又峰 趙熙龍은 朝鮮 後期 閭巷文人畵家의 한 사람으로서 傳統的 南宗文人畵를 수용하여 繪畵에 있어서 詩書畵一致를 추구하면서도, 性靈論에 입각한 感性과 個性의 표현에 주력하여 文人畵에 대한 畵論을 새롭게 정립하고 獨創的인 畵風과 繪畵觀을 確立하였다.
朝鮮後期에는 南宗文人畵風이 널리 확산되면서 前代에 유행하였던 鄭歚 과 金弘道 등의 眞景繪畵는 頹落해가고 있었으며, 文字香·書卷氣로 그림에 높은 정신세계를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金正喜의 논리가 閭巷文人畵家들을 비롯한 이 시기의 창작 성향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趙熙龍을 비롯한 閭巷人들은 京華世族과 교류하면서 富를 바탕으로 한 經濟的 地位, 敎育的 熱意를 배경으로 政治, 文藝活動이 활발해졌으며 兩班에 의한 從屬的 위치에서 벗어나 文壇과 畵壇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
趙熙龍은 김정희와 깊은 교유관계를 맺으면서 그의 영향을 받아 淸代의 考證學 등 신진문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였다. 그러나 김정희를 모방하기 보다는 中人으로서의 自意識과 書畵家로서의 自矜心으로 詩書畵一致의 思想을 바탕으로 藝術家的 手藝를 강조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펼쳐나갔다.
趙熙龍은 善의 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조선시대의 性理學 풍토에서는 수용에 한계가 있었던 性靈論的인 美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梅花圖에서 獨創的인 영역을 확립하였다. 그의 梅花圖는 形寫的인 면을 강조한 듯 보이나 外形만을 닮게 그린 것이 아니라, 事物이 주는 靈感과 자신의 心境을 그림에 移入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창조한 새로운 형식의 文人畵이다.
揚州畵派로부터 받은 영향을 독창적으로 해석한 그의 自由奔放하고 裝飾的인 화풍은 傳統的인 文人書를 추구한 선비들의 취향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며, 感性을 重視하고 個性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점에서 近代的인 性向이 뚜렷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趙熙龍의 예술에 대한 자유로운 시각은 現代의 文人書家에게도 요구되는 중요한 德目이며, 문인화를 현대적으로 解釋하는 일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趙熙龍의 梅花圖를 畵風의 변화를 기준으로 前期, 中期, 後期의 세 時期로 구분하여 表現樣式의 變遷過程을 분석하고, 그의 藝術觀이 매화도에 구현되는 양상을 살펴보려한다.
趙熙龍의 藝術世界와 그의 梅花圖의 表現樣式을 연구함으로써, 南宗文人書의 바탕 위에 자신만의 獨自的 畵風을 이룩한 그의 梅花圖의 繪畵史的 위치와 역할, 가치 및 現代的 表現으로의 응용 가능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