 잠 10사의 변화와 내가 목격한 정황 315

30. 군부 제2야전병원 원장 직무를 담임 319

1)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분처장에 임명 320

2) 섬파시에 집을 짓다 323

3) 부작의(傅作義) 사령관의 어깨를 치료 326

4) 군의 훈련반 교관으로 임명 330

31. 일본이 무조건 투항을 선포 336

1) 가족을 섬파에 남겨두고 수원 포두로 떠나다 342

2) 수·포 등지의 조선동포들을 이끌고 한인회를 조직 350

3) 수·포에서 국공 무장충돌 354

4)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망국노이다 356

5) 조선서북군 사령관으로 있었던 경과 359

32. 철도병원에서 의무공작 362

1) 섬파에서 황 주석 부인의 중병치료 365

2) 철도병원에서 본 새로운 국면 367

3) 대동에 돌아가 또 한 번 상처를 입다 371

4) 토호 한간 이여림, 마침내 체포 373

5) 공산당을 반대하는 선전강연회 출현 374

6) 김구 선생과 함께 귀국하지 않은 것은 나의 정치적 실수 375

33. 철도병원을 사직하고 섬파에 진료소 개설 378

34. 부작의 장관이 부대를 인솔하여 기의를 일으키다 382

35. 나의 신변에 일어난 평탄치 않은 변화 388

36. 내가 체포되기 전의 사실 396

37. 감옥에서 석방된 후에도 여전히 병원에서 복무 405

38. 건강악화로 퇴직을 신청 413

39. 드디어 북경에 가려던 꿈을 실현 415

40. 북경 이주 후, 정식으로 입적 418

추억의 맺음말(尾語) 420

이자해자전 원본[원문불량;p.422~602] 421

찾아보기 605

판권기

이자해 선생 3

이자해 선생 일가족(좌로부터 부인 손옥성, 아들 이우송, 부친, 딸 이우빙, 이자해 선생) 4

이자해 선생 가족 5

아자해 선생 부부와 조선인 친구 5

부인 손옥성과 딸 이우빙 5

해방 직후 이자해 부부(1945년 9월 3일, 수서에서) 6

이자해 선생과 딸 이우빙 6

북경에서 이자해 선생 부부, 손자녀와 함께 6

아동의무소학교 학생들과 함께 7

대동에서 유신의원 직원과 함께 7

아동의무소학교 학생·직원과 이자해 선생(뒷줄 중앙) 8

이자해 선생 가족과 유신의원 직원(산서성 대동) 8

아자해 선생 부부와 동지들(이자해 선생 : 앞줄 중앙, 부인 : 뒷줄 중앙) 9

산서 개진의원 학생들의 이자해 선생 송별 기념(1930년 9월 24일) 9

수원성을 떠나는 한국광복군 제7특파대 환송기념(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자해 선생) 10

해방직후 포두에서 결성된 한인회(뒤에 재포두한인회판사처란 현판이 보인다. 1946년 1월) 10

이자해 선생 유품 11

이자해 선생의 딸 이우빙(현 81세)과 아들 이우송 부부(현 74세) 11

노무현 대통령에게 포상받는 이자해 선생의 손자 이위민(2007년 8월 15일) 12

훈장증 12

훈장 12

이용현황보기

이용현황 테이블로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0001265655 951.61 ㄱ427ㅎ v.32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권호기사보기

권호기사 목록 테이블로 기사명, 저자명, 페이지, 원문, 기사목차 순으로 되어있습니다.
기사명 저자명 페이지 원문 기사목차
연속간행물 팝업 열기 연속간행물 팝업 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