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백석 (齊白石, 1863~1957)은 청말·민국초의 격동의 혼란한 역사적 시기에 근 한세기 동안 중국회화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 다양한 소재로 다량의 작품을 남긴 장수한 화가이다. 그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교육을 받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목공생활과 민간화가(民間畵家)를 통하여 독학으로 회화의 기초를 닦았으며, 일생동안 6명의 스승과 수많은 교유관계, 7년간의 외유(外遊)를 통하여 그의 예술은 거듭나고 또 거듭나며, 전통을 극복하고 시대성을 반영한 회화에 있어 일격(逸格)의 독창적인 화풍을 창출하였다.
제백석은 시·서·화·전각 뿐만아니라 회화에 있어서 산수, 인물, 초충, 화훼, 잡화 등 다방면에 뛰어난 다재다능한 예술가로서, 그의 농민적인 사상과 감정, 농촌생활에 대한 애착,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 자연관찰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통한 끝없는 사생과 연구를 거듭해 고고하고 초월적인 중국 문인화를 민중미술로 귀속시키며, 중국화의 근·현대를 잇는 신문인화풍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는 그의 다양한 작품 중 초충·화훼잡화에 있어서의 괄목할만한 업적으로, 명대(明代) 서위(徐渭)의 예술에서 출발하여 명말·청초의 석도(石濤)와 팔대산인(八大山人), 청 중기의 양주화파(揚州畵派)를 거쳐 오창석(吳昌碩)에 이르는 계보에서 그 근원을 찾아 볼 수 있으며, 제백석에 와서 현대적 완성을 이루었다.
이러한 제백석의 초충·화훼잡화는 그의 예술생애 동안 크게 두 번의 변화를 통하여 발전하게 되는데, 첫 번째는 1902년부터의 7년 동안의 외유(外遊)로 인하여 사생을 바탕으로 한 대사의화법(大寫意畵法)으로의 변화이며, 이로 인하여 이전의 민간회화와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식의 전통의 답습적 화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두 번째는 1920년 북경에 정착하게 되면서 진사증(陳師曾)과의 교유관계를 통한 홍화묵엽법(紅花墨葉法)의 창출과 대사의화법을 완성하며 아울러 이 두 화법의 조화로운 융화는 그만의 새로운 신문인 화풍을 창출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