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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저자사항
어느 노 정객과의 시간여행 [전자자료] : 友巖 김재순이 말하는 한국 근현대사 / 대담: 안병훈 ; 지은이: 김재순, 안병훈 인기도
발행사항
서울 : 기파랑, 2016 (서울 : 교보문고)
청구기호
전자형태로만 열람 가능함
형태사항
전자책 1책(396 p.)
표준번호/부호
ISBN: 9788965237082(종이책)
제어번호
MONO1201762979
주기사항
인쇄자료(책자형)로도 이용가능
이용가능한 다른 형태자료:어느 노 정객과의 시간여행  바로보기
원문
  • 출판사 책소개 (알라딘 제공)

    드라마 같았던 삶의 궤적

    7선 국회의원이며 제13대 국회의장(1988∼1990년)을 역임한 우암(友巖) 김재순(金在淳)의 일생을 대담 형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지난 5월 17일 93세를 일기로 별세한 그는 안병훈(安秉勳) 도서출판 기파랑 대표(前 조선일보 대표이사 부사장)와 대담을 나누며 ‘원로 정치인’이자 월간 <샘터>를 창간한 ‘특출한 문화인’으로서의 자신의 발자취를 회고했다. 따라서 이 책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고(遺稿)에 필적한다.
    책에는 그의 긴 정치 역정에 담긴 숱한 비화(秘話)가 소개된다. 가령 한일국교정상화를 앞두고 일본 정계의 막후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瀨島龍三)를 당시 한국의 2인자로 꼽히던 김종필(金鍾泌)에게 소개했다거나, 또 육영수(陸英修) 여사 사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재혼을 권하는 세지마의 당부를 청와대로 들어가 직접 전했다는 이야기 등은 세상에 처음 알려지는 사실들이다. 언급된 내용을 요약해보면….

    〔이토추상사(伊藤忠商社)에 들어가 세지마 류조와 친해진 평양상업학교 2년 선배 임노춘(林魯春)으로부터 김재순에게 연락이 왔다. 세지마가 한국에 와서 JP(김종필)를 만나고 싶어 하는데, 다리를 놓아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JP와 세지마가 충무로3가에 있던 대원호텔에서 만난다. 1965년 6월의 한일 국교정상화는 두 말할 것도 없고, 1962년 11월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작성되기 이전부터 JP와 세지마가 이미 아는 사이였고, 둘 사이에 ‘큰 거래’가 이루어졌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바로 그 세지마 류조가 육영수 여사 서거 후 박정희 대통령의 재혼 문제를 김재순에게 당부했다. 청와대에 들어가 박 대통령에게 세지마의 말을 전했더니 대통령이 “나보다 정 의장 먼저 가라고 그러세요”라고 답했다. 그때 정일권(丁一權) 국회의장도 홀아비로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김재순이 “세지마의 뜻이 워낙 간곡합니다”고 했더니 박 대통령이 잠시 침묵하다가 “근혜 때문에…”라면서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정치판과 ‘토사구팽(兎死狗烹)’

    1993년 2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여 뒤, 주돈식(朱燉植) 청와대 정무수석이 YS의 뜻을 전하러 김재순을 찾아왔다. ‘축재(蓄財)’ 운운 하는 언론 보도가 난 다음이었다. 주 수석은 평기자 때부터 국회 출입기자를 해서 잘 아는 사이였다. 그가 우물쭈물하면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김재순은 “공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고 있으니 편안하게 YS가 시키는 대로 얘기하라”고 하는데도 주돈식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지 않았다.
    더 물어봤자 주 수석 입장만 난처해질 것 같아 “자네가 나와 영삼이를 가까이에서 봤으니 나와 영삼이 중 누가 더 청렴하고 정직하게 살아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 거 아닌가. 내가 정계를 떠나겠으니 영삼이에게 그대로 전하라. 그만 가시게”라고 말해주었다.
    이튿날, ‘YS 대통령 만들기’에 진력(盡力)했던 김재순은 허망하게도 「정계를 떠나면서」라는 은퇴 선언서를 당(黨) 기자실에 배포해야했다. 거기에 적힌 문구, ‘정계를 떠남에 있어서 본인 개인으로는 토사구팽(兔死狗烹)의 감회가 없지 않으나…’로 인해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세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젊은 시절부터 김재순은 정곡(正鵠)을 찌르는 표현법 구사에 능숙했다. 그가 정치에 발을 디딘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5년의 일이다. 그해 9월 시공관에서 민주당 창당대회가 열리고, 10월에 김재순은 민주당 선전부 차장(부장 曺在千)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5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전부에서 결정한 선거구호가 저 유명한 ‘못 살겠다 갈아보자’였다. 여러 아이디어가 나온 가운데 ‘못 살겠다 바꿔보자’가 그 중 가장 간명하고 괜찮아 보였는데, ‘바꿔보자’의 ‘꿔’가 된소리라 어감이 좋지 않다고 판단한 김재순이 ‘갈아보자’로 고치자는 제안을 하여 정해진 절묘한 구호였던 것이다.

    월간 <새벽>에서 <샘터>까지, 지식과 교양의 ‘샘물’을 긷다

    〈새벽〉은 1926년 5월 주요한(朱耀翰)이 편집·발행인으로 창간한 종합 월간지 〈동광(東光)〉을 뿌리로 하는 잡지였다. 1959년 10월 혁신호를 내면서 편집 진용을 개편하여 김재순이 주간(사장 張利郁)을 맡았다. 이후 김재순은 출판에 대한 열정을 품게 되었다. 그러다 한국기능올림픽 위원장이 되어 여러 기능공들을 만났고, 거의 다 가난한 그들에게 자긍심, 자신감, 자기애를 불어넣어 줄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월간 〈샘터〉 발간을 결심했다. 창간호에 「젊음을 아끼자」는 특집을 마련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샘터>의 창간호(1970년 4월호) 가격은 담뱃값을 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당시 최고급 담배 ‘청자’가 100원이어서 <샘터>의 정가도 100원으로 정해졌다.
    〈샘터〉를 창간할 무렵 별명이 왕초였던 <한국일보> 장기영(張基榮) 사주가 “아니, 김 의원 돈 많소? 잡지는 돈 없이는 안 됩니다. 우리 <주간한국> 보십시오. 전부 벗겨야 됩니다. 요새 벗지 않으면 안 봅니다”고 했다. 김재순은 대뜸 “벗기는 건 왕초가 벗기시고 나는 입히렵니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했다. 김재순이 ‘입힌다’고 한 뜻은 ‘지식을 입히고 정신적으로 자양을 자꾸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입히는 잡지’를 만들면서 반응이 절정에 달했던 1970년대 중반에는 매달 독자투고만 2천 통 이상, 광고를 안 내도 50만 부까지 찍었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긴 투병으로 심신이 지친 김재순의 뇌리에 어느 날 문득 성철 스님이 떠올랐다. 그는 성철 스님을 만나러 무작정 해인사를 찾아갔다. 스님이 머무는 백련암까지 한참 산길을 올라가 두 시간여 만에 간신히 당도했더니 “누가 나를 찾아왔다고?”하면서 스님이 고함을 지른 뒤, 예의 그 ‘3천 배(拜)’를 하라고 했다. 김재순은 “나는 성철 스님이 아니라 인간 이성철을 만나러 왔다”고 버텼다. 결국 스님의 허락이 내려져 두 시간여 이야기를 나누고 서울로 돌아와 해인사로 매달 〈샘터〉를 부쳤더니 성철 스님은 열반(涅槃)에 들기 전까지 꼬박꼬박 책값을 보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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