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1월, 한미연합사(ROK-U.S. Combined Forces Command / CFC)의 창설은 한미군사동맹의 결정적인 변화로 평가 받는 사건이었다. 본 논문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남한의 안보를 책임져 왔던 유엔사(United Nations Command / UNC)의 임무를 대신하여 1978년부터 새로운 한미군사동맹 체제를 대변하게 되는 한미연합사의 형성과정과 구조에 주목한다.
기존, 주한미군과 유엔사 중심의 한미연합작전체제는 한국군의 입장과 상황이 적극 반영되기에는 많은 한계점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유사시, 보다 적절하고 효과적인 대응책 마련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개선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던 것은 1968년의 1.21 청와대 기습사건과 푸에블로(Pueblo)호 납치사건이 발생한 이후였다. 특히, 두 사건에 대한 미국의 상이한 대응책은 한국정부가 기존 양국의 군사적 준비태세는 물론 한미군사동맹의 효율성에 대해 우려를 갖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안보위협 사건들을 통해 한국정부는 1970년대 이후부터 양국이 군사적 위기상황에 보다 신속하고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는 새로운 연합작전체제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정부도 1969년 닉슨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유지비용의 부담을 만회하기 위한 새로운 한미군사동맹 체제의 구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0년대 초, 제3세계 국가들과 공산권이 제기한 유엔사의 해체문제는 한·미 양국이 유엔사를 대체할 새로운 군사기구의 창설을 구상하게 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1974년에 시작된 한미연합사의 창설협의는 결코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한국은 기존 유엔사 중심의 작전체제와 달리, 한국군의 입장과 상황을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동시에, 미국과 보다 긴밀하고 상호 연합할 수 있는 새로운 작전체제를 원하고 있었다. 반면, 미국도 기존의 입장과 지위를 쉽게 변경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몇 년간 지속되었던 양국의 협상과정은 한미연합사라는 매우 독특하고, 사상 유례가 없는 "연합" 사령부를 창설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창설된 한미연합사는 군사적, 전략적, 안보적, 경제적 차원 등 많은 분야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한미연합사의 창설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한미연합사의 창설이 갖는 궁극적인 의미를 2가지 차원에서 살펴보고 있다. 첫째는 1978년 한미연합사 창설은 한·미 양국이 협상을 통해 이끌어낸 win-win 전략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이다. 양국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국제적 정세를 감안하여 자국의 국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체제로의 전환을 구상했고 그 목적을 상당부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70년대 한국이라는 약소국의 국력과 지위를 감안할 때 한미연합사의 창설을 이끌어낸 한국정부의 협상력도 일정 부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한미연합사의 창설은 한미군사동맹 관계에서 양국의 지위와 입장이 다소나마 대등하게 전환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것은 한미군사동맹 체결 이후 약 30년 만에 이루어낸 변화였고,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한미연합사의 창설을 통한 한미연합방위체제의 형성은 한국의 국가안보는 물론 경제적 분야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광범위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비록 한미연합사와 한미연합방위체제가 여전히 수직적 체제이며 군사주권의 상실이라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8년부터 오늘날까지 근 30년 동안 한미연합방위체제를 바탕으로 이루어 온 긍정적인 결과들마저 모조리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국가안보라는 분야는 어떤 역사적 시점에서 각국이 국익을 위해 경쟁과 타협을 한다는 국제 정치의 맥락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수립과 함께 시작된 한미군사동맹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불가피한 국가적 선택이었던 것처럼 1978년 한미연합사의 창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