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의 목적은 중국 민족주의의 실용주의적 특징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우선 중국 민족주의의 역사적 전개를 재구성하고 중국의 민족주의를 국가 민족주의의 주도와 대중 민족주의의 성장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관점 하에서 대중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표출되었던 1999년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 대사관 폭격 사건, 2001년 미국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 간의 충돌 사건, 그리고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와 군국주의를 미화한 역사교과서 개정으로 폭발한 2005년 반일시위 사례를 분석했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백년의 국치'라는 용어가 보여주듯이 외세에 의한 침탈과 굴욕의 근대사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민족주의는 청조의 영토를 보존하고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중국의 민족주의는 초기부터 중앙집권적인 국가 민족주의의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항일 투쟁과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은 다양한 민족주의를 포용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국의 민족주의는 실용주의적 국가민족주의의 특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반우파 투쟁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유토피아적 공산주의로 대체되었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은 사회주의 사상의 쇠퇴와 정치적 정당성의 위기를 불러왔으며, 중국공산당은 사상과 정당성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다시 민족주의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혁·개방으로 발생된 각종 사회문제의 심화와 세계적인 자유화의 흐름은 자유주의적 민족주의를 부활시켰다. 결국 1989년 천안문 사건을 통해 자유주의적 민족주의는 당국과 충돌하면서 파국을 맞았다. 천안문 사건에 뒤이은 중국 봉쇄와 사회주의권의 몰락까지 더해 체제의 불안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중국 당국은 '애국주의 교육운동'을 통해 민족주의를 심화시킴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반미,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대중 민족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중에 대해서는, 폭격사건이 발생하고 대중에게 대중민족주의의 적절한 분출구가 필요했다. 다시 말해 대중의 감정적이고 격동적인 불만을 해소시키고 적절히 통제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대중 민족주의는 1999년 나토의 유고주재 중국 대사관 폭격과 2001년 남중국해에서 발생한 중미간 군용기 충돌로 본격적으로 분출되었다. 특히 3주간 지속되며 전국적 규모로 진행된 2005년의 반일시위는 중국 인민이 천안문 사건 이후에 이전의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경제적 성취에만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일부의 관점과 달리 대중 민족주의의 심화와 새로운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고조되는 대중 민족주의에 대해 당국은 모순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통해 민주적 정당성을 달성할 수 없는 중국공산당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토대로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민족주의적 목표를 정당성의 근거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제적 성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안이나 대외 무역관계를 무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대외관계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감정의 표출은 제한되어야만 한다. 결국 당국은 겉으로는 민족주의적 수사를 유지하면서도 민족주의가 경제적 성과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철저한 통제를 유지하는 ' 양면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를 경제적 이익과 교환하는 이러한 실용주의적, 도구적 속성은 1999년과 2001년의 시위에 대한 당국의 통제에서 잘 드러난다. 당국은 WTO 가입과 베이징 올림픽 유치라는 커다란 경제적 이익을 포기할 수 없었으며,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안정적인 중미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2005년의 반일시위 이후에 계속되고 있는 중일 관계의 교착을 통해 중국 민족주의의 실용주의적 성격이 일정 부분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90, 1996년 조어도 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은 중일 관계에서도 경제적 이익을 위해 민족주의를 희생하며 관계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2005년의 반일 시위 이후에 중국은 오히려 일본의 관계개선 노력을 무시했다. 그러나 중국이 경제적 이익을 위해 민족주의를 통제하는 기존의 입장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아니다. 이는 중일 무역관계의 역전과 중국 경제에 대한 ODA의 영향력 감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적 이익을 위해 민족주의적 정당성을 포기할 인센티브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총리를 비롯한 일본의 강경파를 고립시키기 위해 일본의 경제계를 포용하려는 중국의 노력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 당국은 일본의 우경화를 경계하고 중일 관계의 일정한 재조정을 시도할 뿐, 경제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일 관계의 파탄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변화가 중미 관계에 그대로 적용되기는 어렵다. 국력과 국제적 지위의 격차는 물론 미국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구조 때문에 중국이 경제발전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점을 잘 인식하고 있는 중국이 중일관계에서 나타난 태도변화를 중미관계에서도 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